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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희망버스에 중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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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희망버스에 중립은 없다

[이렇게 읽었다] 송경동의 <꿈꾸는 자 잡혀간다>

모두가 희망하지만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김진숙이 추운 겨울날 85호 크레인에 올라갔을 때 그는 승리를 꿈꾸었지만 그것은 꿈에 불과했다.

"안 될 거야." "사람들은 그런 노동 문제에 관심 없어."

그랬다.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간 후 오랫동안 주류 언론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정치인들은 통합 이야기하기 바빴다. 사람들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무관심 속에, 그렇게 끝나나보다 했다. 시인 송경동이 희망버스 185대를 김진숙에게 보내자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85대를 어떻게 채우겠어?" "누가 자기 버스비 들여서 부산까지 가겠어?"
그러나 뜨거운 여름날 희망버스가 김진숙을 만나러 떠났을 때, 김진숙과 송경동의 꿈은, 한진 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의 꿈은, 노동자들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가 85호 크레인에 올라선 지 185일이 되던 날, 185대의 희망버스가 김진숙을 만나러 왔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소금꽃을 찾아 천릿길을 걸어왔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희망자전거를 타고 김진숙에게 왔다.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이 날아왔다. 김진숙에게, 한진 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민중에게 날아왔다. 그리고 크레인에 오른 지 309일 만에, 김진숙은 승리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 송경동과 정진우가 차가운 감옥에, 0.68평 밖에 되지 않은 좁은 감옥에 갇혀 있다. 불법 시위를 기획하고 선동한 죄다. 경찰이 불법 시위라 규정한 희망버스를 기획한 죄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송경동과 정진우, 그리고 희망버스가 저지른 죄는 고작 불법 시위를 기획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죄는 감히 자본에 대항하려 한 죄다. 노동자 민중 주제에 감히 자본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한 죄다. 국부를 책임지는 대기업이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를 했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죄다. 국가와 사회를 위한다고 떠들어대는 자본의 속살을 거침없이 까발린 죄다. 자본의 사유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해 노동자들을 강제 진압하고, 시민에게 물대포를 쏘아대는 저 권력의 허울을 벗겨낸 죄다. 아무리 때리고 아무리 비난해도, 물러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견뎌낸 죄다. 그리하여 마침내 해고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들에게, 민중에게 당신들도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죄다. 그리고 '시장의 논리'와 '탐욕'으로 사회를 지배하려 하던 자본과 정치 권력에게 절망을 안겨준 죄다. 희망버스의 죄는 이처럼 엄청나다! 희망버스의 죄는 고작 법 조항 하나를 어긴 것이 아니다. 희망버스는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를 건드렸다.

그리고 그 희망버스에는 시인 송경동이 있다. 거리 방송차 위에서 울분을 토하던 그 시인이 있다. 마이크를 들고 가슴 속의 시를 쏟아내던 그 시인이 있다. 벌금 수백만 원을 받고도 끈질기게 노동자의 편에 선 그 시인이 있다. 포스코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도, 대추리에서 머리가 깨져도, 기륭에서 발목이 나가도 삼성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의 죽음에 분노하고, 동희오토 노동자들과 손을 맞잡고, 용산의 망루를 바라보며 눈물짓던 그 시인이 있다. 0.68평의 감옥에 갇히고도 이곳은 너무 크고 넓다며 우리에게 재능으로, 쌍용으로, 전북버스로, 발레오로, 콜트콜텍으로 가자고 말하는 그 시인이 있다.

그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지 않는다. 청춘의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비정규직이, 노동자가, 민중이, 농민이, 그리고 자본주의가 있다. 그의 시는 썩어문드러진 자본주의를 깨부수는 무쇠정이다. 노동자와 민중, 농민의 소박한 꿈을 짓밟는 자본주의라는 바위를 들이받는 계란이다. 바위를 깨진 못해도 그 바위를 노른자로 뒤덮어 버리는 계란이다. 그의 시는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희망을 위해 절망하며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이들을 위한 노래다.

▲ <꿈꾸는 자 잡혀간다>(송경동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실천문학사
혹자들은 송경동을 '전문 시위꾼'이라 부른다. 노동 현장에 당사자도 아닌 이가 나타나 시위를 선동하고, 불법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송경동의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 간다>(실천문학사 펴냄)를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송경동은 제3자가 아니다. 송경동은 광주 항쟁을 겪으며 시인의 꿈을 키운 소년이다. 송경동은 일용공 노동자와 희로애락을 함께하던 소년이다. 송경동은 봉분도 없는 무덤 앞에서 눈물짓던 아들이다. 송경동은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어느 새 민주노조의 활동가가 된 동생을 가진 형이다. 송경동은 청춘의 절망과 성장의 절망을 동시에 겪었지만 늘 사랑을 잊지 않았던 시인이다. 누가 송경동을 제3자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송경동을 노동자의 편에 서게 한 자는 과연 누구인가? 송경동에게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의지를 부여한 자는 과연 누구인가? 울분을 토하다 들고 있던 마이크를 집어던지게 만들 만큼 그를 분노하게 만든 건 과연 누구인가? 소박한 삶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정당한 대가와 권리를 경영상의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폐기하던 이들은? 생존권을 '지대 추구'라고 비아냥거리던 이들은? 꿈과 희망에 폭력과 억압으로 대답한 이들은? 자본주의의 전위가 되어 노동자들을 투쟁적으로 착취하면서 노동자들의 몸부림에는 불법과 폭력의 낙인을 찍던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송경동 시인의 입을 빌려 대답하자. "한진중공업. 그렇다. 삼성그룹. 그렇다. 현대자동차. 그렇다. 쌍용자동차. 그렇다. 대우자판. 그렇다. 콜트콜텍. 그렇다. 발레오공조. 그렇다. 재능교육. 그렇다. 전주버스. 그렇다. 이명박. 그렇다." (☞바로 가기 : "'소금꽃 김진숙과 '85호 크레인'")

자본과 정치 권력이 노리는 바는, 바로 이 모든 투쟁과 억압의 과정에서 발생할 우리의 무기력과 헛된 희망이다. 자본과 권력의 공세에 지친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패배 의식에 휩싸이고,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라며 철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 체제 안으로 들어가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다. 너무 고통스러워 고통에 무뎌지거나, 지쳐 죽음을 택하는 안락사 환자들처럼 짓밟히던 노동자와 민중은 더 이상 고통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그 고통에 지쳐 헛된 희망을 품으며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송경동의 시는, 송경동의 글은 고통에 무뎌진 우리에게 고통을 자각해야 한다고 외친다. 같이 싸우자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토해낸다. 이 사랑과 정의의 몸부림 앞에서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

희망버스의 노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희망버스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제 희망버스는 송경동을 구해야 한다. 정진우를 구해야 한다. 재능을, 쌍용을, 발레오를, 전북버스를, 현대차 비정규직들을, 콜트콜텍을 구해야 한다. 노동자와 민중을 구해야 한다. 우리에겐 승리의 희망을, 저들에겐 패배의 절망을 안겨주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이 꿈꾸는 사회를 짓밟고, 노동자와 민중의 꿈, 송경동의 꿈이 존중받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미국의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말을 했다. 이 멋있는 말을 차용하자. "달리는 희망버스에 중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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