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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낳은 미녀를 총애한 그 왕의 속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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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낳은 미녀를 총애한 그 왕의 속내는?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알고도 가는 길 ②

☞전회 바로 가기 : 알고도 가는 길 ①스승에게 죽음 명한 숙종, 그 가슴 아픈 사연은?

숙종, 아들을 보다

숙종 14년(1688년) 10월 27일, 왕자가 태어났다. 조선의 19대 왕, 숙종. 현종 2년(1661년)에 태어난 숙종은 29살이 다 되도록 아들이 없었다. 15세 전후에 혼인하였던 당시로서는 심각한 사태였다. 숙종은 인경왕후(仁敬王后) 김 씨를 1680년에 잃었다.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 씨에게도 후사가 없었다.

후사가 없다는 것은 왕정(王政)에서는 체제가 불안해지는 사태였다. 마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데, 후임 대통령을 뽑지 못한 근대 국가와 마찬가지 형국인 셈이다. 그러므로 숙종이 몇 차례 병을 앓았을 때 조정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엿보였던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라 왕정의 근원적인 불안감이었다. 국가가 애당초 없었으면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 속에 살고 있는 동안 그 시스템이 정상 가동되어야 삶의 리듬이 깨지지 않을 터였다.

그 불안감은 누구보다도 숙종 자신이 가장 컸을 것이다. 후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몸으로 생물학적 재생산을 해야 하는 효(孝)의 일차적인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국왕은 조종조(祖宗朝)라고 부르는 종묘와, 백성들 삶을 지켜내는 토대인 사직을 짊어지고 있는 존재였다. 바로 이때 후궁인 장 씨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 종묘와 사직. 국왕에게 후사가 없다는 것은 왕위 계승으로 표현되는 나라의 명맥과, 땅과 곡식으로 표현되는 백성의 안위, 이 둘을 지키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왕정(王政)을 모른다

내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분들과는 달리 나는 왕정(王政)에서 진보하여 민주정(民主政)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듯, 민주정이 왕정보다 더 나은 정치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 때문에 나를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역사 발전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유보적이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생활양식과 규범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역사가 계기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고려보다 조선이 더 나은 사회라든가, 조선보다 현대가 더 나은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귀족정이든, 그것은 어떤 사회의 인구, 경제력 같은 규모, 기술이나 문화 같은 시스템과 규범의 결정 요소, 그 사회가 당면한 과제 등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정치 체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례를 들자면, 현대 사회에서 국가 대표를 뽑을 때는 보통선거를 정치 제도로 선택할 수 있지만, 이 보통 선거가 동네 이장을 뽑거나 대학 총장을 뽑는 데 과연 효율적이거나 고상한 방식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동네 이장 뽑다가 동네가 둘로 갈라진다든가, 대학 총장 뽑느라 강남 룸살롱 매상만 올려주었다는 사실은 단지 어떤 제도가 정착하기 위한 과도기로 설명되기에는 폐해가 심각하고 불행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만, 왕정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왕정에 대한 학술적 논의라고 해봐야 그다지 학술적으로 보이지 않는 왕권-신권이라는 1차원의 논리가 전부이다. 하긴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의 정치 제도도 제대로 배우지 않는데, 지나간 시대의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여기겠는가.

어떤 정부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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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민주주의>(알렉시스 드 토크빌 지음, 임효선·박지동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근대 민주주의에 대해 자상하게 알려준 알레시스 드 토크빌(1805~1859년)이라는 학자가 있다. 지난 몇 달간 전주 독서 모임에서 그가 지은 <미국의 민주주의>(임효선·박지동 옮김, 한길사 펴냄)를 읽었다. 먼저 민주 정치의 장점과 단점을 통찰한 토크빌의 말을 살펴보자.

우선 우리는 사회와 정부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간 심성을 어느 정도 고양시켜 관대한 감정으로 이 세상의 사물을 바라보도록 가르치고, 세속적인 이익을 그저 경멸적으로 보도록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강한 신념을 만들고 일깨워 영예롭게 헌신하는 정신을 보존하기를 당신은 바라는가? 습관을 순화하고 생활 태도를 아름답게 만들며 예술을 함양하는 것, 그리고 시나 아름다움, 영광 들을 애호하는 풍조를 증진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인가? 모든 다른 나라들에게 고압적으로 행동하며 또한 결과야 어떤 것이 되건 역사에 영원불명의 명성을 남기게 될 고상한 과업들을 치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 국민을 만들어내려고 하는가? 만일 이런 일을 사회가 지향할 주요한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민주 정치는 피해야 한다. 그 이유는 민주 정치는 분명하게 그 목표로 당신을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도덕적 활동을 안락한 사물의 생산과 전반적 복리의 증진으로 돌리는 것을 하나의 방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천재성보다는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인간에게 더 유익하다면, 영웅의 윤리가 아니라 평화의 습관을 증진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또한 범죄보다는 폐단 쪽을 택하고 범법 행위가 같은 비율로 줄어들 경우 고귀한 행동이 줄어들어도 만족한다면, 찬란한 사회에 살기보다는 당신 주변이 번영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간단히 말해서 정부의 주요 목표가 국가 전체에 가능한 최대의 권력과 영광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에게 최대의 안락을 확보해주고 가능한 한 가난을 피하게 하는 것이라면, 위에 말한 것들이 당신이 바라는 바라면 사람들의 처지를 평등하게 만들고 민주제도를 수립해야 한다. (<미국의 민주주의>, 328~329쪽)


