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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김진숙'을 가르쳐 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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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선생님, '김진숙'을 가르쳐 본 적 있나요?"

[변방의 사색]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 우리에게 알려진 일본의 반핵 운동가 중에 히라이 노리오(平正憲夫)라는 분이 있다. 배관 전문가로 핵발전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면서 거듭된 내부 피폭으로 암을 얻게 되었고, 남은 짧은 생애를 반핵 운동에 투신한 분이다.

이 책을 읽으며 히라이 노리오가 죽음에 임박해서 남긴 편지에 등장하는 한 예화가 여러 번 떠올랐다. 그가 홋카이도에 있는 토마리 핵발전소에 이웃한 교와쵸에서, 교원노조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겪은 일이다. 강연 후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울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오늘밤 이 모임에 온 어른들은, 거짓말쟁이들이에요. 저는 그 얼굴을 보러 왔어요. (…) 저는 도마리 원전 바로 근처에 있는 교와쵸에 살면서, 24시간 피폭 당하고 있어요. 저도 여자예요. 적당한 나이가 되면 결혼도 하겠죠. 저, 아이를 낳아도 되는 건가요?"

소녀의 이야기는 참가한 이들의 가슴에 아프게 박혀왔다. 그 소녀가 다니는 학교 교사들도, 그의 담임교사도 그 자리에 와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이제 와서 이런 집회를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어른이고 아이가 있다면, 목숨을 걸고 몸을 바쳐서라도 원전은 막았을 거예요. 이제는 두 번째 원전이 생겨서, 저는 지금까지의 두 배의 방사능을 맞고 있어요. (…) 여자애들끼리는 일상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낳을 수 없을 거라고."

히라이가 "그런 고민을 엄마나 선생님께 말씀드려 본 적 있니"라고 물었더니, "말씀드린 적 없다"고 했다. 소녀의 담임교사도, 다른 교사도 학생들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경상남도 양산의 고리 핵발전소에서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부끄럽지만, 후쿠시마 사태를 겪으면서야 핵 발전의 가공할 위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히라이의 글을 읽으며, 특히 소녀의 저 절규가 깊이 남았다.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추궁당하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딴에는 핵발전소 문제에 관해 공부했고,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쳤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태를 이 정도로라도 받아들이는 교사도 별로 없어 보였다. 아직은 막연했을 것이고, 이 문제를 아이들에게 가르쳤을 때 다가올 여러 복잡한 상황들이 귀찮고 싫었던 것이리라. 기이하게도 후쿠시마 사태에 관해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차원에서 늘 해오던 '공동 수업' 제안조차도 없었다.

그 사이 학교행정망으로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수시로 공문을 보내왔다. 아이들에게 '원자력 안전'에 대해 홍보해 달라고, 이 사태에서 우리나라에게는 별다른 위해가 없으니 안심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교사들이 아이들의 질문에 대해 '엑스레이, CT 찍는 것보다 해가 작다'는 식으로 답변했다고 한다.

핵발전소 증설 문제 그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핵 발전으로 가능하게 된 이 광란의 에너지 소비에 대해서도 별다른 문제제기가 이끌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사태를 통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것이다. 많은 부분 학교 교육의 책임이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순간, 우리는 저 소녀의 날카로운 절규 앞에서 마주 서게 되리라.

"그때 당신은 무얼 했었나?"고 물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때는 몰랐다"고 말해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을 상황이 반드시 도래하리라.

학교의 모순과 허위 앞에서 솔직하자!

▲ <교사로 산다는 것>(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양철북 펴냄). ⓒ양철북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은 국내에 소개되는 그의 세 번째 저작이다. 처음 그의 약력을 보았을 때 판에 박힌 듯 드라마틱해서 좀 식상하기까지 했다. '하버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했던 전도유망한 백인 청년이 스스로 보스턴의 흑인 거주 지역의 형편없는 초등학교 교사를 자원하고, 이로부터 40여 년간의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써서 저명한 문필가가 됐고, 지금은 진보적인 교육 운동가로 미국에서는 놈 촘스키만큼의 명성을 얻고 있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젊은 교사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야만적 불평등>(문예출판사 펴냄)을 읽고 나니 그에게 큰 절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이들은 모두 미국 교육의 가장 큰 질곡, 인종 분리와 빈곤 문제를 겨냥하고 있었고, 풍부한 현장 경험과 날카로운 관찰력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저작이었다. 과문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정도의 문제의식과 깊이를 갖춘 책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30년 전 출간된 그의 초기 저작이다. 학교 교육을 관통하는 보수 우익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다루고 있다. 1970년대 닉슨 이후의 반동적 기류가 미국을 휩쓸던 시기에 느낀 위기의식과 분노가 그로 하여금 이 책을 쓰도록 자극한 듯하다.

