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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신'이 아닌 '○○○'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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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신'이 아닌 '○○○'가 있었으니…

[2011 가을, 서동욱의 선택]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

<삼국지>, <공포의 외인구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홍루몽>, <금병매>, <초밥왕>, <로마 제국 쇠망사> 등. 인생의 여러 시기를 지나면서 읽어 본 길고 긴 책들이다. 이 모든 책들이 나름의 방식대로, 상황에 따라 나이에 따라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많은 기나긴 이야기들 가운데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장지연 옮김, 살림 펴냄)만큼 번개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돌듯 장엄한 세계를 순식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돌파한 책은 없다. 네 개의 장편 소설로 이루어진 4부작의 작품이며 국내에서 번역된 판본으로는 여섯 권이나 된다. 어느 해 여름, 길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잠시 동안도 참지 못하고 이 책을 펼쳐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거 성경에 나오는 얘기잖아?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이 누명을 쓰고 3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화려하게 재기하는 얘기잖아? 다 아는 얘기가 뭐가 재미있다고 읽나?

▲ <요셉과 그 형제들>(전6권, 장지연 옮김, 살림 펴냄). ⓒ살림
이렇게 생각하고서 이 책으로부터 발길을 돌린다면 엄청난 불행이다. 인간은 독창적이지 못하다. 그는 베껴 쓰고 베껴 쓰고 표절하고 표절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으며 매일 잠들기 전 같은 이야기를 또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그렇듯 인류는 낯익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싶어 한다. 사랑, 질투, 증오, 희생, 죽음……즐겨 소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온 이 모든 주제들을 최초로 작품화한 이는 누구인가? 모두 기원 모를 태고에 있었던 이야기이며, 인류는 이전 이야기를 자신의 시대에 구두점 몇 개 바꿔 반복할 뿐이다. 이 소설의 핵심에서 울려 퍼지듯 "인생이란 앞서 간 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 점에선 <성경> 역시 마찬가지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의 수많은 신화가 살해당한 후 3일 또는 3년 만에 부활하는 자의 이야기를 반복한다. 우시르 신화가 그렇고 탐무즈 신화가 그러하며, 가장 최근의 복제품인 예수의 부활 이야기가 그렇다. 감옥에 떨어져 죽은 자처럼 되었다가 이집트의 재상이 된 요셉의 이야기도 이런 유의 이야기에 속한다.

태고 적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수많은 문화가 다시 이어받아 반복하는 이런 인류의 습성을 이 소설은 "변형된 본받기"라 부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요셉 이야기 이전의 신화들과 이후의 신화들을 모두 드려다보며, 도대체 인간 정신은 어떤 이야기 구조에 매료되어 왔으며, 어떤 이야기를 둥지 삼아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태초 이래 인간 정신의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드려다 보게 되는 것이고, 인류가 고안한 모든 이야기들의 종합 세트와 만나는 것이다.

물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철저히 고증하는 토마스 만의 이야기 방식이 옛이야기가 추상성 속에 칩거하는 것을 막아내고 생동감을 주어 독자의 눈이 행과 행 사이를 경사면에 버려진 구슬처럼 속절없이 굴러가게 만든다. 토마스 만은 지독한 공부를 통해 지식을 쌓고서 그것을 소설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보기 드문 작가다. (이런 작가로 플로베르, 유르스나르, 핀천, 투르니에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그는 언제나 자기가 다루는 이야기를 위해 최고의 지식과 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준비하고 있다. 폐병 환자의 요양소를 배경으로 하는 <마의 산>을 위해서는 의학을, 미친 음악가를 내세워 독일 정신을 탐구하는 <파우스트 박사>를 위해서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그리고 <요셉과 그 형제들>을 위해서는 고대 서남아시아와 이집트 문명에 대한 광범위한 학문을 섭렵했다.

