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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 '찌질한' 486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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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 '찌질한' 486에게 묻는다!

[프레시안 books] 조너선 해슬럼의 <E. H. 카 평전>

2008년 4월 모스크바를 찾았다. 페레스트로이카 전후의 정치 비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자료를 살피려고 '모스크바의 교보문고' 돔 크니기에 들렀다.

대형 서점답게 역사 코너가 널찍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시기를 다룬 책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현대사나 러시아 통사를 다룬 어떤 책에서도 해당 시기의 서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니, 1917년 혁명부터 1991년 연방 해체에 이르는 소련의 역사 자체가 러시아 역사책에서 사라져 있었다. 충격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소련 시기를 아예 러시아 역사에서 빼 버렸구나."

씁쓸한 마음으로 혼잣말을 되뇌며 서점을 나서는데 그 앞 신아르바트 대로에서 마침 대통령 푸틴의 퇴근 시간이라며 경찰이 교통 통제를 시작하고 있었다. 차르와 같은 독재자 밑에서 망각의 깊은 늪에 빠진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마음속으로 조의를 표하며 발길을 돌렸다.

이튿날 아침 숙소인 나치오날 호텔 맞은편의 붉은광장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레닌 얼굴이 그려진 붉은 현수막을 들고 광장을 행진하는 수십 명의 시위대는 대부분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장층이었다. 사회주의 시절 열심히 일한 덕에 편안한 노년 시절을 꿈꾸었건만 옐친과 푸틴 치하의 가공할 인플레이션 탓에 연금 증서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마음이 짠했다.

▲ <카 평전> (조너선 해슬럼 지음, 박원용 옮김, 삼천리 펴냄). ⓒ삼천리
평생을 소련의 역사와 대결하며 살았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E. H. Carr, 1892~1982년)의 평전을 마주대하니 4년 전 소련에서의 일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카가 모스크바를 찾을 때마다 이용했던 숙소가 4년 전 내가 묵은 나치오날 호텔이라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 더했다.

E. H. 카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역사의 진보에 눈을 뜬 한국의 젊은이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진보에 대한 신념으로 충만한 카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는 광주의 비극을 곱씹으며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던 젊은이들에게 실제 내용 이상의 영감을 주었다.

평전을 읽어 보니 당시 <역사란 무엇인가>가 그토록 널리 읽힌 것도 카가 1982년에 사망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1980년대에 생을 마감한 카에게나 그 시절 사회적 인간으로 첫발을 내디딘 대학생에게나 소련은 특별한 존재였다. 카는 대처의 신자유주의 노선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20세기를 묘사한 그림의 중심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고, 한국 대학생들은 신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당시를 러시아 혁명 전야와 비교하며 '제헌의회'와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설계했다.

카가 러시아 혁명을 만난 것은 20대 후반 영국 외무성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카에게 러시아 혁명은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자결' 같은 서구의 전통적 가치들이 강대국들의 위선적인 구호로 변해 버린 시대를 뚫고 터져 나온 비상사태였다. 카의 주된 관심은 러시아 혁명보다는 "승자가 패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베르사유 조약의 체제가 언제 어떻게 붕괴할 것이냐 하는 데 있었다.

카가 영국 <타임스>의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유럽에는 새로운 질서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질서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쓰고 있을 때, 히틀러는 '정복에 의해 통일된 유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카는 "전통적 국제 질서는 결코 재건될 수 없고 히틀러가 왜곡된 방식으로 유럽 대륙의 혁명적 전환을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서유럽 전역에 걸쳐 우리가 지지하는 공동의 가치는 인정되고 존중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19세기의 맥락 속에서 이러한 가치들을 이해하는 상황은 진정 경계해야만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선거권만 인정하고 일할 권리나 생존권을 부정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유를 얘기할 때, 사회 조직과 경제 계획을 배제하는 낡아빠진 개인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평등을 얘기할 때, 사회적 경제적 특권에 의해 무력해진 정치적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경제 건설을 얘기할 때, 그것은 최대한의 생산(비록 이것 역시 필요하긴 하지만)보다는 공평한 분배를 생각한다. (<타임스> 1940년 7월 1일자)

