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델스키는 뛰어난 케인스 전기 작가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영국의 대표적인 케인스학파 경제학자 중 한 명이고 정치에도 직접 뛰어든 인물이다. 처음에는 노동당원으로 출발했지만, 1980년대 초 노동당이 이념적 혼란에 빠지자 탈당해 사회민주당 창당에 함께 했다. 사회민주당이 현재의 자유민주당으로 흡수 통합된 뒤에는 급기야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러나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에 반대한 탓에 보수당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좌우를 막론하고 영국의 주요 정당을 다 거친 셈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철새도 이런 철새가 없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이 모두가 자신의 신념, 즉 케인스식 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일관된 역정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가 아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와 함께 쓴 책이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김병화 옮김, 부키 펴냄, 2013년)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은 신자유주의도 공격하지만 마르크스주의나 생태주의도 깐다. 이 때문에 "철새 정치인이 어디 감히" 식의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거부감을 일단 죽이고 책장을 넘겨보면 예상외로 진지한 고민과 제안들을 발견하게 된다. 뜻밖에도 그런 제안 중에는 시민 기본 소득도 있다. 스키델스키 부자는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현금 급여를 제공한다는 기본소득 구상을 '좋은 삶'을 실현할 대안들 중 하나로 제시한다.
기본 소득은 20세기 케인스주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대안이다. 물론 제임스 미드처럼 기본 소득을 주창한 케인스학파 경제학자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스키델스키가 정계에서 대변했던 전통 케인스주의 정책 패키지에는 낯선 구상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혹시 철학 전공자인 아들 에드워드의 생각이 크게 반영된 게 아닌지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버지 스키델스키는 3년 전에 또 다른 원로 경제학자 메그나드 데사이와 함께 <가디언>에 발표한 글(☞관련 기사 : "Beyond Keynes and Hayek")에서, 종래의 케인스주의 처방을 넘어선 대책만이 현 경제 위기에 출구를 열어줄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기본 소득은 그 나름대로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택한 새로운 대안이다.
스키델스키 부자의 최근 모색을 접하고 보니, 또 다른 영국 경제학자 한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몇 해 전(2007년) 작고한 앤드류 글린이다. 글린만큼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대척점에 선 인물도 또 없을 것이다. 그는 초지일관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젊었을 적에는 '밀리탄트'라는 트로츠키주의 정파에 가입해 활동했고, 저 유명한 1984년 광부 파업을 비롯해 노동자 투쟁에 항상 함께 했다.
글린은 1980년대 중반에 노동당 좌파와 손잡고 대처 정부에 맞서는 정책 대안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은 국유화와 경제 계획으로 1년에 일자리를 100만 개씩 새로 만들어 경제 침체를 극복하자는 것이었다(A Million Jobs a Year : The Case for Planning Full Employment, Verso, 1985). 사실 스키델스키 같은 사람들이 노동당을 떠나 사회민주당을 만든 것은 바로 이런 급진적 주장을 하는 당 내 좌파의 득세가 못마땅해서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글린도 그의 마지막 저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 1980년 이후>(김수행, 정상준 옮김, 필맥 펴냄, 2008년)에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으로 기본 소득을 꺼내든다는 사실이다. 노동 소득 확보 통로를 늘리기 위해 일자리를 새로 만든다는 과거의 처방 대신 모든 시민에게 최저 생활비 수준의 현금 급여를 제공하자고 주장한다. 영국 역사상 가장 야심찬 일자리 확대 정책을 제출한 인물이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한 세대에 걸친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를 거친 뒤, 케인스주의자 스키델스키와 마르크스주의자 글린은 이렇게 서로 만났다. 기본 소득 구상이라는 이정표 아래서 말이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기본 소득 구상에 대한 관심과 동의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한 사례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는 잡지 <녹색평론>과 <말과 활>이 거의 동시에 기본 소득을 큼지막하게 다뤘다. 나 역시 기본 소득에 공감하는 바 크기에 이런 분위기가 반갑다. 기본 소득을 둘러싼 토론이 더 많아지고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바도 있다. 전통적인 복지 국가 건설 입장과 기본 소득 실시 입장을 지나치게 서로 대립시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본 소득은 하나의 제안이다. 새로운 교리 항목이나 정파 식별을 위한 표지가 아니다. 부의 재분배와 보편 복지라는 큰 방향에서 전통적 복지 국가론과 기본 소득론은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며 협력해야지 진영부터 가를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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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나는 보편 복지 실현의 연합 전선을 발전시키면서 시민 기본 소득을 향해 나아가는 전략을 제안하고 싶다. 어차피 자본주의 아래서는 기본 소득이 단번에 완성된 형태로 도입될 수 없다. 되도록 애초의 문제의식과 의도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단계적으로 실현해가지 않을 수 없다. 그 출발점으로 나는 기초 연금에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기초 연금은 복지 국가를 만들자면 반드시 쟁취해야 할 제도다. 그런데 이것은 기본 소득을 도입한다는 관점에서는, 노인 인구에 한해 기본 소득을 부분적으로 실시하는 것(노인 기본 소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전통적 복지 국가 노선과 기본 소득 노선 모두 일단 실질적인 기초 연금 관철을 위해 힘을 합한 뒤, 기초 연금이 실제 실시되면 그 효과를 보면서 21세기 보편 복지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효과에 대한 판단에 따라, 기초 연금에 다른 복지 제도들을 더해 복지 국가의 얼개를 만들 수도 있겠고 아니면 기초 연금의 원리를 전 인구로 확대해 시민 기본 소득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제안에 덧붙여 나는 기본 소득론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한 가지 근본 문제도 짚고 싶다. 이것은 <중국화하는 일본>(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 2013년)에서 저자 요나하 준이 던지는 물음이다. 사실 <중국화하는 일본>은 그렇게 진지하게 대할 책은 아니다. 하지만 요나하 준이 기본 소득을 일본 사회가 추구할 만한 대안들 중 하나로 검토하면서 지적하는 문제만은 허투루 볼 게 아니다. 그는 시민 사회가 국가를 압도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일본에서 국가가 기본 소득을 지급하게 되면 이게 자칫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예속을 더욱 강화하지는 않을지 우려한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 기본 소득은 재래의 국가 사회주의 체제와 함께 할 수 없다. 지구 위 다른 어느 곳보다 국가주의의 그늘이 짙은 동아시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국가가 기본 소득을 지급하는 제도는 역설적으로 가장 비국가주의적인 탈자본주의 모델과 병행해야만 한다. 가령 생산자 연합, 소비자 연합 등으로 기존 국가 권력이 분산되는 길드 사회주의 같은 탈자본주의 모델이 기본 소득 구상과 가장 잘 어울린다. 또 다른 기본 소득론자 에릭 올린 라이트가 '사회' 중심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리얼 유토피아>(권화현 옮김, 들녘 펴냄, 2012년)).
국가 기구에 대한 불신이 클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의 자생적 조직화도 취약한 한국 사회에서 이게 과연 실현 가능한 대안일까? 나를 포함한 기본 소득 지지자들은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기본 소득을 제창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운을 처음 뗀 정도에 불과하다. 필요한 것은 기본 소득을 포함한, 우리 세대가 추구해야 할 '잠정적 유토피아'(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전반적인 구상이다. 편 가르기식 논쟁이 아니라 이 토론에 나서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착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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