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 기고자에게 있어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을 직함을 정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너무 튀어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평범하면 재미가 떨어진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함부로 참칭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고, 그렇다고 단순히 '자유기고가' 같은 호칭을 쓰면 그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아무 말이나 떠드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좋은 직함을 스스로 지어 붙이면 그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해 구차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분야, 생산해내는 원고의 수준, 독자의 눈높이까지 한번에 그려내어 보여주는, 일종의 '시적 도약'을 이룩해낸 직함을 찾아낼 경우라면 그렇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완벽한 호칭을 찾아내 스스로에게 붙인 글쟁이는 단 한 사람뿐이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방금 나는 '시적 도약'이라는 표현을 썼다. 실로 그렇다. '지식소매상'이라니, 이 얼마나 완벽한가. 일단 본인이 글을 쓰는 대상이 '지식'이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가령 '음악 칼럼니스트'가 갑자기 영화에 대해 기고를 하면 다소 뻘쭘해지는 것과 달리, 운신의 폭이 매우 넓다. 무슨 주제에 대해 청탁을 받건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어떻게 살 것인가>(유시민 지음, 아포리아 펴냄)ⓒ프레시안 |
바로 그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돌아왔다. 2013년 2월 19일, 불현듯 트위터에서 정계 은퇴를 선언한 그는, 새 책 <어떻게 살 것인가>(아포리아 펴냄)를 들고 유권자가 아닌 독자들의 곁으로 찾아왔다. 초판이 발행된 것은 3월 13일의 일이다.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초판 2쇄는 3월 18일에 발행되었으며, 판권사항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발행되자마자 10만 부를 찍어낸 베스트셀러이다. 유시민은 '지식소매상'이지만, 마치 대형 마트처럼 수많은 소비자를 상대하는 초대형 소매상인 셈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어떻게 살 것인가>는, 유시민의 예전 책들이 내뿜던 총기를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오랜 세월 단련된 문장은 주술호응을 놓치는 일 없이 날렵하지만, 서술은 뒤죽박죽이고 주제는 일관성 없이 흘러가며, 결정적으로 저자 본인이 자신이 책 제목에서 던져놓은 질문에 대해 강렬한 내적 확신을 통한 대답을 들려주지 못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쪽은 독자가 아니라 유시민인 것처럼 보인다.
2.
1997년 IMF 외환위기와 함께 금리가 폭등했고 한국 돈의 가치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국내에서 벌어들인 소득으로 해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유시민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대에 다녀왔다. 제대 후 잠시 출판사에서 일하는 과정을 거쳐, 36세 국회의원이었던 학교 선배 이해찬의 보좌관이 되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푸른나무 펴냄, 1988년)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그리하여 훌쩍 독일 유학을 떠났던 유시민은, "마흔 살 새 아침에 찾아든 자각 때문에 독일 유학을 중단했다."(77쪽, <어떻게 살 것인가>)
막 시작한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 집필을 그만두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 오는 인세 수입을 독일 마르크로 바꾸자 반 토막이 된 현실도 한몫을 했지만 그게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은 아니다. 아직 어디에도 삶의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했기에 크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오래 한 우물을 팠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로 가는 편도 탑승권을 끊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떠났다. (같은 곳)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그는 짧은 계약직 공무원 생활을 거쳐 자유기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기저기 기고를 하고 방송을 하다가 어느 날 불현듯 영감을 받아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2001년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의 <남자 vs. 남자>(개마고원 펴냄)에 그 어휘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유시민이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고 부른 것은 적어도 2001년 이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렇게 형성된 정체성은 2002년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돌베개 펴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또렷하게 선언되었다.
