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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이 죽인 남자,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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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이 죽인 남자, 부활한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프롤로그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의 저자, 전주대학교의 오항녕 교수가 조선 시대 한복판을 산 이들에 관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응답하라, 1689!-시대를 업고 산 대제학 이야기'는 효종, 현종, 숙종 연간에 살았던 학자이자 관료인 문곡 김수항(1629~1689)을 통해 그 시대의 현재적 의미를 밝혀줄 것입니다. <편집자>

1. 재미

재미라는 것이 '낯설면서도 내 삶과 닿아 있어서 느끼는 감동'이라고 한다면 그런 재미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1. 문명의 근거

페테르 프로이켄의 <에스키모의 책>에 나오는 그린란드 이누이트 족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프로이켄이 어느 날 사냥을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허기진 몸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해마를 잡은 사냥꾼이 큰 고기 한 덩이를 자기 앞에 내려놓았고, 그는 사냥꾼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오히려 화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여기 사는 우리 모두는 인간이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듣길 좋아하지 않아요. 오늘 내가 얻은 것을 내일 당신이 얻을 수 있어요. 여기 속담에 선물이 노예를 만들고 채찍이 개를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냥꾼의 마지막 말은 인류학의 고전으로 통합니다. 사냥꾼은 경제적 계산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인간다운 존재는 그런 계산을 거부하는 존재라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계산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존재하고 주장합니다. 그런 식으로 계산하고 기억하다 보면 "권력과 권력을 비교하고 측정하고 계산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빚을 통해 서로를 노예나 개로 전락시키는 세상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 진정한 물음은 우리가 어떤 성향을 인간의 바탕으로 여기고 문명의 근거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채 : 그 첫 5000년>(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펴냄), 142쪽)

1. 역사학의 무덤

인문학 아카데미는 많은 데가 대개 철학 중심이고 역사학은 개설된 데가 거의 없으며, 있어도 한두 강좌 구색을 맞추는 정도입니다. 역사학자들의 책임 운운하는 상투적인 반성 말고-상투적이지만 진실!- 다른 각도에서 짚어볼까요?

가끔 우리 현대인들이 우스울 때가 있습니다. 마치 현대 사회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발전한 시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진보라고 할까요? 저는 그다지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근대 자본주의는 가능한 한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어서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90퍼센트 이상으로 만들어놓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의료, 과학, 생산력의 발전을 높이 사더라도, 또 신분제의 폐지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위험하고 불평등하며 불안정한 삶이 곳곳에서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고, 앞으로 나아지기보다는 악화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한 듯합니다. 구조 조정은 어쩌다 있는 비상 조치가 아니라 상시적인 노동 유연화의 방책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근대 사회는 신분 대신 계급을 창출했고, 평등을 외치면서 불평등도 심화했으며, 예방과 치료의 한편으로 무제한적인 폭력을 준비했고, 민주주의와 함께 전체주의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이런 계약과 거래, 시장의 언어와 생활양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살기 좋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매우 허접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삶의 양식이 다른 사회, 즉 다른 경제 구조와 가치,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를 서로 비교한다는 것이 난센스입니다. 어느 한쪽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요. 간간히 과장도 하고 거짓말도 보태가면서 말입니다. 희한한 것은 근대 계몽주의(자본주의)를 제외하고 어느 시대에도 지나간 시대에 대해 이토록 오만한 이데올로그들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있지도 않은 초야권(初夜權)도 만들어내고, 이전 시대를 '암흑 시대'라고 과감하게 딱지 붙이는 방식 말입니다.

우리는 자유, 평등, 민주의 유토피아로 가고 있다는 진보주의 이데올로기를 근대 역사학이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학의 무덤이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과거보다 지금이 진보한 사회라는데 어떤 바보가 '삶의 성찰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겠습니까? 역사학이 근대로 오는 여정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또는 호고(好古) 취미에 머물렀던 데는 이런 배경을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 좀 시간이 지나 살기가 더 힘들고 망할 때가 되어야겠구나, 그때가 되어 '진보, 발전'의 허구성이 드러나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삶을 생각하겠구나, 그렇게 되면 지금의 삶에 대한 허위의식이 걷히겠지, 그러면 과거든 어디든 다른 삶의 경험을 비로소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려하겠지……. 모던 역사학은 숙명적으로 모던 사회가 몰락하면서 극복될 듯합니다.

