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것은 동물뿐만이 아니다. 일루사(Ilosa) 국립공원에 갔을 때는 해발 1000미터의 백악기 지층보다 300미터 높은 쥐라기 지층을 걸었다. (쥐라기가 백악기보다 앞선 시대다.) 쥐라기 지층에서 내려다본 백악기 지층은 남북의 길이가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평원이다. 마치 아프리카 대륙의 사바나와 같은 풍경이다. 평원을 내려다보니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그날 새벽 나는 강가를 따라 걷다가 작은 언덕에 올랐다. 나무가 듬성듬성한 사바나는 척박하면서도 나름대로 평화로운 묘한 풍경을 보여준다. 밤새 들렸던 온갖 비명과 나를 위협하던 울부짖음 그리고 갖가지 동물이 짝짓기 하는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풀밭 사이로 사자는 보이지 않고 얼룩말 떼가 한가로이 배를 채우고 있을 따름이다.
원주민 열세 명이 길을 간다. 팔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지만 키는 1미터가 조금 될까 말까? 침팬지만 하다. 그래도 골상을 보아 하니 두뇌의 크기는 유인원보다는 훨씬 크고 앞니는 작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발로 똑바로 서서 걷는다. 그러니 침팬지나 보노보는 아니다. 이들은 열셋이나 되지만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다. 내 아이폰에서 터지는 플래시와 셔터 음에 움찔한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건강해 보이는 여인에게 말을 건네려 하자 그들은 줄행랑을 친다." (이정모의 상상)
내가 상상한 그 여인은 루시(Lucy). 최초(?)의 직립원인 호모 에렉투스의 한 명이다. (마다가스카르에는 원시인들이 살지 않았다. 마다가스카르에 사람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불과 2000년 전의 일이다.)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에렉투스의 조우(遭遇)라니! 여우원숭이와의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적인 만남일 것 같았는데, 좀 더 생각해 보니 별로 드라마틱한 장면은 아니다. 신체와 지능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도구에 있어서 워낙 큰 차이가 있다 보니 일방적인 두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두 종 사이의 남녀가 사랑을 불태울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이런 만남은 어떠한가? 크로마뇽인,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마주쳤다면 그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맺어졌을까? 그들은 동시대를 살았으며, 뇌와 몸집의 크기가 비슷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관계다. (지금도 전혀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맺는 관계는 얼마든지 있다.)
▲ <크로마뇽>(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김수민 옮김, 더숲 펴냄). ⓒ더숲 |
책이 흥미진진한 이유는 책이 주는 정보뿐만 아니라 서술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고고학 책은 (나에게는) 어렵고 재미없다. 하지만 페이건은 교육방송(EBS) 다큐멘터리를 보듯 이야기를 실감나게 재현했다. 페이건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극적인 만남으로 책을 시작한다.
"털옷을 걸친 한 무리의 크로마뇽인 가족이 천천히 움직인다. 손에 창을 든 사냥꾼 남편과 말린 고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을 맨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들과 딸 이렇게 네 식구다. (…) 갑작스런 돌풍이 강 건너편에 내려앉아 있던 어둠을 들어올렸다. 순간 소년이 소리를 지르며 한 곳을 가리키고는 겁에 질려 엄마 곁으로 달려간다. (…) 짙은 속눈썹에 우락부락하고 털이 무성한 얼굴이 강기슭 맞은편에 있는 덤불숲에서 이들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경계하는 눈빛의 네안데르탈인이 추위에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창을 흔든 뒤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네안데르탈인의 얼굴은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진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계속해서 주위를 살핀다. 동굴로 오르면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목격하기도 힘들고 대면하는 일도 거의 없는 조용한 이웃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들을 봤을 때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에는 그들의 수가 지금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아버지는 설명한다. "그들은 우리처럼 말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다. 우린 그저 그들을 무시하면 된다."" (4~5쪽)
크로마뇽인은 열대 아프리카에서 5만 년 전 시작되어 1만 5000년 전쯤 빙하시대가 끝난 뒤까지 계속된 최초의 현생 인류다. 지금까지 나온 크로마뇽인에 대한 책은 대개 예술을 통해 그들을 정의한다. 입에 잘 붙지도 않는 이상한 동굴 이름을 외우는 것 때문에 내가 잠깐 배운 세계사를 싫어했을 정도로 예술이 중요했다. 페이건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예술은 존재의 일부였을 뿐. 그들만큼 변화무쌍한 기후와 환경 속에서 살았던 인류 종의 거의 없다.크로마뇽인이 살아남은 까닭은 호모 사피엔스가 가진 독특한 적응력과 창조력 그리고 기회주의적 특성 때문이다. 예를 들면, 페이건은 크로마뇽인의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은 귀가 달린 바늘이라고 한다.