내 직업은 '지식소매상'이다. 이 '경제학 카페'를 여는 것도 다 내 영업활동 가운데 하나다.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에 오면 경제학과 경제현상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카페가 경제에 대한 정보와 경제학 지식 그 자체를 파는 곳은 아니다.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8쪽)
그의 저작을 크게 '대중교양서'와 '정치평론서'로 나눠보자. 전자에 속하는 책들 중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이전에 출간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거꾸로 보는 세계사>(푸른나무 펴냄, 1988년),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푸른나무 펴냄, 1992년),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푸른나무 펴냄, 1994). 이 책들 중 그 어디에도 스스로를 명시적으로 '지식소매상'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독자가 사전 지식 없이 그의 책을 집어 들고, '이 사람은 정말 쉽게 지식을 전달하는군'이라고 감탄하며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을 지식소매상이라고 부르네?'라고 말하게 한 책을 꼽자면, 그것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인 것이다.
그것이 2002년 1월의 일이다. 아직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2002년 월드컵을 통한 정몽준의 인기몰이가 등장하지도 않은 상태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작은 카페를 열고 손님들에게 "맛있는 커피를 팔려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맛나게 끓이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같은 곳)고 있었다. 이 한가로운 풍경은 불과 몇 달 뒤 전에 없던 정치적 폭풍 속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 2011년 이정희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와 유시민 당시 국민참여당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3.
2002년 3월 9일,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경선이 시작되었다. 첫 경선지는 제주도였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한화갑이 예상외의 1위를 기록하고, 당시 대세론의 주인공이었던 이인제가 2위, 그 뒤 3위를 노무현이 차지하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민주당 후보로는 이인제가 대세인데, 이인제와 이회창이 맞붙으면 이회창이 이긴다는 여론조사가 연신 나오고 있었으므로, 대세론이 곧 필패론인 절망적 상황인 것인데, 그 구도에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주관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과 이회창이 맞붙을 경우 노무현이 승리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여론조사는 사흘 뒤, 3월 16일로 예정된 광주 경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인제 대세론이 깨지고 노무현이 광주 경선에서 1위로 올라서면서 희대의 정치 드라마가 탄생했다. 경상도 남자 노무현이 광주에서 1위를 했다는 것도 커다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주당의 깃발을 달고 부산에서 연이어 낙선하면서 '바보 노무현'이 된 그를, 지역감정을 넘어서려 하고 실제로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후보가 되게끔 해주었다. 4월 27일, 노무현은 공식적으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몇 달 후 한나라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될 당시의 야당, 즉 신한국당에게 처참하게 패배한다. 특히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민석이 신한국당 후보 이명박에게 큰 표 차이로 진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인구의 4분의 1이 모여 있는 서울에서 패배한다면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도 희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후보 노무현은 당 내에서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지만,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물씬 불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수세에 몰렸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팀이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 역시 노무현에게는 결코 유리한 일이 아니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정몽준의 인기가 지지율로 환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6월 30일 월드컵이 끝날 때쯤,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는 이회창도 노무현도 아닌 정몽준이었다. 적어도 3자 구도로 대선이 치러진다면 노무현은 결코 당선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돌베게 펴냄, 2009)에 따르면, 유시민의 정치 행보가 시작된 것은 바로 그해 7월부터의 일이었다.
7월 중순경이었다. 명색이 여당 대통령 후보인데도 그날 오후에는 아무 일정이 없었다. 국민경선 때 선거공약 작성과 방송토론 준비를 도와주었던 유시민 씨를 찾아갔다. 경선이 끝난 뒤로는 통 보지 못했다. 그는 마포경찰서 뒷골목 허름한 건물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출판기획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또 경선을 해야 할지 모르니 다시 사람을 모아 보라고 부탁했다. 그는 7월 하순부터 노사모와 민주당 국민경선 자원봉사자들을 다시 규합해 '국민후보 지키기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개혁국민정당이라는 인터넷정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 개혁당은 정몽준 씨와의 단일화 경쟁에서 이기고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당선이 확정된 직후 민주당사에서 당선자 기자회견을 하고 곧바로 근처에 있던 개혁당 중앙당사를 방문해 특별한 고마움을 전했다. (<운명이다>, 193쪽)
유시민은 개혁당 창당 작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한 편의 책을 썼다. 이후 자신의 저작들의 목록을 정리하면서 줄곧 누락시키곤 하는 그 책의 제목은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개마고원 펴냄, 2002년)이다. 유시민이 '지식소매상' 의 간판을 걸고 '정치도매상'의 영업을 하는 기나긴 역정(이런, 무의식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말실수!) 역시, 이 책과 함께 시작한다.