코졸의 통렬한 언어들, 앞뒤 재지 않고, 직선으로 내리꽂는 이야기들이 시원시원하기만하다. 그는 교사들에게 우선 아이들에게 공교육 학교의 실체에 대해 '솔직해지자'고 말한다. 학교란 위선과 기만으로 지탱되는 국가 기관임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학교의 존재 목적이란 애리조나 주 교육위원회가 솔직하게 표현하듯, '이 나라가 문명 세계의 선망의 대상이자, 인류의 마지막 희망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는 또한 '부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적은 경비로써 목적을 달성케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간 유형, '낮은 사고력과 높은 애국심의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복잡한 전략 회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코졸은 지적한다. 그저 학교에 십수 년간 붙잡아 놓고, 공부로써 경쟁시켜 놓으면 십수 년 뒤에는 그들의 기대대로 '낮은 사고력과 쓸데없는 애국심'으로 치장한, 절대로 지배자에 맞서 단결하지 않는 이기적인 존재가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다. 이 모든 학교의 위선과 기만을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자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1인칭으로 존재하기, 중립적인 척 객관적인 척 하지 말기

조너선 코졸은 교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신봉하는지를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둑질을 가르치고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교사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거짓 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교단에 로봇을 세우지 않고 사람을 세운 이유가 아니겠는가.

아이들 또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행동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일인칭'으로 이 세계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인칭으로 존재하고, 살아가고,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외국 마을에 폭탄과 네이팜탄 발사 버튼을 누르는 완벽한 일꾼이 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아이들에게 '제3의 입장을 찾아보자'느니, '극단을 경계하자'느니 따위 어설픈 소리를 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중도에 가까울수록 진실하다는 사고방식, '양 극단'에는 늘 끔찍한 무언가가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실은 이 체제를 유지시키려는 기득권자들이 전매 특허로 유포해 온 고약한 언술임은 어디든 다르지 않다.

우리의 경우에도, 1970년대 전태일이 그러했고, 조선 말기 동학 농민군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안중근과 유관순이 그러했듯, 갈지자로 걸어온 우리 역사가 이나마 진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극단의 고통에 대한 이러한 개인들의 극단적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단적 시련에 맞선 극단적 반응은 때로 인류의 고통에 대한 고결한 인간들의 유일하게 윤리적인 반응"이기도 했던 것이다. 교사들이 중립적인 척, 객관적인 척하면서 드러내는 완곡한 표현들은 인내와 절제의 상징이 아니라 문젯거리를 만들지 않고 그저 무난하게 이 상황을 넘어가려는, 무기력과 안일의 적극적인 표현일 뿐이다.

언젠가 이 지면에서도 털어놓은 적이 있지만, 지금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을 아이들에게 소개시켜준 적이 있었다. 쉽지 않은 자리였지만, 아이들은 그의 강연을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정신없이 몰입해서 들었다. 그리고 노동 문제에 관한 책도 읽었다. 그리고 몇 녀석이 대학에 내는 자기 소개서에 고교 시절 가장 인상적인 체험으로 '김진숙과의 만남'을 적었다.

교사 생활 중에 가장 뿌듯하고 보람 있었던 순간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 대한상공회의소 등이 돈을 대는 <아하 경제>라는 경제 학습 신문도 그렇고 매일경제신문, 한국경제신문 따위가 발행하는 청소년용 신문은 매주 학교에 그득그득 쌓여간다. 극보수 이념과 노골적인 친기업 반노동자성 기사로 범벅이 된 그 신문들은 넘기다 보면 기가 찰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교사인 나는 왜 아이들에게 김진숙을, 비정규직과 정리 해고 문제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코졸은 교사들이 더 깊이 공부하여 양 측 모두에 관련된 자료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반대 의견을 개진할 너그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놓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믿고 따르는 견해를, 때로 극단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 견해를 솔직하게 표현하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교육적인 교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검인정 교과서에 기술되고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며,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온 메시지"인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여학교에서든 봉건적 여성상을 상징하는 신사임당의 동상이 서 있듯이, 미국의 교과서에서 다루어지는 여성 영웅이란 이를테면 조지 워싱턴의 부인, 아브라함 링컨의 부인, 혹은 조지 워싱턴의 부탁으로 미국 국기를 제작한 재봉사 베치 로스 같은 이들이다. 그리고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나 그들의 행적은 철저하게 거세된다.

