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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지갑을 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프레시안 books] <한국의 모금가들>

중고등학교 시절 나의 시험공부 전략은 수업 시간에 100퍼센트 절대 집중하는 것이었다. 필기도 하지 않고 선생님의 설명에만 몰입해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졸음이 오면 정말 자신을 꼬집는 짓도 해봤다. 수업 시간에 하는 공부를 놓치면 다시 그 두 배 세 배의 시간을 들여서 같은 내용을 다시 공부해야 하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수업 시간에 공부를 철저하게 해놓고 평소에는 교과서나 참고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덕분에 확보된 시간을 활용해서 읽고 싶은 책도 맘껏 읽고 가고 싶은 곳에도 맘대로 가고 친구들과 실컷 어울려 놀았었다. 시험공부가 아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공부도 신나게 했다. 그러다가 시험 전날이 되면 밤을 새면서 전력을 다해서 벼락치기로 공부를 했다. 그래도 학교 가기 전에 두세 시간은 몸과 마음의 정리를 위해서 꼭 잤다. 이 원칙을 정말 철저하게 지켰었다. 덕분에 시험 성적은 체면을 유지하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정도로 유지할 수 있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평소에 주위에서 부딪히는 흥미로운 일들을 머릿속이나 메모지나 핸드폰에 그때그때 기록해 둔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메모를 해두고 다시 잠에 든 적도 있었다. 가능하면 사실 자체보다는 그 순간의 내 느낌이나 반응을 기록해 두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메모지보다는 머릿속에 기록을 해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언젠가부터 사진도 찍지 않게 되었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지기도 했었지만 그 순간을 마음속 느낌으로 기록하려는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느낌이 오면 최소한 몇 분 정도는 그 자리에 멈춰서 그 느낌을 맘껏 즐기고 바로 그 느낌과 상황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려고 노력한다. 아직도 시험공부 하듯 늘 마감에 쫓겨서 벼락치기로 글을 쓰는데, 그 때마다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느낌 기억'을 하나씩 꺼내서 살펴보고 적절한 것들을 사용한다. 사건과 상황에 대한 냉철한 회고나 진술에는 약점이 있지만 당시의 느낌과 상황을 다시 한 번 공감하면서 추억하고 서술하는 재미가 있다.

▲ <한국의 모금가들>(정현경·이선희·김현성 지음, 아르케 펴냄) ⓒ아르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모금가 10명을 역시 현직 모금 전문가인 정현정, 이선희, 김현성이 인터뷰하고 정리해서 엮은 <한국의 모금가들>(아르케 펴냄)을 펼치면서 내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느낌 기억'이 하나 둘씩 되살아났다. 작년(2011년) 이맘때 나는 희망제작소 모금 전문가학교에 다니고 (또는 다니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국의 모금가들>을 엮은 사람들을 만났고 이 책에 인터뷰가 실린 모금가들 대부분의 강의를 들었다.

내가 희망제작소 모금 전문가 학교에 관심을 둔 이유는 간단했다.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일반인들과 '과학'을 화두로 자주 접촉하고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과학 문화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학 문화 활동을 하는 단체나 개인들은 주로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서 일을 하게 되는데, 비전도 매너도 능력도 없는 정부 기관의 터무니없는 간섭과 요구로 사명감을 갖고 보람차게 일을 시작했다가도 이내 몸은 지치고 마음은 척박해지기가 일쑤였다. 모금을 통한 과학 문화 활동이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모금 학교를 찾은 이유였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거의 모든 활동을 유지하려는 경향성이 강한 곳이다. 꼭 해야 할 일을 할 때 모금보다는 증세를 먼저 생각하는 전통이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에는 모금을 하거나 거액의 기부를 받아서 과학 연구를 하거나 과학 문화 활동을 하는 예가 많다. 세계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여러 천문대의 이름에 거액 기부자의 이름이 붙는 경우도 있다. 외계 생명체와 관련된 과학 문화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 미국의 행성 협회나 세티 연구소의 운영 자금의 대부분은 자발적인 민간 기부자들로부터 나온다. 민간 기부액이 매년 급팽창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과학 문화 활동을 위한 모금이 가능할까, 그게 궁금했었다.