이렇게 준비된 소설은 공부도 않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겨우 짜낸 이야기가 재미와 감동 그리고 문학적 의의라는 스트라이크 존으로 우연히 들어가길 기대하며 던지는 뻔뻔한 피칭과는 질이 다르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마스 만을 통해 정말 이집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요셉을 유혹했던 이집트 장군의 아내가 "나랑 자자!" 하는 원색적인 유혹의 쪽지를 이집트 상형 문자로 어떻게 썼는지, 이 상형 문자를 바라보며 요셉이 어떤 사색을 하는지 어제 휴대 전화에 뜬 애인의 심란한 문자보다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고증과 지식으로 무장한 '사실주의'가 어떻게 '사실'이라는 착시 현상을 요술처럼 만들어내는지 토마스 만보다 잘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 소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선입견 역시 경계하고 싶다. 이건 특정 종교에 대한 이야기잖아? 난 신앙도 없는데 이런 이야기 읽어서 뭐해! 하며 돌아선다면 그 또한 큰 불행이리라. 이 소설에는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만이 들려오며 신의 이념을 머릿속에 넣고 굴리는 인간의 사색만이 있다. 이 소설은 신이 존재하는지 않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신 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의심 같은 심리적인 고민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토마스 만은 말한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성장하였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바로 신의 위대함이란 인간 정신의 성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신의 초현실적인 등장이 아니라, 인간의 특별한 습성 가운데 하나인 신의 이념에 대한 몰두가 어떻게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인간의 정신을 성장시키는지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바로 이것이리라. 장대하고 위대한 이야기! 근데 이걸 지금 뭐 하러 읽어야 하지? 왜 내 삶에 이 이야기가 개입해야 하는데? 소설의 기본인 '재미'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으련다. (이것은 음식 평론가가 자기가 소개하는 음식의 특징으로 '정말 맛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썰렁한 일이리라. 또 재미있는 이야기란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맛난 음식처럼 저절로 파리 떼를 끌어당기는 법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일이 삶에서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을 체험하게 해준다면, 수많은 심연들 가운데 이 소설과 관련하여 내게 중요하게 보이는 두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파시즘 속에서의 대중 심리' 그리고 '익명성을 통해 누리게 되는 해방.'

이 소설은 독일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쓰였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해 가고 토마스 만이 국적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망명하던 시기가 이 소설의 비단이 짜이던 베틀이었다. 당연하게도 독일인의 최악의 시기에 유대인의 가장 아름다운 신화를 노래하는 이 상징적 작업 안에는 파시즘 속에서의 대중 심리에 대한 토마스 만의 쓰디쓴 체험이 숨겨져 있다.

그런 관점에서 다음의 짧은 에피소드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요셉에 대한 구애를 거절당한 후 이집트 장군의 아내가 그를 무고(誣告)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설에서는 이 무고가 대중 선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집트인들이여. 강과 검은 땅의 아들들이여!" 여자가 집안의 하인들에게 소리친다. 어떻게 그녀의 절규는 작용하는가? 그녀가 이집트인들로 각성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며 거의 대부분은 좀 술에 취해 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을 부르는 여자의 고함과 함께 그들은 자신의 출신 배경을 생각하게 되는 동시에 파괴해 버려야할 적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정당성을 보장해줄 진리의 편에 서고 싶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 흔히 주위의 눈치를 본다. 그때 선동자는 그들을 진리의 이름 아래 안전하게 보호해줄 집단적 명칭과 함께 그들의 정당성을 증명해줄 희생물을 함께 제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쉽게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는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만만한 적도 있고, 휩쓸려 들어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동료의 무리도 있으며 혼자서 어려운 사색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파시즘의 최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마도 제3제국에서 추방된 토마스 만 자신이 저 이집트인들 앞에 선 요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저주받은 정치적 수법은 시간을 건너와 우리 곁에서도 검은 발톱을 지닌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아울러 토마스 만의 이 소설은 오늘날 철학과 문학이 겨우 가닿고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 바로 '익명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경탄하게 만든다. 조연호, 황병승, 김경주, 이근화, 김지녀 등 최근 한국 시인이 그들의 시에 대한 체험을 통해 우리 삶을 정체성을 지닌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향하도록 하는 자유의 땅이 익명성이다.

그런데 바로 <요셉과 그 형제들>의 긴 이야기가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것이 익명성의 구현을 향한 노력인 것이다. 이 소설은 말한다.

"'진짜'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인간이 '자신'이라 하고 '나'라고 하는 자아가 정말 그렇게 자신의 시간적, 육체적 경계선을 결코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 응축되어 있는 어떤 것일까? 자아의 성분에는 혹시 이전 세상과 자신의 외부에 속하는 것이 많이 있는 건 아닐까?"

이러한 토마스 만의 의심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래 자신의 고유한 에고 확립을 위해 노력한 모든 사상을 위험하게 만든다. 고유한 자아의 수립이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힘들이 장애 없이 들어와 '나'라는 명칭을 공중변소처럼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두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코기토를 깨뜨리는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읽어낼 뿐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주장을 읽는다. 순수한 혈통, 가문, 민족, 성별의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경과 각종 장벽 밖의 익명의 다수가 들어와, 배타적으로 보호받아온 고유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하며 이 소설은 우리 시대의 소설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가슴을 울리는 단 한 마디 결론이 없다면, 파시즘을 고발하고, 고립적인 자기 정체성 수립이라는 근대 철학의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이 소설의 과업은 그토록 힘차게 비상하지 못했으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이집트에 팔아넘긴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기를 바란다니! 제가 어디 신과 같은 존재입니까?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용서가 거론되어야 한다면, 용서는 오히려 제가 여러분께 청해야겠지요."

이 소설은 남이 자신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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