메인화면으로
"언제까지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로 팽개쳐 둘 건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언제까지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로 팽개쳐 둘 건가"

[전태일통신 54] 죽어서도 차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언론 매체와 인터뷰할 때나 강의 끝난 뒤 질의응답 시간에 사람들이 가끔 묻는 질문이 있다.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묻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90년대 초,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한꺼번에 무너졌을 때, 나라 안에서는 운동권의 90% 이상이 선택했던 '비판적 지지 노선'이 대선에서 무참히 패배했을 때, 사람들의 세계관이 흔들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을 때, 사상에 대한 믿음이 거의 공황 상태였을 때, 그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견디셨느냐? 그때 당신을 지탱한 힘은 무엇이었느냐?"
  
  그 질문에 나는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답하지만 대략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제 주변에 항상 있었습니다. 노동조합 활동하다 해고된 노동자들, 일하다 다치거나 병들거나 사망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끊임없이 제 주변에 있었습니다. '내가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하룻밤을 새면 저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밥 한 그릇 먹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수준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항상 저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것이 저에게는 그 힘든 시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원의 끈이었습니다."
  
  나의 이러한 대답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을 보인 사람이 바로 박승옥 씨다. 그는 "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라는 짧은 말로 나를 감동시켰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그런데, 한 때 나에게 '구원의 끈'이었을 만큼 중요한 노동상담을 제대로 못한 지가 한참 됐다. 내가 너무 바빠져서 사무실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우리 사무실 말고도 노동상담을 잘 하는 곳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본부와 각 지역 사무실에서 운영하는 법률원이나 노동상담소의 전문성은 매우 뛰어나다. 그래서 요즘 나한테 가끔 걸려오는 노동상담 전화는 그런 사무실들이 문을 닫았을 시간일 때가 많다.
  
  상담소들이 모두 문을 닫고 쉬는 지난 연휴 첫날에 산업재해 상담 전화를 두 건이나 받았다. "지금 산재 관련 상담 가능한지요. 사망 사건입니다." 전화기의 짧은 문자 메시지를 보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지금까지 봤던 사고 현장과 영안실 모습과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똑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22살의 젊은 노동자가 신축 건물에 올라가 전기공사를 하다가 떨어져 사망했는데, 공사는 원청회사로부터 수차례의 도급을 받아 시행됐고, 사망한 노동자는 하청회사 소속이었으며, 회사에서는 "산재보험에서 나오는 보상금 외에는 절대로 더 이상 배상할 수 없다"는 배짱으로 나오는데, 그 하청회사에는 노동조합도 없어서 적절한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전화한 사람은 사망한 노동자의 먼 친척인데 예전에 나한테 교육을 몇 번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장례를 치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산재보험에서 나오는 보상금과 민사상 손해배상액은 얼마나 되는지, 혹시 나중에 소송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지금 준비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하고나서 "나중에 또 궁금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또 한 사건은 나이가 환갑이 다 된 건설노동자였다. 오래 전에 다친 사고로 치료와 보상을 받고 종결했지만 최근에 또다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불편해져서 재요양을 받고 싶어 하는 경우였다.
  
  두 사건 모두 수차례 하도급을 거치면서 공사가 시행돼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치거나 죽어서도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새해 벽두에 우리는 또다시 일하다가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슬픈 소식부터 들어야 했다. "죽어서도 눈 못 감는 청소부 아주머니", "철도공사-용역업체는 책임 발뺌", "새해가 무색한 청소 용역 노동자의 죽음", "청소용역 노동자 사망, 공사-용역업체 '우리 책임 아니다'" 기사 제목들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무거워진다.
  
  부천역사에서 청소용역 노동자로 근무하던 전영숙(53) 씨가 쓰레기 분리수거 작업을 하기 위해 철로를 건너다 전동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명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발생 3주가 지나도록 전영숙 씨를 치인 열차와 운전한 기관사가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가족들은 "시설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철도공사는 용역업체에 물어보라고 하고, 안전관리 책임이 있는 용역업체는 아예 우리를 만나주지 도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철도공사는 "이번 사고는 용역업체가 안전교육을 시키지 않은 가운데 무단횡단으로 철길을 건너다 사고가 난 것으로" 철도공사가 책임질 내용이 아니라는 입장이고, 전영숙 씨를 고용했던 청소용역업체 (주)SDK는 "매일 철길을 횡단하지 말라고 안전교육을 했다"며 "숨진 전씨 본인의 과실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한다. 전 씨가 일하던 승강장 끝에서 쓰레기 분리수거장까지는 직선거리로 30여 미터에 불과하지만 안전수칙에 따라 선로를 피해 가려면 350여 미터를 돌아가야 했다. 그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350여 미터를 돌아가라고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얘기인지 역시 "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대부분 선로 쪽을 통해 분리수거장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철도공사와 철도노조가 맺은 단체협약에는 정규직 노동자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으면 2억 원, 공사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는 1억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영숙 씨는 이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외주위탁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다. 비정규직 노동자, 그 중에서도 외주위탁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는 죽어서도 차별을 받는다. KTX 승무원들도 외주외탁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승무원들이 "비정규직이라도 좋으니 철도공사가 우리를 직접 고용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2003년 2월 대구지하철 참사가 벌어졌을 때 중앙로역에서 숨진 '청소 아주머니' 3명의 쓸쓸한 장례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순자(51), 김정숙(59), 정영선(59) 씨 등은 한 달에 60만 원을 받고 새벽 6시부터 오후 2시, 또는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2교대로 하루 8시간씩 중앙로역 청소 일을 맡아 왔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일하던 역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들의 장례식에는 직계 가족과 동료 아주머니 몇 명만이 참석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이틀 전 치러진 지하철공사 직원의 장례식에 지하철공사 관계자, 동료직원,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대구지하철공사는 정규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의금은 물론 위로 조화 하나 보내지 않았다. 장례식에 참가한 공사 직원도 없었다. 이들을 고용했던 용역회사 사장이 5만 원씩 조의금을 보냈을 뿐이다.
  
  대구지하철 기지에는 공사 직원 4명의 분향소가 차려졌지만 이 청소 아주머니들은 이곳에서도 제외됐다. 그나마 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이 "청소 아주머니들의 영정도 함께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부터 3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외주위탁업체 소속 비정규칙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처지는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더는 일에 관심을 갖는, 더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과 싸우는 일에 힘을 보태는, 그런 새해가 됐으면 좋겠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