나는 희망제작소 모금 전문가 학교 5기 수강생으로 정말 오랜만에 학생이 되었다. 아마 대학원생 시절 이후 처음이 아닐까한다. 늘 가르치기만 하다가 학생이 되었으니 예전에 내가 실천했던 수업 시간에 100퍼센트 집중하는 전략을 다시 구사해보자고 내심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그 전해 가을에 겪은 병고로부터 건강이 채 회복되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수강을 한 탓인지 수업 시간에 출석하는 것조차도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집중력은 학창 시절의 50퍼센트 정도였다고 스스로 평가도 해본다. 간신히 버틴 끝에 졸업장은 받았지만 나는 정말 근근이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학생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입장을 좀 더 고려하자 뭐 이런 결심을 하기도 했지만 모금 학교 졸업과 동시에 그런 마음 자세는 이내 잊어버리고 느슨한 듯 굴면서 슬쩍 까다로운 선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국의 모금가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많은 전문가들이 다양한 주제를 갖고 강의를 했다. 내가 처음부터 궁금했던 것, 과학 문화 활동을 위한 모금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금방 얻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조사한 통계 자료에도 예술 분야 기부 현황을 보면 전체 0.2퍼센트 정도예요. 당장 굶어 죽는 아이들도 있는 판국에 문화 예술은 사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책에도 언급된 것처럼 예술 분야도 이럴진대 과학 문화 분야는 한마디로 가능하지만 시기상조라는 이야기였다. 과학 문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금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이런 학교에 와서 공부도 하고 하면서 일단 잠재력을 키워야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준비가 된 후에야 개척에 나서야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요즘도 기회가 되면 과학 문화 활동을 하는 동료들에게 꼭 한번 모금 전문가 학교에 가보라고 권하곤 한다.

모금 전문가 학교의 강의가 계속되면서 정작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모금에 대한 기술적인 테크닉이나 기부 문화의 비약적인 확장에 따른 모금을 바탕으로 한 과학 문화 활동의 가능성,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수업이 시작된 후 언제부터인가 강사들과 학생들 모두에게 울려 퍼지고 있던 공감의 종이 있었다.

"10인의 모금 전문가들로부터 모금의 기술 혹은 법칙이 있다면 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법칙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술적인 방법론만으로는 기부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단순한 진실 때문이다. 애초에 계획한 대로의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모금가들의 삶, 기부자들의 삶, 수혜자들의 삶에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독자들도 모금 전문가들이 들려준 모금에 대한 많은 이야기 속에서 저마다 보석을 캐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 인터뷰어 세 사람의 공통된 바람이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세 사람이 <한국의 모금가들>에 적어놓은 바로 이 글이 당시 모금 전문가 학교에 울려 퍼지던 종소리였다. 결국 모금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요청하는 사람답게 살기 위한 사람다운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모금 전문가들은 먼저 사람에 대해서 연구를 해야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모금 전문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람 공부였던 것이다. <한국의 모금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사람 이야기였음은 물론이다.

