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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러진 화살> 법의 특권을 정조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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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러진 화살> 법의 특권을 정조준하다

[김민웅 칼럼] 시사회의 뜨거운 반응, 무엇을 말하는가

폭발적인 시사회 반응

영화 <부러진 화살>은 사전 시사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지속적으로 얻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재미있다. 아무리 의미가 깊고 의의가 있다 해도 영화적 재미를 선사하지 못하면 그 작품은 실패다. 그러나 <부러진 화살>은 법정 공방의 현실감과 함께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면서도, 안성기를 비롯한 연기자들의 명연기를 보는 즐거움, 그리고 결국 통쾌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하는 영화 속의 대사가 말해주듯 세상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 하는 개탄과 함께, 그걸 돌파하는 개성 강한 인물의 등장은 극적 긴장을 높이는 동시에 분명한 메시지를 제시한다.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법적 권리조차 놓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한편, "아, 이럴 수 있는 거로구나. 이래도 되는 거였네!" 하는 용기로 다가온다.

법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어하는 세력에게 바로 그 법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는 방식으로 그 방어벽을 허무는 놀라운 반전과 역설이 펼쳐지는 장면들은 영화이면서 또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힘이 있다. 감독의 상상력으로만 구성된 픽션이 아니라, "사실과 영화적 구성이 하나가 된 팩션(fact+fiction)의 위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건 자체가 이른바 "석궁 테러"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었던 내용인데다가, 극중 실제 인물들이 모두 살아 있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최근 정봉주 전 의원 유죄판결의 당사자이며 피고와 변호인의 극단으로 모순된 성격이 거짓 없이 화면에 드러나면서 이 영화는 "법"에 대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지 촌철살인의 격파력을 가지고 일깨우고 있다.

정지영 감독의 뇌관 건드리기

만들기 어려운 영화가 만들어져, 이해하기 쉽고 보기 쉬운 영화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고 있던 사건에서 지금의 현실을 생생하게 길어 올린 감독의 시선은 우리 사회의 내면 의식 깊숙한 곳에 이르고 있다. 거의 언제나 우리 사회와 역사의 뇌관을 과감하게 건드려온 감독다운 영화다.

영화의 플롯에는 복잡함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이 명백하고 상식적일 듯 한 사건과 그 사건의 전개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분과 흥미로움 그리고 아, 하는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법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고 우리는 그 지배에 별 도리 없이 복종하고 있는 상황을 순식간에 무너뜨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개봉되는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법부의 제동 가능성과 거대 자본의 견제 장치, 그리고 이와 동맹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보수 언론의 험담이라는 현실에 포위되어 있다. 어느 신문의 기명 칼럼은 문제가 많은 인물을 국민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배우 안성기로, 사법부를 지탄하기 위해 판사는 "음흉한 악역 배우"를 썼다며 사법부 공격에 의도적인 배역을 했다는 식으로 영화를 모독 내지 모함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뚫어내자는 의식과 의지를 담은 영화이기에 더더욱 <부러진 화살>의 흥행 성공은 우리 사회에 중대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더군다나 영화 <남부군>의 정지영 감독이 오랜 침묵을 깨고 저예산과 국민배우 안성기, 문성근, 이경영, 나영희, 박원상, 김지호 등의 노 개런티 출연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 하다.

유죄와 무죄 사이에 있는 것은?

도대체가 우리의 사법부는 과연 믿을 만 한가? 검찰은 이대로 둬도 괜찮은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한국인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존 법률 체계를 지켜내야 한다는 법조계의 특징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기득권 또는 특권 방어를 위해 사회적 약자를 짓밟는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에 있다. <부러진 화살>의 시사회 반응이 그렇게 열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런 현실에 기인한다.

아닌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대한 정치적 충격을 주었던 일련의 사안들이 최근 잇달아 무죄판결을 받게 된 것을 봐도 검찰개혁은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그와는 또 달리 전여옥 표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아직도 시간만 죽이고 미적거려지고 있으며, 이명박 연루 의혹이 끊이지 않는 BBK 사건과 관련해 내려진 정봉주 유죄판결을 봐도 사법부의 두뇌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 무죄와 유죄 사이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사법부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내일 있게 될 곽노현 교육감에 대한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 사뭇 긴장된다. 선거과정에서 경쟁자였던 상대에게 사후에 돈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로만 모든 판단을 압도적으로 지배해버린다면 법은 그 사회의 사유방식에 경직된 틀만을 강제화할 뿐이다.

사법부의 몰염치

법은 법조문의 기계적 해석과 적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연유에 대해 끝까지 치밀하고 섬세한 관찰과 판단, 그리고 고도의 복합적인 법철학적 사고능력을 요구한다. 실체 판단이 쉽지 않은 사안에 대한 증거 능력 검증과 상황 분석, 그리고 논증의 과정에서도 정밀한 능력이 필요하다. 이걸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면 더더욱 문제다. 아니, 그 배제는 범죄다.

영화 <부러진 화살>은 피고의 억울한 상황을 조명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억울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법적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의 무염치함을 고발하고 있다. 그건 무염치함이라기보다는 범죄행위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무죄인 사람을 유죄로 몰아 얽어매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 마땅한가? 이 나라 사법부가 단 한 건이라도 그런 일을 했다면 사법부 전체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바다.

그런데 이 나라 사법부는 그런 성찰의 자세가 없다. 가령 한-미 FTA에 대한 법적 토론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판사에게 사법부는 경고를 내린다. 공인의 발언에 조심스러움이 있어야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러나 한-미 FTA로 말미암아 법적 희생자가 생겨날 사태에 대한 공인의 책임에 대한 고뇌와 발언은 일체 없다. 사법부의 기득권을 흔드는 상황에 대한 경계경보만 발동할 뿐이다. <부러진 화살>은 그런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경계경보다.

천만 관객 기대하며

영화 <최종병기 활>이 7백만을 넘었다. 그러니 <부러진 화살>은 반으로 부러졌으니 최소 3백50만은 들 것이라는 농담을 누군가가 한 모양이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받아쳤다. "부러졌다고 반이 아니라 두 쪽이 된 거지. 천만은 넘을 걸."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변한다. 사법부가 법적 정의에 대한 최종 해석자로 권위를 갖고 자신을 바로 세우는 중대한 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누구나 권력과 기득권의 횡포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는 단단한 보루가 생겨나는 것이다.

<부러진 화살>은 사법부를 정조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특권의식과 기득권에서 해방된 사법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 사법부가 되는 것은 사법부 자신에게도 당연한 과제이자 책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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