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안 된 아들과 젊은 아내를 남기고 서른 두 살의 계약직 토목 기사는 타설해 놓은 콘크리트 더미 속으로 빠져 숨졌다. 밤낮 없이, 주말도 없이 일하던 뒤끝이었다. 그곳은 경상북도 의성 낙단보였고, 같은 시간 바로 옆 공구인 경북 상주에서는 대통령이 내려와 4대강의 자랑찬 미래를 역설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건만, 오직 한 사람의 닦달로 완공을 향한 밤낮 없는 공사가 이어진다. 안전판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안타까운 죽음이 속출한다. 벌써 열아홉 명째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다. 오만과 착란을 다스리는 것은 시민들의 매서운 행동일 테지만, 운동은 이미 깊이 지쳐있다.
정권 말기지만, 저들이 맘먹은 대로 되지 않은 일은 없다. 끔찍한 일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건만, 가수들 식은땀 흘리며 부르는 노래에 점수나 매기면서 필부들의 나날은 흘러간다.
진보 진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들은 하나는 '통합'이고, 둘은 '복지'이고, 셋은 '싱크 탱크'다. 통합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 공학일 것이고, 복지는 그 선거 때 풀어낼 선물보따리일 것이며, 싱크 탱크는 선거라는 메뉴판을 꾸미는 자들일 것이다. 내가 오래 전 읽었던 하워드 진(1922~2010년)을 떠올린 것은, '<슈퍼스타K> 방식으로 진보적 정치 엘리트들을 경쟁시켜서 검증받게 하자'는 어느 미국학 교수의 칼럼을 읽은 뒤였다. (☞관련 기사 : '슈퍼스타K2'처럼)
반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미국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고개 조아릴 세계적인 진보 지식인 하워드 진의 자서전에는 놀랍게도 선거와 정치 엘리트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그 자신, 미국 사회의 싱크 탱크들과, 혹은 정치계의 유력자와의 접촉이 없었을 리 없겠지만,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살아온 그의 긴 생애에서 선거로 인한 정권 교체에 대한 판단이 없을 리 없겠지만, 300쪽이 넘는 그의 자서전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는 오직 '행동'에 대해 말할 뿐이었다. '진보적 정치 엘리트들의 <슈퍼스타K>'를 제안한 그 미국학 교수는 하워드 진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고, 그런 옹졸한 심사로 나는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듯 나는 깊은 위로를 받았고, 나의 뒤틀린 심사는 누그러들었고, 사진으로밖에 본 적 없는 그가 그리워졌다.
"운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살아남았다!"
▲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이후 펴냄). ⓒ이후 |
"가장 무도회 복장에 바보 같은 모자를 차려 입고, 새해가 시작되는 순간에 맞춰 '올드랭 사인'을 부르는 사람들 속에 웨이터 차림으로 서 있던 내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사춘기의 자화상이었고, "새해가 시작되어도 아무 기쁨도 없이 테이블을 치우던 아버지의 긴장된 얼굴 표정"을 쓸쓸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가 뒤틀리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부모가 자애로웠고, 선량한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받아낼 기약이 막연한 것을 알면서도 외상을 해 준 구멍가게 주인, 진료비도 받지 않고 몇 년 동안이나 소년 하워드 진의 구루병을 치료해준 친절한 의사, 군 복무로 신문 가판대 운영권을 얻어 형님네 식구가 집세를 못 내서 고생할 때면 돈을 빌려준 삼촌까지, 서로 돕고 사는 착한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신문 쿠폰을 모아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구해 읽었고, 읽고 난 뒤에는 반드시 혼자만의 독후감을 썼다. 그는 10대에 이미 사회주의적 이상을 동경했다. 그리고 그는 열일곱 나이에 처음으로 시위라는 것에 참가하게 되었고, 경찰에게 곤봉으로 흠씬 얻어맞는다. 이 불세출의 행동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거기서 받은 충격을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순간 이래로 나는 이제 더 이상 미국 민주주의의 자기 교정적 성격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나는 급진주의자가 되었으며, 이 나라는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어마어마한 부와 나란히 존재하는 빈곤, 흑인들에게 대한 끔찍한 처우만이 아니라 그 뿌리에서부터 썩어있다는 사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대통령이나 새로운 법률이 아니라 낡은 질서의 근절과, 협력적이며 평화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의 도입을 필요로 했다. (…) 작지만 의미심장한 이 사건을 통해 나는 우리의 삶이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으며, 우리의 머리가 다른 사고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관조하는 자에게는 한없이 복잡하고 섬뜩한 진실을 그는 행동을 통해 이렇게 몸으로써 명쾌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파시즘과 맞서 싸우려는 열망으로 몸이 달아 자원 입대했고, 폭격수로 훈련받고 나서 실전에 투입되었다. 거기서 그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된다.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던 프랑스 주둔 독일군에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수많은 프랑스 인민들을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울부짖게 한 이 폭격의 실상에 대해 3만5000피트 공중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그 자신이 알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종전 이후 그곳을 방문하고 면밀한 자료 검토를 통해 깨닫게 된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그가 수행했던 임무란 '또 한 번의 승리가 필요했던' 권력자들의 필요로 생겨난 것이었다. 오직 부자와 권력자들의 필요에 의해 조종되는 전쟁의 실체를 깨달은 것이다. '미국은 파시즘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맘대로 세계를 주무르기 위해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갈파하고 있었던 그의 동료는 죽었고, 폭격수 훈련생 시절 단짝이었던 두 명의 벗들 또한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죽었다. 그는 브레히트의 시구처럼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에 살아남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는 절망할 권리가 없다'고 뇌까리게 되었던 것이다.