토크빌이 귀족 출신이고 프랑스가 당시 왕정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기보다, 왕정과 민주정의 상대적 가치와 지향을 언급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위의 논의는 그 자체로 두 제도의 비전 차이를 잘 정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우리가 논의할 조선의 왕정과는 작은 차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심성의 고양, 아름다움, 역사에 남는 명예, 지적, 도덕적 활동 등을 조선이 추구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나라에 대한 고압적 태도, 영웅의 윤리나 찬란한 사회, 천재성의 동경은 조선 사회와 거리가 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같은 왕정이면서도 실제에서 조선과 프랑스는 이렇게 차이가 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토크빌이 1830년부터 약 3년간 미국을 여행한 뒤 집필에 들어가 1835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런 까닭에 토크빌은 이후 유럽을 풍미하면서 전 세계에 퍼진 진보, 문명 담론의 오염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토크빌은 위의 말에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진보의 목적론이 아니라, 자연 선택적인 진화론에 가까운 발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갔다면, 그리고 인간의 능력보다 우세한 어떤 힘이 우리들이 바라는 바와는 관계없이 그들 두 가지 정부 형태 가운데 어느 쪽으로 이미 우리를 이끌어간다면, 우리들에게 할당되는 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의 좋고 나쁜 경향을 모두 밝혀내서 좋은 경향을 북돋우고 나쁜 경향을 최대한으로 억제해야 한다."

멀고도 가까운 왕정

인류 역사에서 볼 때, 왕정은 민주정보다 훨씬 연륜이 길고 깊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정은 매우 강력한 물질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인프라이다. 왕정에서 종종 국왕이 부모로 표현되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정치적 사기(詐欺)가 아니다. 민주정의 토대를 사회 계약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부르주아지의 성장이라는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듯이. 이 두 조건, 즉 역사적 경험과 가족이라는 물적 토대가 왕정을 사라지지 않게 한다. 때로 이 두 조건은 상호 작용한다.

실제로 민주정과 함께 왕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러하고, 허울이든 실제든 세계 곳곳에서 왕정은 유지되고 있다. 정치권력의 세습이라는 왕정의 요소는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똑똑해야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조지 워커 부시는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없이는 즉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라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선거라는 외피 속에서 정치권력을 세습하는 양상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치 분야 외에, 경제, 문화 영역에서는 어떠한가? 요즘 아들, 딸들을 데리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많다. 나는 거기서도 왕정의 조짐을 본다.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다. 토크빌이 말했듯이, 왕정은 하나의 조건, 우리가 장점과 단점을 판단하고 대처할 조건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도 왕정, 또는 왕정의 요소가 곳곳에 존재하지만, 조선의 왕정 역시 생각보다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가만 보면 조선의 정부, 즉 조정(朝廷)에서 세습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는 국왕 하나였다. 나머지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무슨 관직을 했느냐에 상관없이 과거 시험을 붙어야만 관직에 나올 수 있었다.

요즘의 국가 유공자처럼 음직(蔭職)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외적인 경우였고, 양반이라도 몇 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서서히 평민과 같아졌다. 다른 한편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는 가문이나, 사회에 공이 많은 집안은 존경을 받기도 했고, 때에 따라서는 왕가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후궁 장 씨의 집안

비록 후궁의 소생이지만 숙종이 아들을 보았다는 것은 무척 안도할 만한 경사였다. 왕정이라는 정치 체제(Regime)의 유지가 보장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나이가 많았던 숙종으로서는 뭐라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장 씨에게든 새로 얻은 아들에게든.

그런데 경종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사연은 태어난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년) 1월 11일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가 죽음을 당한 김수항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본관이 인동(仁同)인 장 씨는 효종 10년(1659년) 생으로, 이듬해 태어난 숙종보다 한 살 위였다. 대대로 역관(譯官)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 장응인(張應仁, 1594~1660년) 이래 20여 명의 역관이 나왔고, 그 중 역과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이 7명이나 되었다. 아버지는 장경(張烱)이다.