4.
▲ <국가란 무엇인가>(유시민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
시민들이 주도한 언론 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을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는 뜻이다. 언론사의 권력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은 정치권에서도 제기되고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이 칼을 뽑았다. 그래서 2001년에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 조희준 <국민일보> 회장이 각각 구속됐다. 물론 노무현처럼 직접적으로 대립각을 세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언론과의 전쟁을 노무현이 시작했다고, 혹은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인 중 <조선일보>와 싸우는 사람은 오직 노무현뿐이었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물론 2002년 8월 책을 낸, 아마 6월이나 7월 무렵 원고 작업을 하고 있었을 유시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에는 대한민국을 반세기 동안 지배해온 '앙시엥 레짐(구체제)'의 목숨이 걸려 있"(<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7쪽)었다. "국민은 6월 항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의 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강고한 동맹을 맺은 극우언론과 극우정당의 사상적·정치적 지배에서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방시키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같은 곳)고 그는 생각했다. 요컨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조선일보>를 '이기는' 것은, 1987년에 못 다한 민주화의 과제를 완성하는 건곤일척의 승부,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같은 책, 11쪽)이 되고 만 것이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유시민이 택한 방법은 간단한 것이었다. 그 싸움의 길이를 늘리는 것이다. "이 싸움이 본격화된 것은 2001년이지만 그 서막이 열린 지는 이미 10여 년이 지났"(같은 책, 21쪽)다며, "이 둘의 싸움은 11년 전인 1991년 9월 17일 <조선일보>가 내보낸 인물 프로필에서 그 단초가 열렸"는데, "싸움을 건 쪽은 <조선일보>"(같은 책, 28쪽)라고 유시민은 말한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싸움을 걸어오자, 노무현은 "어차피 당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라면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싸워 죽는' 게 더 낫다"(같은 책, 64쪽)고 생각했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악연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일보> 그 자체의 악행의 역사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의 세계관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친일신문이며,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고,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정치인이 노무현이므로, <조선일보>의 반대를 뚫고 노무현을 당선시키는 것이야말로 민주화의 완성이라는 이 세계관은, 그러나 유시민의 독창적인 창작품이 아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여러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대변하듯이, 대통령 직선제와 정권교체를 이루어냈지만 그에 만족할 수 없었던 시민 사회의 에너지가, 언론개혁이라는 초점을 향해 모여들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2002년 대선은 이렇게, 단지 한 후보의 당선과 낙선이 아니라, 해방 이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선악의 전장이 되었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같은 결론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12월 대선은 노무현과 이회창의 대결이다. 동시에 <조선일보>가 이끄는 특권동맹의 앙시앵 레짐의 해체 여부가 걸린 대결이다."(같은 책, 262쪽) 여기서 "앙시엥 레짐의 해체 여부"라는 표현에 유의하자. 이것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당시 유시민은 "이번에도 낙선하면 이회창은 사실상 정계를 떠나야 할 것"이며, "이회창이 없는 한나라당이 하나의 정당으로서 정체성과 통일성을 유지할 가능성은 없다"(같은 곳)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진행된 역사는 그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5.