'행동'의 세계와 만나다
제대군인원호법의 도움으로 역사학 학위를 마친 그는 특별한 생각 없이 일자리 때문에 남부 조지아 주의 흑인 여학교인 스펠먼 대학으로 갔고, 거기서 남부의 흑인들에게 가해지는 전율스런 고통과 만나게 된다. 노예 해방이 선언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1950~60년대 남부의 흑인에게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흑인 남성을 곤봉으로 때려죽인 보안관은 무죄로 방면되고, 얼마 뒤에는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된다. 백인 전용 인큐베이터에 넣을 수 없어 흑인 산모의 쌍둥이 아이가 죽는다. 흑인에 대한 폭행에 항의하는 흑인 변호사에게 보안관이 지팡이로 머리를 때려 피투성이로 만든다. 흑인 린치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민권 운동가는 잔혹하게 암살당한다.
이런 곳에서 그는 흑인들의 편에 선다. 흑인 학생들과 '식당의 백인 좌석에서 앉아 있기', '기차의 백인 좌석 차지하고 앉아 있기' 따위의 일들에 함께 한다. 그리고 흑인 민권 운동가들의 도우미로 야만과 비참이 넘실대는 미국 남부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든다. 결국 대학에서 해직당하지만, 르포나 보고서로써 남부의 상황을 전국적으로 중계하는 역할까지 한 가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30년이 흐른 뒤 쓰인 자서전에서 그는 그때 만난 흑인들의 이름과 그들의 행동, 삶의 이력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그 기록들 속에서 그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그들의 선량함과 헌신성이다. 기억에 남는 한 대목이 있다. 흑인들에게는 '사람 죽이는 주(州)'로 불리던 미시시피 주 그린우드에서 흑인 유권자 등록 운동을 도울 때의 일화다.
활동가들의 숙소가 꽉 차 잠자리가 없으니, 누군가가 흑인 부부의 집을 소개해준다. 남편은 부두 노동자로, 아내는 가정부로 일하는 가난한 집이었다. 새벽 3시에 들이닥쳤건만, 이 흑인 부부는 매트리스를 끌어다 주고, 자신들은 바닥에서 잔다. 아침에 깨어나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고,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안주인의 기도 소리였다.
그 날은 이 도시의 흑인들에게는 몇 백 년 동안 없었던, 역사적인 '행동의 날'이었다. 여차하면 자신들을 향해 총구를 겨눌 주방위군과 깡패와 다름없는 보안관들이 둘러싼 곳에서,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하루 종일 긴 줄을 서서 백인 관리 앞에서 '유권자 등록'이라는 시위를 하기로 되어 있는, 실로 긴장된 날이었다. 하워드 진은 여인의 기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틀녘에 깨어나 보니 희뿌연 어둠 속에서 친구들이 아직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소리에 잠을 깼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소리가 들렸고, 부드럽게 되풀이되는 여자 목소리, 맑은 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오 주여, 오늘도 모든 일이 잘 되게 하옵시고, 주여, 오, 그들이 보게 하소서, 주여, 오늘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여, 오, … 오랜 시간이었나이다, … 오… 주여, 오… 주여."