1. 조선 한복판

뭔가 다른 삶의 양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될 현시점에서, 뭔가 대안의 실마리를 찾자는 생각으로 이 시대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과거는 절대 그대로 반복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안을 조선에서만 찾아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이번 연재는 조선, 대략 인조 후반~효종~현종~숙종 전반의 시대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시기, 그동안 학계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대였습니다. 식민사관과 근대를 지상의 목표로 보는 근대주의 역사학이 뒤엉키면서, 상품 화폐 경제를 찾고, 자본주의 맹아를 찾았습니다. 탈(脫)주자(朱子)-수(守)주자로 학파(또는 정파)를 보수-진보로 나누는가 하면, 그 사이로 다시 가문 숭배가 학문으로 포장한 채 실제 과거보다도 더 당쟁을 비극적으로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페이지마다 오류와 왜곡이 발견되어 도저히 비판조차도 할 수 없는 책이 대중서라는 미명하에 버젓이 역사서 행세를 하면서 콩쥐-팥쥐 논리로 증오와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 시대상은 일제 시대 식민사학자들의 연구보다 더 뒤틀렸고, 그 뒤틀린 거울 탓에 그 거울을 보는 사람들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곡을 바로잡는 연구도 꾸준히 축적되었습니다. 정책, 사상, 사회, 인물 등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광해군대의 혼란은 반정을 통해 가까스로 수습했으나, 그 여파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후유증에 민심도 경제도 힘들었습니다. 정치적 격동으로 민생이 불안해지기도 했고, 가뭄,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송(禮訟)으로 사화(士禍)가 일어났고, 또 당파 간의 당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효종, 현종, 숙종 연간은 대동법이 시행되고, 양반에게도 군역을 지우는 균역(均役)이 논의되었으며, 노비도 어머니가 양인이면 양인이 되게 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회, 경제의 영역에서 공정하고 평등한 삶을 지향하던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어 조야(朝野)의 오랜 숙원이 풀렸고, 대외 관계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대략 인목대비(1584~1632년)부터 희빈 장씨(1659~1701년)까지의 시대라고 보면 됩니다. 인목대비는 딱히 떠오르는 배우가 없는데, 장희빈을 연기했던 배우 김혜수 씨의 매력이 생각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인목대비의 고난은 구조적으로 긴 영향을 미쳤고, 장희빈의 등장은 또한 아까운 인물들이 희생되고 사라져간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역사를 심각하면서도 의연히 흘려보내기도 했던 사람들, 더 힘들면 싸우기도 했던 사람들, 어지간하면 견디기도 했던 사람들, 살 만하면 살 만한 대로 즐겼던 사람들, 그 속에서 정감과 격조를 잃지 않던 사람들, 그렇게 인생과 세상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1. 이 사람

이제 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년(인조7년)~1689년(숙종15년))을 통해서 보려고 했는지 대답할 차례입니다. 먼저 시 일부를 보겠습니다. 문곡이 태어난 지 스무하루 만에 죽은 아이를 추모하며 지은 시입니다.

하찮은 풀, 서리와 눈에 시들더라도 寸草萎霜雪
봄 오면 다시 피어나는 법이거늘 春來還復榮
천심은 어찌 그리 심히 박하여 天心何厚薄
우리 아이는 되살리지 아니하는가 不敎兒再生

건너 이웃집 애 우는 소리 듣고 隔隣聽呱呱
몇 번인가 네가 우나 착각했나니 幾度錯疑汝
지난해 너와 같은 때 태어난 아이 去歲同時兒
어느덧 이제 벌써 말을 배운단다 如今已學語

눈물 참으려 눈길을 떨구었건만 忍淚已垂睫
잊으려 해도 다시금 보고 싶다 欲忘還復思
소리 삼키고 어둔 벽 향했으니 呑聲向暗壁
혹여 네 어미 알까 두려웠노라 恐被汝孃知