▲ <운명이다>(노무현·유시민 지음, 노무현재단 엮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
당연히 개혁국민정당의 당원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여기서 잠시 앞서 인용한 <운명이다>의 한 문장을 다시 살펴보자. 유시민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노무현은 "또 경선을 해야 할지 모르니 다시 사람을 모아 보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유시민은 "7월 하순부터 노사모와 민주당 국민경선 자원봉사자들을 다시 규합해 '국민후보 지키기 서명운동'을 벌였"으며, 그 결과 "이 운동은 개혁국민정당이라는 인터넷정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개혁국민정당은 애초부터 노무현을 지지하기 위한 외곽조직일 뿐이며,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소속 정당에서 탈당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돕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정작 유시민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2002년 개혁국민정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데 참여해 당 대표로 선출되었고, 이 정당의 공천을 받고 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 지음, 돌베개 펴냄), 318쪽) 그에 따르면 개혁국민정당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당원 중심의 참여민주주의 정당을 만들어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정책정당을 완성하는 것"(같은 곳)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이상을 추구하고자 만든 정당을 1년여 만에 없애버리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당원들의 반발이 거세게 몰아쳤다.
유시민은 그 열린우리당마저도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변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이 통합민주당을 만들고, 그 통합민주당이 그냥 민주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2009년이 되고 나서야 "개혁당의 정신을 열린우리당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시도는 실패했으며, 그 원인이 오판에 있든 능력 부족에 있든,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같은 곳)며 때늦은 사과의 말을 남겼다. 고양 덕양갑에서 개혁국민정당 깃발 아래 당원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에 힘입어 재보선 국회의원이 된지 약 6년여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은 일일이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지경이다. 노무현의 탈당에 분노한, 혹은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여당에서 야당이 된 민주당은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그리고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그것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고 나자, 대중들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미니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표를 몰아주었고, '잔류 민주당'은 의석 9개짜리 미니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동영의 이른바 '노인 발언'이 미친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지금 와서 따져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겠으나, 그런 커다란 실책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은 국회 과반수를 획득했다.
역사는 유시민이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예측한 것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앙시엥 레짐"을 타도했지만 쪼개진 것은 '그들'이 아니라 '이쪽'이었다. 유시민에게 '정당 브레이커'라는 오명을 안겨준 일련의 정치적 과정들을 통해, 2002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정치 세력 및 지지층은 쪼개지고 말았다.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 갈등은 과정은 마치 일본 전국 시대의 내전처럼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한편 그 반대편, '앙시앵 레짐'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며 두 차례에 걸쳐 대선을 승리로 가져갔다. 유시민 본인의 설명을 들어보자.
예를 들어 박근혜 의원은 강인하고 품격이 있다는 좋은 이미지와 아울러 좀 무서운 느낌도 든다. 그는 17대 총선에서 영남과 고령층 표심을 결속시켜, 차떼기 범죄가 드러나는 통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던 한나라당을 살려냈다. 불합리한 경선 규칙 때문에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지고서도 미소 띤 얼굴로 이명박 후보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 이런 것이 강인함과 품격이라는 이미지를 굳힌 행동이었다. (같은 책, 237쪽)
6.
▲ <청춘의 독서>(유시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후불제 민주주의>를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소매상'의 자세하고 친절한 소개로 보는 것도 물론 가능한 일이겠지만, 앞서 우리가 수없이 인용한 바와 같이, 그 책은 대통합민주신당에서 탈당해 국민참여당으로 나아가던 한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독해되기 어렵다. 헌법의 가치와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나오다가, 책이 끝나기 직전에 자신을 지지해줬던 개혁국민정당 당원들에 대한 사과의 말을 던지고, 에필로그인 "선과 선의 연대를 대하여"에서 이른바 '서울대 쁘락치 사건'을 해명하는 것 등은 이 책이 단순히 '지식'을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같은 해 나온 책인 <청춘의 독서>(유시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도 그렇다. 표면상으로는 젊은 시절 읽었던 책들을 다시 보고 서평을 써서 모은 것 같지만, 이 책의 핵심은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쓴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김연수 옮김, 민음사 펴냄)에 대한 서평, 그 중에서도 언론에 의해 부당하게 매도당하는 카탈리나 블룸에 노무현 혹은 유시민 본인을 대입하는 바로 그 과정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막혔다.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방식이 너무나도 '리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내가 현실에서 보고 경험했던, 그리고 오늘 현재에도 목격할 수 있는 언론의 행태와 정말로 똑같았다. <차이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째는 검찰청 조사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해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명국가의 형법이 금지하는 불법적인 '피의 사실 유포'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검사나 검찰 수사관 중에 누군가가 <차이퉁> 기자와 '정보 밀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국가기관과 언론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르는 이러한 불법행위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청춘의 독서>, 275쪽)