아버지 장경의 사촌 형인 역관 장현(張炫, 1613~1695년)에 주목해보자. 그는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서 6년간 머물렀다. 귀국해서는 40년 동안 30번 이상 북경에 다녀왔던 베테랑 역관으로,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 등을 따라가 사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장현은 인평대군의 아들 복창군, 복선군이 사신으로 갈 때도, 남인의 우두머리였던 허적(許積, 1610~1680년)이 사신으로 갈 때도 수행하였다.

장현은 김수항의 할아버지인 김상헌(金尙憲)이 대사헌(요즘의 감사원장)이었을 때 집을 규격에 벗어나게 지어 투옥된 적이 있었으니, 은연 중 김수항과 후궁 장 씨 사이에 묵은 감정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아무튼 집을 과도하게 지어 투옥될 정도로 부유했고, 아직 그다지 세력을 떨치지 못할 때인데도 장현에게 청탁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 장희빈의 아버지 장경신도비 : 불광동 은혜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것을 1974년 고양시 고봉산 자락으로 이장하였다. 인현왕후를 내쫓고 장 씨가 왕비가 되었던 1691년(숙종 17년)에 세웠는데, 민암(閔黯)이 글을 짓고, 오시복(吳始復)이 글씨를 썼다. ⓒ오항녕

돌아온 후궁 장 씨

장 씨의 생모 윤 씨는 조사석(趙師錫)의 처갓집 종이었다. 젊었을 때 조사석과 어울렸는데, 장 씨 집에 시집간 뒤에도 조사석의 집에 오갔다고 한다. 그래서 장 씨는 조사석의 후원, 인조 후궁 조귀인의 손자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을 업고 궁녀로 들어왔다.

장 씨가 22세 되던 숙종 6년(1680년)에 왕비 인경왕후 김 씨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떴고, 이후 비로소 장 씨가 숙종과 가까워졌다. 숙종 7년에 숙종은 계비 인현왕후 민 씨를 맞았는데, 민 씨가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장 씨를 궁중에 들여오게 하자고 건의한 것으로 미루어, 이 무렵 궁궐 밖으로 쫓겨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신년(1680년)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왕후(明聖王后)가 곧 명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는데,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의 아내 신 씨가 좋은 기회로 여겨 자주 그 집에 불러들여 보살펴 주었다. 신유년(1681년)에 내전(內殿 인현왕후)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자 그 일을 듣고서 조용히 명성왕후에 아뢰기를,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宮人)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명성왕후가 말하기를,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는데, 만약 그의 꼬임을 받게 되면 말할 수 없이 나라의 화란이 될 것이니, 내전은 나중에라도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내전이 말하기를,

"어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헤아려 나라의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하였으나, 명성왕후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명성왕후가 승하한 후에 내전이 다시 임금을 위해 그 일을 말하였고, 자의전(慈懿殿 인조의 계비 조 씨)도 또한 힘써 그 일을 권하니, 임금이 곧 불러들이라고 명하여 총애하였다. (<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0일)


그러니까 어머니가 내쫓은 여자를 돌아가시고 나자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장 씨는 미모에 질투도 있고 좀 드센 편이었나 보다. 위의 기록에 이어, 사관(史官)은 이렇게 적었다.

"장 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장 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 들어와 (…)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영빈 김 씨의 입궐

그렇다고 15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던 인현왕후가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명성왕후가 해준 경계도 있고, 직접 장 씨의 됨됨이를 경험했던 그는 장 씨의 환란을 막고자 숙종 12년(1686년) 김수증(金壽增)의 손녀인 김 씨를 숙종의 후궁으로 들여 숙의(淑儀)로 삼는다. 이가 영빈(寧嬪) 김 씨이다.

그러나 김 씨는 숙종과 별로 가깝지 못했고, 오히려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함께 숙종에게 내쫓겼다. 김 씨가 했던 큰 역할은 환란 없이 뒤에 경종과 영조를 왕위에 올린 일이다. 김 씨는 후일 영조(英祖)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을 양자로 들였던 것이다.

이건 나중 일이고, 당시 김수항은 김 씨의 후궁 간택을 반대했다. 김 씨의 할아버지 김수증은 곧 김수항의 맏형이다. 김 씨의 아버지는 김창국(金昌國)으로, 김수항의 친조카이니, 김수항은 김 씨의 작은할아버지가 되는데 그가 김 씨의 후궁 간택을 반대한 이유를 그가 쓴 편지에서 알 수 있다.

편지를 보고 위로가 되었다. 내 병세는 밤새 한결같았지만, 간택(揀擇)이 정말 청양(靑陽, 이때 김창국이 청양현감이었다) 김창국(金昌國) 집안으로 정해졌다고 오늘 아침 대궐에서 통보가 있었으니 이곳의 놀라움을 어찌 다 말하겠느냐. 오늘의 이 거조는 이미 종사를 위한 대계이니, 비록 다른 집안의 여자라도 그 병이 있다는 것을 알면 대신의 신분으로 아무 말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물며 이 아이는 숙환(宿患) 외에도 배앓이와 혈병(血病)이 지극히 가볍지 않다.