이를테면, 미국의 학교에서 헬렌 켈러는 '보는 법을 배웠다'고 가르치지만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신실한 사회주의자이자, 세계의 비참과 미국의 불의에 맞서 일평생 싸웠던 투사였지만 이런 사실은 전혀 가르쳐지지 않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불복종 운동의 선구자이지만, 그는 오직 <월든>에서 뽑아낸 자연과 숲, 시냇물에 관한 영감어린 에세이의 작가로서만 가르쳐진다.

결국 헬렌 켈러와 소로우의 진면목을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몫인 것이다. 물론 그는 공교육 학교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양보는 필요하다고 본다. 급진적 흑인해방 운동가인 말콤 X를 가르칠 수 없다면, 이 체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마틴 루터 킹의 알려지지 않은 진면목을 가르치는 것이다. 미국의 빈곤과 애국주의에 맞서 일생토록 투쟁하고 실천한 아나키스트이자 가톨릭 노동 운동의 지도자인 도로시 데이를 가르칠 수 없다면 대신 헬렌 켈러의 진면목을 가르치는 것이다.

모든 영웅적인 인물은 박제화된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조너선 코졸은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는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은 실은 링컨 자신의 신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음을 가르쳐야 한다고 코졸은 주장한다. 그것이 링컨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링컨이 여러 차례 밝힌 그의 지독한 백인 우월주의는 당시 백인들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었으며, 인간적인 나약함과 허위의식 속에서도 '정직한 에이브'로 살고자 애썼던 그의 행적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링컨의 삶에 대한 진정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코졸은 믿고 있는 것이다.

코졸은 아이들에게 직접 역사책을 쓰도록 가르친다. 오늘날 역사 교육이란, "보통 사람은 느낄 수도 없고 살아낼 수 없는" 그저 왕조 교체의 연대기이자 전쟁의 기록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신 역사책쓰기를 통해 '자신의 입장'에서 직접 서술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을 자기화된 해석으로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비판이 곧장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학교에서 유통되는 모든 교재들과 텔레비전, 신문과 잡지를 가리키며 '저건 뭐냐'고 되물으면 될 것이라고 코졸은 말한다. 그러면 또 이런 비난이 들어올 것이다.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가르쳐서야 되겠냐'고. 그러나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현대 세계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고, 제3세계의 독재와 비참에 큰 책임이 있는 나라가 아닌가.

이러한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쳤을 때 아이들에게 닥쳐올 죄책감은 또한 한 사람의 정직한 미국 시민으로서 거듭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코졸은 "죄책감만이 건전한 반응일 수 있는 상황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한다. 신경증적인 구속이 아니라 반성적 행위로 인도하는 죄책감, 그것은 한 존재를 윤리적이고 강인하게 성장시키는 한 계기인 것이다.

코졸이 제시하는 최종의 결론은 '행동'이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부적절한 자책감에 시달려야 할 이유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졸은 이런 거대한 문제에 맞선 '작은 행동'을 안내하고 먼저 시범을 보이는 것 또한 교사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체제 안에서 '불복종'으로써 버텨 나가기

확실히 교사들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두려움이야말로 이러한 악마적인 체제를 유지시키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는 베트남전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이른바 '미라이 학살'을 집행한 군인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도청을 자행한 자들의 법정 진술과 '묵인과 복종, 긍정적 생각을 찬양하는' 교과서의 서술들을 좌우에 놓고 비교해 보라고 권한다. 놀랍도록 유사한 표현들이 발견될 것이다. '나는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며, 그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 믿었다'는 식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재앙적 사태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묵인과 복종', '맹목적 애국심' 따위 무뇌아적 정서는 학교 교육이 가르친 것이다.

