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 사람이 없으면 맞은 사람은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맞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누구라도 가장 먼저 떠올릴 기본이다. 더군다나 맞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법정에서 증거논쟁을 정리하는 판사라면 그 증거가 얼마나 중대한지도 알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해의 증거라는 것도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의 몸에 박혔다고 하니 그건 가해자가 어떻게 인멸할 수 없는, 피해자의 손에 들어간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그런데 그 증거가 사라졌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일까? 어떤 경로로?
가령 누군가를 칼로 찌른 뒤, 그걸 범인이 없애버렸다고 그 범죄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찌른 칼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찔린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칼이라는 물증이 없을 때에는 다른 정황 증거가 범죄를 입증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 물증이 없다고 그 범인이 잡히든 아니든 해당 범죄 사실이 부인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 그 결정적 물증이 실종된 것은 범인이 은폐 인멸했을 때의 이야기다.
만일 피해자가 주장하는 상처가 석궁 발사의 결과인지 아닌지도 확증되지 못했고, 발사체인 화살이라고 하는 물증도 없어진 상태이며 혈흔이 피해자의 것인지도 밝히는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판결이라면, 그걸 승복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주인공 김명호로 분한 안성기 ⓒ부산국제영화제 |
사법부의 권위를 몰락시키고 있는 당사자는...
법정에서 판사가 전문가를 불러 실험해 본 과학적 결과도 부정하고, 피해자의 혈흔 검증도 거부하고 결정적 물증이 사라진 경위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피해자, 그것도 동료 판사의 말만 근거로 판결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 재판의 일방성은 도마 위에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기 때문이다.
증거로 제출된 것의 증거능력 판별은 판사의 자유재량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상식적 설득력이 있을 경우에 한 한다. 판사의 자유재량 발동에 필요한 절차를 엄밀하게 구성하는 것이 바로 공판주의의 정신이기도 하고 법의 권위를 확보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이걸 판사 스스로가 무너뜨리는 순간, 법의 권위를 몰락시킨 당사자는 다름 아닌 판사 자신이다.
물론 '판결에 불만을 품고 석궁을 들고 갈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문제가 생긴다. 석궁을 들고 해당 판사를 겁주려 한 것은 찬동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라는 생각 대신 "오죽하면"이라는 시각을 가지는 순간 그를 대표로 하는 무수한 이들의 억울한 심정을 읽어내는 것이 판사의 양심이어야 한다. 이 행위를 벌주는 것에 진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담긴 절규를 듣는 것이 판사의 책임이다. 그런 판사가 있으면 그 행위에 대한 지탄은 사회가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사법부를 겨냥했다고들 난리인 모양이나, 이 영화는 사법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오만과 특권의식, 그리고 기득권 동맹 체제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만들어낸 것은 영화가 아니라 사법부 자신이다.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들이 이렇게 매일 급증할 수도 없다.
앙시앙 레짐의 몰락과 2012년의 시대정신
이제 영화 <부러진 화살>이 일주일을 넘기면서 관객 100만을 기록했다. 이런 식의 고공 행진이 계속된다면 여기에 0이 하나 더 붙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사태가 그렇게 방향을 잡아나가는 추세가 되면, 기존질서의 가장 강력한 보루인 사법부를 비롯하여 이른바 낡은 질서의 총체적 구조인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이 일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2012년의 시대정신"과도 그대로 일치하는 현상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단지 사법부의 현실만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제기하고 고민하며 토론하고 해결해야 할 사안들과 두루두루 직면하게 된다. 사립학교법, 국가보안법, 노동자 탄압, 사법피해, 교도소 인권상황, 언론의 비굴함, 이명박과 BBK, 검찰개혁 등 하나 둘이 아니다. 특히 노동자 탄압은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아래에서도 잔혹하게 벌어졌던 사건들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사회적 악폐와 구질서의 억압구조를 사법부의 현실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뿐이며, 그렇다고 다른 구질서의 권력기관들은 그냥 넘어가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정부 10년의 공과 과,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폐습, 사법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의 오만과 특권체제 이 모든 것이 이 영화에서 하나로 뭉뚱그려 얽혀 있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시야는 결코 좁지 않다. 하나로 열을 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정지영 감독에게 <부러진 화살>의 영화화를 권했던 배우 문성근(오른쪽)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안성기, 감독 정지영, 배우 김지호, 박원상 ⓒ연합뉴스 |
'2013년 체제'를 향해 하는 길목에서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2013년 체제'를 향해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작품이다. 민주주의의 완성과 남북관계의 진화, 그리고 복지체제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우리의 의식과 시선을 재정리하는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사법부라는 특정한 실체를 놓고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에서 그 주제를 놓쳐서는 안 되지만, 그 한계에 갇혀 논란을 벌이는 것도 기득권 질서의 담론 전략에 갇혀 버리는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석궁 사건의 실체 논란과 영화의 사실성, 허구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논란은 그 나름으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부러진 화살>의 의미를 한정시켜버린다면 그건 또 다른 "농간"에 놀아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작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우리가 이길 수 있다"이다. 방법도 나와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 보는 것이다. 대담하게. 그렇다면 누가?
2008년 촛불 광장에서부터 한미FTA 반대, 그리고 야권의 연대와 통합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현실을 역동적으로 변화시켜온 힘의 밑바닥에는 "보통 사람들의 미미하게만 보였던 목소리"가 있다. 세상으로부터 잊힐 뻔했던 석궁 사건의 김명호 교수도 그런 목소리의 하나이고,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 자체가 또한 그런 목소리며 노 개런티로 출연한 연기자들과 스텝도 그런 목소리를 만들어낸 이들이다. 이 영화를 설 개봉으로 과감히 배급 결정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 <부러진 화살>은 거대한 자본의 공세와 벽 앞에서도 SNS를 통한 사회적 응원에 힘입고 있지 않은가? 개봉 1주일 100만 관객도 그런 이들의 위력이 만들어낸 거사이다. 그렇지 않아도 2011년, 세계는 "작은 자들의 반란"과 이들의 힘이 폭발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슬람권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우리는 "더는 쫄지 않는 작은 자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현실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체험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이미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현관이 되었다. 한 시대의 의미를 규정하는 사회적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이걸 따고 들어가서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로 거기에 "<부러진 화살>의 실체적 진실"이 있다.
이번에는 제대로 쏘게 될 것이다. 영화처럼 유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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