유시민이 이 책을 쓰고 있던 당시, 퇴임하여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유시민은, 2009년 당시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의 성공 이후 한창 유행하던 세대론에 편승하는 책을 쓰고 있었고, 그가 초고를 끝낸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 뒷산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유시민은 이미 완성된 원고에 이런 문장들을 덧붙이는 것으로 분노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카타리나 블룸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길이 없어서 기자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복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녀가 사람을 죽인 데 대해 후회의 감정을 느껴보려고 교회에도 갔지만 조금도 후회할 바를 찾지 못한 것은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임한 지 15개월밖에 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은 카타리나 블룸과 똑같은 상황에 봉착하자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했다. 검찰 조사실에서 오간 대화가 교묘하게 왜곡된 형태로 특정 신문을 통해 중계되듯 보도되고, 문제가 된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사항들이 흘러나와 '피의자'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가족과 친지, 친국 등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어간 그 모든 일들은, 35년 전 독일에서 나온 이 소설에서 뵐이 묘사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같은 책, 292쪽)
7.
▲ <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
유시민은 "국가의 본질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철학과 이론은 몇 가지 큰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국가란 무엇인가>, 23쪽)고 본다. 첫째는 홉스식의 국가주의, 둘째는 자유주의, 셋째는 마르크스주의, 넷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펼쳤던 목적론적 국가론이다. 국가주의는 국가가 무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국민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하는데 초점을 둔다. 자유주의는 시장에 맡겨놓을 경우 비효율이 발생하거나 아예 공급될 수도 없는 공공재를 제공하는 국가를 상정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자본의 지배 도구로 간주하기 때문에, 국가를 통해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유시민은 생각한다).
따라서 이 각각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의 지혜를 되살리는 것이다. 선을 실현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라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유시민은 외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정치학자, 정치철학자는 없다. 왜일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르네상스 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럽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도, 목적론적 철학에 입각한 국가론, 선을 실현하는 것을 국가의 목적이라고 보는 국가론을 누구도 계승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책, 204쪽)
유시민은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한다. "이렇게 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그의 국가론을 평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같은 책, 205쪽)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유시민이 국가주의/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한 방식의 조잡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늘날 누구도 목적론적 철학에 입각한 국가론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 마키아벨리와 그의 뒤를 따르는 근대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반박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국가는 신의 뜻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세속의 군주들 역시 교회의 지도를 받아, 그 도덕적 원리에 맞게 국가를 운영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가 특정한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와 상반되는 다른 선을 포기한다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출산과 성장'이라는 특정한 선을 국가가 추구하면, 낙태를 금지해야 하고, 따라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된다. 그러므로 근대국가는 최대한 중립적인 가치, 혹은 국민들이 개별적으로 자기 삶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보장하기 위한 가치를 추구한다.
고대철학에서 말하는 '선'을 추구하는 국가관을 현대에 재정립하는 것은 그러므로, 그리 큰 실익이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썼고, 자신이 공부한 국가론을 예의 그렇듯 잘 정돈된 문장으로 설명한 후, 막스 베버가 말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구분을 갑자기 들이밀며,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계기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연합정치에 초점을 맞추어 베버의 정치윤리학을 해석"(같은 책, 273쪽)하기 시작한다.