아내가 첫 애를 낳았을 때, 저는 종종 연구소에서 자고 들어왔습니다. 인천 집과 서울 연구소를 출퇴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왕복 네 시간이었으므로, 연구소에서 자는 일은 그리 타박거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전 이틀 또는 사흘에 한 번 꼴로 집에서 자는 셈이었지요. 음, 아내도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아침에 아이 챙겨 장모님께 맡기고 바쁘게 출근을 서둘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입니다. 알다시피 갓난애들은 밤에 자다 자주 깨게 마련입니다. 그날따라 아내는 피곤했는지 애가 우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내를 부르다가 깨지 않자, 애를 툭 쳤습니다. 진짜 '툭' 쳤는데, 이놈이 죽겠다고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순간 아내가 깨어 일어나 애를 달래기 시작했고, 난 모른 척하고 다시 꿈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놈은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놈이 큰 뒤에도 종종 저를 경계하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곡이 시를 지어 애도한 아이의 이름은 칠룡(七龍)입니다. 칠(七)은 아들의 차례이고 용(龍)은 꿈에서 용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우는 아이를 아내에게 떠넘겼던 저의 행태를 돌아보며, 핏덩이를 보낸 슬픔마저 아내가 깰까 울음소리를 참던 모습에서 문곡이라는 인간에게 끌렸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곡의 배려에 견주어 저의 행동이 무척 천했다고 생각되어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그는 효종, 현종, 숙종 연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장원급제를 거쳐 대제학에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그것도 마흔 살에 대제학에 올랐습니다. 조선은 학자-관료 사회라서 대제학을 문형(文衡, 학문의 기준)이라고 불렀고, 영의정보다 대제학을 지낸 것이 더 영광이었습니다. 그제 국무총리가 되려다 낙마한 인사가 생각납니다. 거기에 비교하기에는 문곡이 너무도 고상합니다. 여기서 '고상하다'는 평은 당시 사관(史官)의 말이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누릴 만큼 누리고 산 사람처럼 보입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면서, 박세채(朴世采)와 성균관 동기이고, 민정중(閔鼎重, 인현왕후의 작은아버지), 윤휴(尹鑴), 이현일(李玄逸)과 동시대 사람이고, 송시열(宋時烈)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김창집(金昌集)을 비롯한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육창(六昌)'이라고 불렸는데 정치, 문학, 예술 쪽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문곡 자신은 장희빈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화(士禍)로 인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떴으며, 후일 그의 아들, 손자 역시 사화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남긴 시 뿐 아니라 편지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스승에게, 친척에게, 아내에게 준 글입니다. 동료들과 벌인 논쟁도 있고 국왕에게 올린 기개에 찬 상소도 있으며, 죽음이 친구와 가족, 스승을 갈라놓을 때 아픈 마음으로 쓴 비문도 있습니다. 그 흔적을 통해, 문곡 김수항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의 한복판에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박세채, 이현일 등의 연보를 만들면서, 이들의 눈을 통해서도 시대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1. 함께 역사가가 되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선생이 <임꺽정>(사계절 펴냄)을 쓸 때, 자신은 조선의 정화(精華)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임꺽정>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두고 의적(義賊) 이야기라거나, 봉건 사회의 신분 질서를 타파하려는 민중들의 삶이라거나, 하는 해석이 실제 <임꺽정>과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첫째, 임꺽정 일당은 털어서 가끔 남에게 주었을지 모르지만 대개 자기들이 먹고 마셨습니다. 둘째, 산채를 옮기면서 거기 살던 사람들 수십 명을 도륙내기도 했습니다. 셋째, 노골적인 힘에 우위를 둔 두령 중심 위계는 어떤 왕정보다 훨씬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이 사랑을 받은 것은 아마도 명종대의 시공간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듯합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守令)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宰相)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권력 있는 자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진실로 조정(朝廷)이 맑아 재산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고, 수령을 모두 옛날 한(漢)나라 때 훌륭한 관리였던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같은 사람으로 가려 차임한다면, 흉기를 들었던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엇하러 이토록 심하게 사람을 죽이겠는가.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추적하여 체포하려고만 한다면, 아마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도적들이 또 이어서 일어날 것이며, 결국 영영 다 잡지 못할 것이다." (<명종 실록> 권25, 14년 3월 27일)

사초(史草)에 남겨 실록에 실린 사관(史官)의 말입니다. 지당합니다. 정치를 잘못하면 도적도 의적이 됩니다. 그래서 잘못된 정치는 두 가지 죄를 집니다. 하나는 잘못된 정치 그 자체이고, 또 하나는 도적을 의적으로 만드는 판단의 혼란을 초래하는 잘못입니다.

아무래도 <임꺽정>을 보면, 양반이든 백정이든 조선 사람들이 보여주는 언어와 삶 자체가 생명력인 듯합니다. 실록은 사관의 입을 통해 비판 정신과 생명력의 근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벽초 선생이 말한 '조선의 정화'가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번에 연재를 하면서 벽초 선생처럼 '조선의 정화' 운운하는 말은 감히 꺼낼 수 없습니다. 다만 문곡이라는 인물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인 조선의 어떤 모습을 여행하듯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가끔 위에 나온 명종 때의 사관 코스프레를 하면서 말입니다.

어딘가 도달해야할 듯 조바심하는 '도로의 역사'보다는 싫든 좋든 어울려 산 '마당의 역사'가 실제 현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리 모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잘못은 은근히 덮고 싶습니다. 잘한 일은 드러내고 싶습니다. 화(和)의 역사를 서술해가고 싶습니다. 직필(直筆)은 그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필자의 글을 비판적으로 읽어달라는 것입니다. 귀명창이 있어야 소리명창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귀명창이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필자가 인용하는 사료가 미심쩍으면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 가면 검색어로 얼마든지 찾아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탐구가 될 것입니다. 필자뿐이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렇게 비평하다보면 어설픈 왜곡과 과장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색의 논리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나 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은 관점의 차이를 사료의 검증을 통해 조금씩 줄여가면서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진실을 넓혀가는 학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인문학이라고 믿습니다.

간혹 무슨 사심(私心) 때문인지 모든 논의를 당색으로 환원시켜 비난하는 당색 부활론자들이 있습니다. 논리학에서는 '인신공격의 오류', '순환논증의 오류'라고 부르는데, 이런 오류를 반복하다보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심성이 망가지고 심성이 망가지면 병이 듭니다. 공부를 제대로 해야 몸이 건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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