지금 만일 먼저 그 실상을 진달하지 않는다면 향후 무거운 견책을 받더라도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설령 끝내 주상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도리상 이럴 수는 없기 때문에 병든 몸을 싣고 대궐에 가서 힘껏 아뢸 계획이지만, 분명 몸이 더 상하게 될 것이므로 이래저래 걱정이고 한탄이구나. 나머지는 이만 줄인다. (아들 창집에게 보내는 답장[答集兒] 병인년(1686년, 숙종12년))


큰아들 창집에게 말리라고 편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김수항은 대궐로 들어가 숙종에게 입대하여 김 씨의 간택을 반대했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숙종 실록> 12년 3월 23일)

아들 김창협의 바른 말

숙종의 장 씨에 대한 총애는 갈수록 깊어갔다. 숙종 12년 9월, 숙종은 장 씨를 위해 몰래 별당을 지어주었다. 당연히 사헌부 장령 이국화 등이 중지할 것을 청했지만, 숙종은 잘못 전해들은 것이라고 둘러대며 공사를 중지하지 않았다. 이어 12월에는 장 씨를 종4품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궁녀로 들어와 왕자나 공주를 낳지도 않은 사람이 숙원이 되는 것은 특별한 조치였다. 또 며칠 뒤 장 씨의 궁방인 숙원방(淑媛房)에 사패(賜牌, 임금이 특별히 내려줌) 노비 100명을 주었다.

사헌부의 반대 이후, 홍문관 관원들의 면담에서도 반대 의견이 쏟아졌다. 사간원도 동참했다. 그러나 숙종은 상소를 올린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를 갈아치웠다. 승정원은 한성우가 사심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며 구원하러 나섰다. 숙종도 뭔가 말은 해야 했다.

역사 기록을 보니, 여자를 총애함으로써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실정(失政)하게 된 자가 많았으므로 내가 상시 슬퍼하고 한탄하였다. 하물며 나는 종묘(宗廟)의 부탁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가볍게 행동하겠는가? (<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1일)

그런데 숙종의 행동이나 조치는 그의 말과 달랐다. 후궁 장 씨에 대한 숙종의 과도한 집착을 둘러싸고 신하들과 숙종 사이에 긴장이 흐르기 시작한 초엽, 국립대학교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김창협(金昌協)의 논계가 들어갔다.

어제 사헌부의 계(啓)에 대해 전하께서는 전해들은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근래에 진실로 별당을 짓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목(大木)을 구하는 공사 담당 관리가 빈번히 민간에 출입하고 있으니 대간의 아뢴 대로, '장인(匠人)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운반하는 데 반드시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한다'는 말이 과연 거짓말이 아닙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임금이 장 씨를 위하여 별당을 지으면서 외부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다" 하였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하교하시고는 안으로는 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신하의 말을 막아 버리는 변명을 하시니,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0일)

김창협은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다. '장 씨를 위해 별당을 짓는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안으로는 별당을 짓고, 밖으로는 신하들의 말을 막는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다' 그의 발언은 숙종을 흔들었다. 숙종은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지 못했다. 숙종은 흔들렸고, 화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터졌다.

처음 김창협의 말을 읽었을 때, 잠시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그냥 지나가지 않겠구나……." 이런 말을 당시 표현으로 위언(危言)이라고 한다. <논어>에, 공자가 "나라에 도리나 상식이 통하면 말과 행실을 높게 하고, 나라에 도리가 도리나 상식이 없을 때에는 행실은 높게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하여야 한다[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고 한 데서 나왔다.

이런 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지금 범범한 나도 아는데, 김창협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한다. 알고도 하는 사람들. 조선 사람들에게서 뭔가 건질 것이 있다면, 이런 삶의 태도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조선 시대의 기록을 읽다보면 상소나 편지 등에서, 정중한 듯하면서도, 너무 정확하여 이렇게 심하게 말하고도 성할 수 있으려나, 싶은 때가 자주 있다. 성한 경우도 있고, 성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대개 전후 상황을 보면 짐작이 가는데, 숙종의 처사, 처신에 대한 김창협의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기에 위험했다. 이 일이 있고 이듬해, 실록에 사관이 남긴 말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金壽恒)이 죄를 입게 된 것이 (…) 혹자는 그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이 일찍이 한 차례 상소를 올려 후궁(後宮)을 지적하여 배척하면서 한 말이 매우 절박하였기에,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생겨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하게 된 것이라고도 몰래 말하는 자가 많았다. (<숙종 실록> 권18 13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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