그가 불복종을 추구하는 것은, 불복종이야말로 진실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교사라면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졸은 이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학교 교육의 허위와 위선이 투영된 상징적인 의식으로 본다. 코졸은 묻는다. '과연 우리는 하나인가, 누가 우리를 하나라고 믿게 만드는 것인가' 라고.

과연 그렇다. 한진중공업 회장 조남호와 내가 어째서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가. 내가 조남호에게 '당신과 나는 같은 국민'이라고 말하면 그는 대단히 수치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코졸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우리는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국가에 살고 있지 않다. 자유와 정의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자고, 자랑스러운 이 나라의 애국자로 살아가자고 부추기는 일체의 맹세는 허위이다. 차라리 '갈가리 찢긴 이 나라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애국자는 누구인가. '세계 최고', '하나 된 우리' 따위 허위의식에 결박된 가련한 좀비가 아니다.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설명할 줄 아는, 불의 앞에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춘 사람이 애국자이다. 코졸의 표현을 빌자면, '이 나라의 모든 선행과 악행에 관한 지식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악을 근절하지 못해 안달하고, 선을 강화하는 일에 열성적인'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코졸과 다른 비판적 교육학자들은 갈라진다. 많은 경우, 그들은 근대 교육의 근원적 불모성을 지적하면서 체제의 바깥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너선 코졸은 바로 '지금 여기, 바로 이곳에서' 저항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교육을 지탱하는 물적 근거는 민중의 세금이다. 그러나 민중의 자녀들은 의무 교육의 장으로 끌려 나와 배움의 기쁨을 오히려 빼앗기고, 이기심과 복종과 묵인이 골수에 박힌 '비전 없는' 존재로 빚어진다. 그리고 절대 다수는 학교 교육을 통해 '사회적 실패자'로 확정되어지고 만다.

이에 대한 코졸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정직한 한 인간으로 존재하자는 것, 할 수 있는 한 불복종하고 힘을 모아 싸우자는 것이다. '분노와 비난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공립학교에서 우리의 권한으로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교훈'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땅으로 되돌아온다. 지금 한국 사회는 조너선 코졸이 절망했던 1980년대의 미국 사회 이상으로 전체주의적 질서가 굳건하다. 오늘날 한국 교육은 청와대와 보수 언론, 그리고 전경련이 이끌어가고 있다. 민중의 세금으로 지탱하는 공교육에 돈 한 푼 대지 않은 자들이 이 교육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 저들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다.

조너선 코졸이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던지는 조언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일 뿐이다. 그러나 용기는 실존적 결단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용기는 가녀린 것이며, 쉽게 휘발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불복종의 탁월한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 그의 행동은 단 하루의 감옥 체험으로써 완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사는 학교에서 평생을 버텨내야 한다. 결국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깨 걸고 다독여가며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공동체, 그러나 전교조를 포함하여 교사 집단 속에 존재하는 저항과 연대의 공동체는 거의 괴멸되어가는 상태다. 전교조는 날로 늙고 지쳐가고 있다. 교사 집단은 안락주의와 중산층의 계층성에 깊이 함몰되어 있다.

새롭게 교단으로 진입하는 신규 교사들은 살인적인 경쟁을 뚫어낸 '시험의 백전노장'들로 채워진다. 그들에게서 독립적 지성인으로서의 자질과 사회적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코졸이 이 책에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한 상식적인 주장들은 '주어진 현실을 지나치게 넘어서는, 예언자의 외로운 비전'으로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높다.

조너선 코졸의 이 책이 주의 깊게 읽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놓아서는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맨 끝에 인용된 예브게니 옙투센코의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알게 된 오류를 용서해서는 안 되네
그냥 두면 반복되고 늘어나
나중에 우리 학생들은
우리가 용서했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이 글 들머리에서 인용한 홋카이도 소녀의 날카로운 외침은 바로 지금 이 땅의 교사들에게 던져지는 것이기도 하다. 가르치지 않은 것이, 굴종과 침묵이 곧 죄악이 되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 교육의 장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분노를 가르치는, 단 한 명의 교사가 지금 필요하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고, 교사로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탄하는 이들이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느낀 만큼 공부하고 행동하기를 권한다. 그렇게 한 걸음씩 전진하면 되는 것이다. 한탄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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