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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영화는 영화일 뿐 '오버'하지 말자!"

[기고] <부러진 화살>은 허구다

1.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다큐멘터리도 진실의 모든 면을 담을 수 없는데, 하물며 극영화를 그대로 믿고 실제 있었던 일을 재단하려고 하는 것은 애초에 틀린 생각이다. 영화에 불과한 <부러진 화살>이 "씽크로율 98퍼센트"라고 하는 것도 오해를 부르기 딱 좋은 말이고, 영화와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공식 대응 자료를 내는 법원도 좀 오버가 아닌가 한다. 실제 사건이 아닌 극영화를 놓고 진실 공방을 벌이는 게 말이 되는가.

2. 우선 "씽크로율 98퍼센트"를 주장하는 쪽에 대해서 비판하자면, 이 영화에 "객관적 사실"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는 한쪽의 얘기를 듣고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얘기"에는 사실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도 들어간다.

사실과 가치 판단을 분리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박훈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 사건에 대해 (김명호 교수가 실제로 박홍우 판사에게 석궁을 쏴서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이 사건은 단순한 협박 및 폭행 사건"이라며 "이와 비슷한 사건의 경우 형량은 최대 300만원의 벌금형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I unrespectfully disagree.)

3. "이와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있기나 했는지도 의문이지만(판사 집에 석궁 혹은 그와 유사한 흉기를 들고 찾아가서 협박한 사건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실제 있었다면, 그게 어떻게 최대 300만 원 정도의 벌금 사안에 불과할 수 있는가(이 부분에 대한 박훈 변호사와 나의 의견 차이. 이것이 가치 판단이다.)

즉, 박훈 변호사가 "이 사건은 단순한 협박 및 폭행 사건"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에 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평가'다. '평가'를 듣고 만든 영화에 대해 씽크로율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씽크로율이 아니라 (박훈 변호사를 비롯한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씽크로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석궁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장소는 박홍우 판사가 살던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잠실에 있는 평범한 아파트인데 사건 당시 우연히 나도 동은 다르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보도를 보고, 만약 내가 퇴근했는데 내 결정에 불만을 가진 (당시 나는 검사였다) 민원인이 석궁을 들고 아파트 계단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상상해보았다. 김명호 교수는 위협을 하려 했을 뿐 절대 석궁을 쏠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막상 화살 앞에 선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5. 당시 박홍우 판사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사람과 맞닥뜨렸다면 그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보다도, 짐승처럼 화살에 꿰어진 모습을 위층에 있는 가족들이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6. 판사의 오판이나 검사의 잘못된 결정은 가능한 없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설사 잘못된 판결을 했다고 하더라도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에서 석궁 앞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김명호 교수 측이 주장하는 사실 관계가 그대로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즉 석궁을 가지고 협박만 할 생각이었는데 옥신각신하다가 발사되었을 뿐이고 실제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징역 4년이 결코 지나치게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제 사건에 대해서 "300만 원 정도의 벌금 사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만든 것이다. 당연히 "전체로서의 진실"이 될 수 없다.

7. 그러나 어쨌든 <부러진 화살>은 극영화일 뿐이다. 이 영화가 실제 재판 과정과 다르다고 보도 자료를 내는 법원이나 해명을 시도하는 판사도 극영화의 본질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도는 애초에 영화가 100퍼센트 사실 그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전제에 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실화가 될 수가 없다. 극영화에 대해서 해명을 시도하는 것은 영화의 내용을 '진실'의 한 후보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 객관적 진실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사건에 관여한 사람이, "실제 진실은 ①스크린에 나온 내용이 아니라, ②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이것입니다."라고 하는 순간, 극영화의 내용 혹은 발화자의 진술이 진실이 될 수 있는 선택지의 위치로 올라서는 것이다. 대단히 현명한 대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8. 흔히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 영화는 실화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라는 자막이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This is a true story"라고 나오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마저도 (허구인) 영화의 한 부분이다. "This is a true story"라는 자막 이전 부분은 모두 허구이고, 그 자막은 진실인가? 누가 그걸 보증하는가? 영화감독이?

영화감독이 진실이라고 하면 모두 진실이 되는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생각해보라. 화자는 자신이 실제로 발견한 책에서 본 것이라며 얘기를 한다. 독자는 그 얘기를 믿고 책을 읽을 수도 있다. 마지막에 저자의 말에서 작가는 그 얘기도 허구라고 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도 허구일 수 있지 않은가.

▲ 영화 <부러진 화살>. ⓒ프레시안

9. <부러진 화살>은 좋은 영화이고 우리 사법부와 재판 현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사실 실제 재판을 하다보면,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현재의 영'이 되어서 존경하는 판사님들을 모시고 실제 법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부러진 화살>은 "현실에서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우리의 재판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말 실감나는 영화다. 그런 좋은 영화가, "영화는 사실과 100퍼센트 같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진실 공방"으로 소비되는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깝다.

10. 진실이 아닌 것이 명백하면서도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나 영화가 있다. 예를 들면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나 필립 딕의 <높은 성의 사내>는 모두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놓고, 그럴듯한 스토리를 전개해나간다. 물론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해서 잿더미가 된 것은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이 책들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명을 찾아서>나 <높은 성의 사내>가 허구인 것처럼, 딱 그만큼, <부러진 화살>도 허구다. 때문에 <부러진 화살>의 싱크로율을 따지고 공방을 벌이는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우기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이다. 논리학에서 말하듯이 전제가 거짓(허구)이면, 모든 진술이 참이 되기 때문이다.

11. 그러나 허구인 것이 명백하지만, <비명을 찾아서>나 <높은 성의 사내>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러진 화살>이 실제 재판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부러진 화살>이 우리 재판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그것의 싱크로율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12. 영화의 감상과 해석은 관객(과 평론가)의 몫이다. 소재가 된 실제 사건에 관계했던 사람만이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가 의미 없는 '진실 공방'에 쓸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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