홉스가 어쩌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쩌고 하는 내용들은 사실 모두,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기나긴 서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유시민은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의 연합정치는, 막스 베버의 말에 기대면 신념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에 따른 정치행위"(같은 책, 279쪽)라고 주장한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근 300여 쪽을 달려왔고, 본인이 출마하고 떨어진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의 일인 양 이런 소리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의 선거연합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2010년 6월 지방선거였다. 자유주의 정당인 민주당과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야5당의 선거연합이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진 곳은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고양시였다. 여기서 자유주의-진보 연합은 단체장과 지방의원 선거 모두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강원도 등 불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진 곳에서도 광역단체장 선거를 이겼다. 광역단체장 후보를 중심으로 불완전하게 연합했던 서울시와 경기도에서는 민주당이 기초단체장과 지방의회를 휩쓸었지만 자유주의 정당의 광역단체장 후보는 둘 다 패배했다. (같은 곳)
그렇다. 책임윤리에 기반해 선거연합을 했음에도, 심상정이 경기도지사 후보를 사퇴하고 유시민을 지지한다고 선언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본인이 주도한 선거연합이 패배했는데, 마치 다른 나라에서 벌이진 일인 양 냉정하고 건조한 문체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지경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정작 '진보진영'에 대해서는 신념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에 기반해 선거연합을 하라고 부추기면서, 선거에서 패배한 자신이 질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적' 혹은 '그들'을 상정하고, '그들'이 아닌 최대한의 독자 혹은 지지자를 끌어들여, 자신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포섭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을 따름이다.
8.
▲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유시민 지음, 푸른나무 펴냄). ⓒ푸른나무 |
그렇다면 2002년 이전에 쓴 책들, 생계를 위해 국회의원 보좌관을 했을지언정 '정당 브레이커'는 아니었던 그 시절 쓴 책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칼럼집
지식소매상으로 살면서 역사 관련 책을 세 권 썼다. <광주민중항쟁: 다큐멘터리 1980>은 국회의 5·18 진상 규명 활동에 참가했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집필한 것이다. 사료를 발굴하는 데서부터 그것을 해석하고 책을 집필하는 작업까지 함께했으니, 이것은 내가 쓴 딱 하나뿐인 역사책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99퍼센트 이상, 누군가 쓴 좋은 역사책들을 발췌 요약한 것이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책이라고 하기 어려운 짝퉁이다.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는 우리 민족사의 여러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 랑케와 카, 아널드 토인비, 카를 마르크스 등 위대한 학자들의 역사 이론을 소개하고 해석한 책인데, 내 나름대로는 역사 이론서 흉내를 내본 것이었다. 이것 역시 짝퉁이다. (<청춘의 독서>, 310쪽)
유시민이 쓴 책 중 2002년 이후의 것들은, 지식의 요약정리가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 그 이전의 책들 중 가장 유명한 두 권은, 유시민 스스로의 표현을 빌면 "짝퉁"인데, 좀 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을 쓰자면 아마 '표절'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2002년 이후의 유시민,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던 그는 자신의 저작 목록 중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애써 거론하지 않고, 대신 본인이 '지식소매상'으로 살아왔던 세월을 1988년까지 연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정작 그때 쓴 책들은 본인 말마따나 "짝퉁"이고, 그는 훗날 나온 다른 책에서 그것을 슬쩍 인정할지언정, 정작 <거꾸로 읽는 세계사>나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에 대해 모종의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유시민의 지적 정직성의 문제를 정치적 정직성과 곧바로 연결 짓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타당하지 않다. 그 각각은 별개로 논의되어야 마땅할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반드시 던지고 넘어가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내놓은 그 사람, 정치의 투쟁에 휩쓸려 들어갔지만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지식소매상'은 과연 어디 있는가? 어쩌면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정치도매상 유시민'이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있는 페르소나가 아닐까?
9.