하워드 진은 이 기도를 굳이 기록하고 있다. 몇 백 년을 노예로 살았지만 잃지 않았던 그들의 가난한 마음과 고결한 영혼을 증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나는 짐작해 본다. 그들은 옹졸한 에고이즘에 젖어 무참한 폭력을 휘두르는 남부의 백인들을 이미 정신적으로 극복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민권 운동이란 그 승리를 확인하는 한 방식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1964년 이래, 베트남전 문제가 십수 년간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초창기 반전 운동은 대오도 빈약했고, 우군도 없었다. 반전 운동가들에게 우익 깡패들은 빨간 페인트를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모두가 두려워했고, 주저하고 있었다. 이런 시절에 그는 가장 단호하고 급진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1967년 <철군의 논리>를 통해 반전 운동에 불을 지폈고, 숱한 매도와 폭력에 시달리면서, 심지어 FBI의 도청과 미행 속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활약 무대도 넓었다. 일본의 평화 운동가들과 함께 탈영한 미군 병사를 도피시키는 일을 도왔고,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군 포로 석방의 당사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국방성의 기밀문서를 폭로하는 일에 함께 했고, 수배 중인 활동가들을 숨겨주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강연했고, 집회 연단에서 연설을 했다. 위험 인물로 낙인 찍혀 냉대 받았고, 테러 위협에 시달렸으며, 때로 유치장 신세를 졌다. 그는 정밀한 문헌 검색을 통해 베트남전의 실체를 폭로했다. 이를테면 '주석, 고무, 원유' 이 세 단어로 거듭해서 되돌아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비밀 메모를 폭로하면서 그는 '자유, 민주주의, 자결권'을 지켜주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베트남전의 명분이 완전한 허위임을 밝혔다.
하워드 진은 확실히 미국 사회, 제1세계의 지식인으로서는 유례없는 존재였다.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그의 저작 <미국 민중사>는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야만적인 정복자에 대한 분노의 시위'로 얼룩지게 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가 한 명문 사립고등학교에서 강연할 때, 미국이 역사 속에서 저지른 죄악상을 열거하는 그를 강연 내내 노려보던 한 소녀는 강연 후 그에게 다가와 분노에 찬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이 나라에서 살고 계시는 거죠?" 하고.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조국, 그리고 국민이지 어쩌다 정권을 잡게 된 정부가 아니'라고. 그것은 하워드 진이 진실을 부여잡을 수 있었던 핵심적인 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면서, 그 어떤 미국인도 벗어날 수 없었던 '세계 최강 대국의 성원'이라는 허위의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변화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한 사람이 어찌 그 시대의 야만을 다 감당해낼 수 있을까. 그렇게 풍찬노숙의 세월을 보내지 않고, 한 사람의 진보적인 정치 엘리트로서, 의회와 국가 권력에 진출하여 정책 방향을 전환하는 일에 개입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활동이 되지 않았을까. 분명 그에게도 자리했을 이런 번민에 대해서는 그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현자(賢者)'였다고 생각한다. 그 또한 운동의 한계를, 직접 행동의 나약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 변화하는 근본적인 핵심을, 거기에 참여하는 운동의 비밀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야만의 시대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그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보다 훨씬 고단하고 위험했으며 숨 가빴던,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끝머리에서 뇌까리는 말을 들어보자.
가난과 인종 차별에 대한 최후의 승리가 여전히 멀리 있었고, 아니 아마 불가능할 정도로 멀리 있었겠지만, 미시시피가 이제 결코 전과 같지 않게 될 여름이었다. 운동 안에서든, 밖에서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운 여름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었다. (…)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SNCC(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 하워드 진이 함께 한 흑인 민권 운동 조직) 사람들의 재회 모임에 참석해서 함께 노래하고 얘기할 때마다, 모두가, 서로 다른 식이긴 하지만 같은 얘기를 했다. 남부의 운동에서 보낸 그 시절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서 얼마나 최고의 나날이었던가. (강조는 인용자)
그가 이 책 전편에서 던지는 '희망'과 '낙관'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온 선배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 후배들에게 던지는 격려의 덕담만은 결코 아니다. 세상의 이치가, 인생의 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이 나라로 돌아오자. 내가 보기엔, 지금 진보 진영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이란 결국 '어쩌다 권력을 잡게 될 정부'와 그 일원이 되고 싶어 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자기암시에 불과한 것 같다. 정치 공학이, 혹은 민중들에게 풀어줄 선물보따리가, 싱크 탱크 속에 속한 정치 엘리트들이 우리들의 삶을 과연 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인지, 거기에 어떤 자유의 공기가 해방의 기쁨이 틈입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신뢰할 수 없다. 시인 김수영이 뇌까리듯 나 또한 이렇게 중얼거리고 싶다.
"행동의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는 마음에 들지 않어라."
세상의 일들 앞에서 고통스럽고 우울한 이들에게 하워드 진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유강은 옮김, 이후 펴냄)를 권한다. 위로를 얻을 것이고, 용기가 샘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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