"(…) 별로 대단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이 도구가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변치 않아 보이는 이 바늘은 초기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 중 하나인 불의 사용과 지위를 나란히 한다. 수만 년 동안 네안데르탈인과 그들의 선조들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망토처럼 동물의 가죽을 몸에 걸쳤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수석으로 만든 송곳으로 가죽에 구멍을 뚫은 다음, 긴 섬유나 끈을 이용한 '실'을 구멍에 넣어 잡아당기면서 가죽들을 이었다. 하지만 그 후 바늘귀가 달린 바늘이 제작되자 여자들은 바늘을 이용해 몸에 꼭 맞는 여러 겹을 덧댄 옷을 만들 수 있었다.
(…) 저체온증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으로 옷을 덧입거나 벗는 방법은 그들이 외부 기온에 상관없이 따뜻한 체온을 적절히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이 겹쳐 입는 맞춤옷을 만들지 못했던 것이 북유럽 평원에서 일정 기간 이상을 거주하지 못했던 이유일 수도 있다." (262~263쪽)
또한 크로마뇽인들은 사냥과 채집, 그리고 거주지를 옮길 때 서로 협동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혼자 활동하지 않았으며 서로 도우며 해결했다. 그들에게 협동 능력은 필수였다. 또한 효율적인 무기를 가졌으며 (하도 생생하게 서술하여 무기와 그 사용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다보면 따라서 해보고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계획과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동물과 식물, 환경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크로마뇽인에게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독창성과 즉흥성이 모두 필요한 세계에 살았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복잡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한계와 고정관념이 없는 유연한 사고와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크로마뇽인들은 이런 능력들을 이용해 기후변화가 빠르게 일어나고, 겨울이 혹독하며, 따뜻하고 식량이 풍부한 계절이 일반적으로 짧았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어떻게 된 게,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네안데르탈인은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배웠다. 생물 시간에도 그렇게 배웠고 역사 시간에도 그렇게 배웠다. 단지 두 종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인류 종은 직접적인 조상-후손 관계로 배웠고 시험을 치렀다. 지금 생각하건데, 아마 책에 딱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이해하고 가르쳤으며, 우리는 그렇게 배우고 그걸 믿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나는 우리나라에서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진화이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진화이론을 제대로 배우신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생물학 교과서를 쓰시는 분들도 나와 같은 세대일 테니 아마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일하는 자연사박물관에서 청소년과 성인들을 대상으로 전시물 해설을 한다. 우리 세대야 헤켈의 계통 반복설을 죽어라 익혔으니 그 그림이 뇌리에 박혀 있는 게 당연하지만, 요즘 고등학생이 계통 반복설을 설명하는 그림을 찾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 헤켈의 계통 반복설이 조작이라는 게 밝혀진 게 언제인데……. 혹시 아직도 교과서에 그게 실려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생물학자들은 과학자의 탈을 쓴 일부 기독교인들의 청원에 따라 교과서에서 시조새와 말의 진화를 삭제하도록 한 교과부와 출판사를 욕할 처지가 아니다. (이 대목에서 굳이 밝히자면, 나는 기독교인이고 안수집사다.) 교진추(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의 청원에 따른 교과서 파문을 <서울신문>이 처음 보도한 것은 지난 5월이다. 하지만 다른 언론사들이 본격적으로 다루고 생물학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은 <네이처>가 "한국, 창조론자들 요구에 항복"이라는 기사로 우리나라 진화론 논쟁(?)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다음부터다. 이건 뭐~.
진화학은 물리학과 화학, 분자생물학 같은 경성과학이 아니다.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으며 부분적으로는 역사적인 학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수집한 실증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능력이 있는 과학인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인인 나는 무신론자보다 사이비기독교인과 이야기할 때가 더 답답하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는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보다 사이비과학자들과 이야기할 때가 더 힘들다. 이야기하는 층위가 다르고, 대화를 하는 순간 사이비과학자들의 위상은 터무니없이 높아져서 대중들이 마치 사이비과학도 고려의 대상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맹점이 있기 때문에 대화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과서가 난도질당하는 이때에도 침묵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금은 대화가 아니라 싸움을 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 싸움에 장대익 교수 한 명을 내보내고 구경만 해서는 안 된다.
싸움은 어쨌든 과학자와 사이비과학자 사이에서 정리돼야 할 일이다. 이 틈에 대중들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네안데르탈인이 견디지 못하고 멸종한 빙하기에 살아남은 크로마뇽인으로부터 현생인류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래서 <크로마뇽>은 이번 여름에 읽어볼 만한 책이다. 22조 원이나 퍼부은 4대강 사업이 거의 완성된 후에도 엄청난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가 살아남을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읽고 살아남자.
사족 : 충실한 일러스트와 (중간에 모아 둔) 천연색 화보는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된다. 색인은 진화 관련 번역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이 번 여름에 <최초의 인류>(앤 기번스 지음, 오숙은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도 함께 읽으면 독자들의 건강에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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