우리 편과 상대방을 나눌 수 있을만한 선을 긋고, 최대한의 '우리 편'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성을 상실한 유시민은,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그 얄미우리만치 영민한 사람이 아니다.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가 보자. 유시민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이 책을 힘겹게 썼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도 않고, 정치적 자기 검열 기제를 억누르느라 힘들었다고도 말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에는 '적'이 상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유시민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
유시민이 "개인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대중음악 소비자로서 안다"는 크라잉넛을 두고, 그는 "밴드 이름도 좀 그렇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호두가 운다는 말인가"(<어떻게 살 것인가>, 21쪽)라며 궁시렁거리고, "뜨기 전의 크라잉넛 멤버들은 시멘트벽에 래커로 마구 그린 그림이 있는 '드럭'이라는 지저분하 술집에 죽치고 살았다"(같은 책, 23쪽)는 고급 정보도 가르쳐주고, "나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나보다 훨씬 훌륭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며 공치사도 날리고, "크라잉넛 멤버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전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같은 책, 27쪽)며 인간극장도 찍는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도 또 크라잉넛이 나온다. "크라잉넛 멤버들에게 나는 삼촌뻘 되는 사람"(2같은 책, 29쪽)이라고 굳이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영문과에 가서 서양철학을 공부하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추억을 한참 곱씹다가, 결론은 다시 이렇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기쁘게 살고 싶다. 스무 살의 크라잉넛 멤버들처럼."(같은 책, 39쪽)
주제가 바뀌어도 크라잉넛은 여전하다. "알베르 카뮈가 쓴 유명한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를 차원 높은 '철학적 횡설수설'로 간주"하다가, 유시민은 "다시 크라잉넛 멤버들을 생각한다."(같은 책, 43쪽) "크라잉넛과 달리 나는 스무살이 되기 전에 벌써 현실에 굴복하고 순응할 준비를 했다"(같은 책, 63쪽)는 자책에서 유시민이 빨리 벗어나길, 이쯤 되면 진심으로 기원하게 된다.
단순히 말꼬리를 잡겠다는 뜻이 아니다. 유시민 스스로가, 그렇게 말 잘하는 유시민이, '한나라당'을 배제하고 나니 이렇게 중언부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딱히 더 할 말은 없는데 분량은 채워야겠고, 뭔가 '젊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아는 밴드가 크라잉넛 딱 하나니까 그 이름만 마르고 닳도록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전작들에는 '복심'이 있을지언정 어쨌건 책을 관통하는 의지와 시선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감은 사뭇 다르다. 저자는 자신의 텍스트와 함께 허물어져있고, 그 사실을 구태여 감추지도 않는다. '이명박 반대'를 빼고 나니 더 할 말도 주장할 것도 없어서 흐지부지되어버린 2008년 이후의 그 모든 정치적 상황들이, 왜 결국 '힐링'으로 향하게 되었는지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000년대 초까지의 유시민은 이른바 '수구세력'을, 그 이후로는 '어려울 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뺨이나 때린 진보세력'들을, 가감 없이 말하건대 증오했다.
진보정의당이 몰락하고 유시민의 정치적 재기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또한 그 진보정의당 내에서도 주사파에게 내부 투쟁에서 밀려나면서, 우리가 알던 그 유시민 또한 사라졌거나, 예전 같지 않다. 반쯤 농담처럼 이야기하자면, 그는 심지어 이런 소리를 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다. "김연아는 마오보다 더 훌륭한 선수인가? 나는 그 둘이 똑같이 훌륭하지만 서로 다른 선수라고 본다. 김연아가 1등인 것은 채점 기준에 더 적합한 연기를 펼쳤기 때문일 뿐이다."(같은 책, 172쪽)
10.