열 명의 모금가들은 저마다의 원칙과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기부자는 기부를 청한 그 사람을 보고 기부한다.
- 지금은 작은 컨퍼런스를 해도 오는 사람들이 왜 오는지 어떤 성향의 사람들인지 조사해서 정보를 구축해 놓아요. 이런 정보는 기부자 발굴과 관리에도 필요해요.
- 그 사람이 무엇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해요.
- 그러나 '모금'은 면도날로 남의 가방을 열어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서 저 주머니에서 이 주머니로 끌어오는 것이에요.
- 그래서 제가 그래요.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강의할 때 제가 그래요. 거절은 '병가지상사'다.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 저는 기부자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작게 버리면 작은 것을 가지게 되고, 많은 것을 버리면 많은 것을 갖게 되고, 다 버리면 다 가진다고.
- 그리고 역시 기부가 되는 순간은 잠재 기부자가 기부할 수 있는 것, 기부할 수 있을 만큼을 요청할 때입니다.
- 모금의 키워드는 사람입니다. 모금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고, 친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 '기부자', '기부자 중심형' 많이들 강조하지만 지나치게 기부자 중심형이 되면 역으로 원칙에 어긋나는 일들이 발생하곤 해요. 그래서 '언저리에 있는 지혜'가 필요해요.
- 우리나라는 모금 전문가가 부족한 것이 아니에요. 모금은 전문가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 안 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거지요. 그래서 훈련과 교육에 대한 투자를 반드시 해야 해요. 모금은 분명 전문가의 영역입니다.
- 사람들은 대개 이성적인 것 같아도 감성적으로 결정하고 이성적으로 보완합니다. 특히나 모금은 그래요. 보세요. 수많은 모금 캠페인을 봐도 우리가 돈이 필요하다는 그 명분 자체를 감성적으로 건드리는 내용이 많잖아요.
- 내가 못 살아서. 내가 게을러서 저 사람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럼 떳떳해질 수 있어요. 그리고 요청이 거절당했을 때는 셋 중 하나라는 거에요. 돈이 없거나, 내 미션에 동의하지 않았거나, 나쁜 놈이거나. (웃음)
- '정정당당함'이 정말 중요합니다.
- 그러나 저는 '노하우'도 중요하지만 요즘 세대에서는 '노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구를 만나고 누구랑 일을 만드느냐'가 우선이라는 것이지요.
- 모금은 가치를 나누는 것이에요. '가치 공여'라고 할까요, 아니면 '기여 창출'이라고 할까요.
- 평소 제가 모금을 할 때 머릿속에 그리는 신조가 있는데 '모금은 안 되는 이유를 하나씩 없애는 과정이다'예요. 안 되는 이유를 없애면서 거부할 수 없는 명분과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전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책에서 모금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모금 이야기는 한 편의 시와 같기도 하고 사진 같기도 했다. 모금을 대하는 저마다의 단상을 한편의 시처럼 한 장의 사진처럼 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색깔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편의 시집 속에서 또는 한편의 사진집 속에서 저마다 '사람'을 주제로 속삭이는 '느낌 기억' 같았다. 모금 전문가 학교에서 느꼈던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느낌 기억' 속에서 꺼내온 또 다른 추억은 모금 전문가 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내내 진화 심리학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다. 속으로 맞아 맞아, 저건 바로 진화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요거잖아, 그러면서 내심 놀라고 즐거웠었다. 모금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라면 당연히 우리의 생물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진화 심리학의 연구 성과를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진화 심리학이 이미 커뮤니케이션이나 마케팅에서 그 원리를 제공하는 이론적 체계로 널리 활용되고 있는 모금 분야야말로 이 이론이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모금 전문가들과 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들도 이미 진화 심리학이란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진화 심리학적 접근을 하고 있음을 <한국의 모금가들>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해체되었다가 다시 조립된 느낌이랄까. 아무튼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스스로 분해되는 기분 때문에 매번 그 시간이 기다려지고 흥미진진해지더라고요. 현장에서 고쳐지지 않았던 모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고집들도 깰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인터뷰어 중 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한 것처럼, <한국의 모금가들>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해체시키는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은 내 머릿속 '느낌 기억' 속에 담아두었다. 장자가 했던 말이었던가, 뜻을 얻었으면 내용을 버려라. 이 책을 읽고 모금은 사람이라는 뜻을 얻었다면 열 명의 모금가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은 모두 잊어버렸으면 한다. 그것은 그들의 시일 테고 사진일 것이다. 책을 덮었다면 이제는 큰 뜻 위에 자신만의 새로운 시를 쓰고 사진을 찍어야할 시간이다.

모금을 위해서 각자의 시를 쓰고 사진을 찍어야 할 모금 전문가들에게 먼저 진화심리학 책을 한 권 선물하고 싶다. 진화 심리학자 전중환이 지은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펴냄)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나는데 큰 도움을 줄 경쾌한 진화심리학 책이다. 시도 한편 보내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중 몇 구절이다. 누구 말대로, 사람이 희망이다. 희망제작소 모금 전문가 학교 동료들이 그리워지는 가을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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