카가 볼 때 경쟁과 자유 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는 생명을 다했고 '경제의 계획화, 결국 사회주의 형태'가 미래의 대안이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시작한 19세기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이라는 과제를 완성하였다"고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적 전쟁이다"라는 과장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바로 이때 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소비에트의 기적 같은 전쟁 수행 능력'이었다. 카는 이런 성공이야말로 1930년대의 '계획적 공업화' 덕분이었다. 그는 소련군이 바르샤바 외곽 비스와 강 동안에서 진격을 준비하고 있던 1944년 가을, 소련의 역사를 집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처럼 반평생을 고민하던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하고 나머지 일생을 바칠 과제를 결정했을 때 그는 이미 "남들은 여유로운 은퇴를 생각할" 50대에 들어서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카가 '소비에트 러시아사'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와 씨름해 나간 30여 년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다. 반백의 노학자는 냉전 시기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류 사관과 대립하는 관점 때문에 대학에서 안정된 자리를 얻지도 못했다. 가정사도 불행해서 그 나이 이후에 두 차례나 이혼을 겪었다.

당연히 생활은 불안정했다. 그러나 카는 스스로 정한 과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자본주의 이후 인류가 가야 할 길의 주요한 시사점으로서 소련 역사를 정리하는 일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고 갈수록 방대해졌다. 하지만 주류 학계로부터 외면당할 때에나, 예순 살을 훌쩍 넘겨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가 됐을 때에나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소비에트 러시아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카가 진보에 대한 신념 아래 소련사와 대결하던 시기는 인류가 냉전의 와중에서도 진보의 가치를 잃지 않던 때였다. 카가 전망한 대로 고전적인 자본주의는 막을 내리고 자본주의 진영의 심장부인 미국과 서유럽에서조차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분배, 복지 등 노동자에 대한 광범위한 양보가 이루어졌다.

이때 소련의 발전은 "바깥(자본주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저개발 국가들이 소련을 모방하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했다. 중국과 쿠바 등지에서 혁명과 비자본주의적인 발전이 거침없이 일어났다. 반스탈린, 반소련 정서가 극단으로 치닫던 1960년대 말에도 카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어떻게 계산을 하더라도 개개인의 복지와 기회의 총합이 50년 전의 러시아보다 현재의 러시아에서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카의 평전을 쓴 그의 제자 조너선 해슬럼은 다음과 같은 역설적 표현으로 카의 역사적 평가가 정곡을 찌르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1956년 1월 미국 국가안보위원회에서 열렬한 반공주의자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미국은 러시아의 급속한 공업화 현상이 세계의 저개발 지역에 끼친 충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농업 국가에서 근대적인 공업 국가로 러시아가 변모한 것은 단연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모든 저개발 국가들은 "러시아의 공업화가 낳은 결과"를 보았고 "그 나라들 모두 러시아가 그 비결을 가르쳐 주길 원했다." 카의 생각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카는 1929년까지의 소련사를 마무리하고 자신의 신념을 간직한 채 떠났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인류사는 거대한 전환을 하고 있었다.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영국의 보수당 정권은 노동자에 대한 양보를 철회하고 독점 자본을 위한 자유주의의 권토중래를 선언했다.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전 세계 차원에서 노동 계급과 사회주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 카가 목격했던 세계사의 전환과 정반대되는 흐름이 30여 년간 지구를 휩쓸었다. 카가 죽은 지 10년 만에 소련을 비롯해 자본의 독주를 견제할 세력은 사라져 버렸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진보를 꿈꾸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 같은 역류를 겪으며 어느덧 반백의 중년에 이르렀다. 그들은 제헌의회를 설계하고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역설하던 시절을 돌아보기 싫어졌고, 머릿속에서 소련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지울 만해서 지운 것이 아니다. 지워야 했기 때문에, 지워야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지웠을 뿐이다.

오늘날 세계는 카가 소련사를 쓰겠다고 마음먹던 시대의 과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금 자유와 성장의 문제를 재검토하면서 평등과 분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카의 필생의 과제가 멈춘 지점, 소련의 실험이 폭력적으로 중단된 지점을 돌아보는 성찰과 사유 없이 인류사의 새로운 진보가 가능할까? 모스크바 돔 크니기의 텅 빈 역사책들처럼 소련의 경험을 고의적으로 지워 버린 채 그 무슨 진보를 이야기하는 이 시대의 '좌파'들을 위해 카는 이런 말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빈약하고 불쌍한 우리 좌파! 레닌은 혁명을 원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의 좌파는 혁명을 하지 않고 혁명의 결실을 쟁취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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