2009년 5월 23일. 평소에는 잘 울리지 않던 휴대전화가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가입했고 저금통에 돈도 모아서 보냈던 그 조직들에서, 나는 이미 떠난 지 오래인데, 문자가 연거푸 왔다. 왕조시대에나 쓸법한 수사법에 평소 같으면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내용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유시민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
10여년의 세월을 무기삼아 '지식소매상' 유시민, 냉철한 이성으로 사태를 정리하는 유시민의 글을 다시 읽어보자. 그의 텍스트는 차분한 것 같지만 사실 선동적이다. 유시민의 글이 중언부언하지 않고 냉철하게 세상을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중세 신학자의 글이 그러하듯이, 이미 하나의 선험적 원리에 의해 그의 사유의 방향이 일방적으로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시민의 글은 노무현의 정치적 이익을 향하는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그 방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또 실제로 도움이 됐건 해가 됐건, 유시민이 쓰는 글과 내뱉는 말들은 그런 목적으로 세상에 등장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유시민은 스스로 "짝퉁"이라고 말한 그 텍스트를 쓰는 일에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고, 지금도 그 책들은 그의 이름을 달고 시장에서 유통된다. 요컨대 유시민은 저작권 혹은 표기 출처 문제에 대해, 적어도 본인이 그것을 어기는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관대하다.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얻게 될 정보 혹은 감동에 더 큰 관심이 있다고 좋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자서전을 1인칭으로 저술하는 기상천외한 기획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유시민이라는 '영매'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운명이다>는 분명히 '자서전'인데, 화자인 '나'가 뒷산에서 뛰어내리기 직전까지의 상황이 기술되어 있는 이상한 글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생각한 내용까지 자서전에 쓰고 죽으려면 죽기 직전까지, 혹은 죽은 다음 유령이 되어 자서전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을 쓴 유시민이나, 이것을 '가슴'으로 읽은 독자들에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아무튼 그래서 <운명이다>는 노무현의 자서전이지만, 동시에 유시민이 쓴 또 하나의 '창작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이 텍스트의 모든 내용이 노무현의 육성일 것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짝퉁'을 만드는 일에 너그러운 유시민의 흔적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이다. 가령 <운명이다>의 80쪽에서 '나'는 요트 타기가 "거센 파도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모래알 씹히는 불어 터진 라면을 먹어 가면서 하는, 거친 남자들의 운동이었다"라고 회고한다. 그런데 이 표현은 노무현 본인의 것도, 유시민의 창작도 아니다. 그것은 노무현을 지지하던 어느 요트 국가대표팀 지도자의 편지에서 나온 것이다.
노무현 후보가 지난 80년도에 요트를 탔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바다가 좋고 요트가 좋아서 바람 부는 광안리 바닷가에서 불어터지고 모래까지 들어간 라면을 먹어가며 행복해했던 그런 것이었습니다.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191쪽)
사정이 이렇기에, 나는 궁금해진다. <운명이다>에 등장하는 고 김선일 씨에 대한 짤막한 언급은 노무현의 것일까 아니면 유시민의 것일까. 나를 포함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대의 청년이 머나먼 나라에서 두건을 쓰고 울부짖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야멸차게 내뱉던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란 무엇인가>에도 <청춘의 독서>에도 <후불제 민주주의>에도, 청춘을 다 누리지도 못한 채 국가에 의해 버림받아 죽은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11.
우리는 모두 노무현을 증오하거나 사랑했다. 노무현 현상 앞에 중립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노무현을 사랑하거나 증오했고, 그만큼 87년 민주화 이후 고착되어가던 한국 정치가 변화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유시민이 몇몇 사람들과 주도한 민주당 내 정치실험 말고도, 진보정당이 원내 10석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새로운 정치 질서의 도래를 바라는 염원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 폭풍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이 바로 '지식소매상'이며 동시에 '정치도매상'이었던 유시민이다. 그는 지식을 정리하고 담아서 글을 쓸 때도 노무현을, 혹은 노무현을 보위하는 자기 자신을 위해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었다. 유시민은 노무현을 사랑했고, 2002년 이후 그가 쓴 모든 글은 그 사랑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방식대로만 노무현을 기억하고 애도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의 사후 자서전이 아니라 평전을 필요로 하고, 그가 만들어놓은 세상의 음과 양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읽기 좋고 재미있고 가슴이 뛰는 글이 아니라, 정직하게 쓰인 글, 제대로 출처가 밝혀진 글,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나 청소년이 도서관에서 직접 찾아 읽을 수 있는 사다리가 되어줄 그런 양서를 필요로 한다. 인터넷을 통한 직접민주주의의 이념도 좋겠지만, 지역구를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그런 풀뿌리 정치인, 국회의원도 필요할 것이다. 논객시대를 가장 논객답지 않게, 그러면서도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유시민의 책에서 우리가 배울 게 있다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 그가 싸우지 않은 것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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