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사는 분당에도 '방사능 비'가 오고 있겠지. 그래도 고요한 밤이다. 2주마다 돌아오는 이 지면에, 이번에는 내가 이 밀양 땅에서 직접 보고 겪은 신공항 소동에 대한 감회를 풀어 놓고 싶었다. 그런데 좀처럼 첫 문장이 나아가질 않더구나. 너무 많은 상념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거야.
그러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났다. 이번 사태를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지켜본, 내겐 몇 남지 않은 고향 친구여서 그랬을 테지. 신공항 백지화가 발표되던 날, 네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었지. '우리 고향의 27개 산봉우리와 500만 평 농토를 죽음에서 구해준 이명박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썼던 것 같다.
그때 난 이상한 우울에 젖어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도 지난 몇 달간 여기서 보고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리고 박근혜가 신공항 바통을 이어받아 대통령 선거 때까지 끌어갈 생각을 하면 나는 또 마음이 울적해지곤 한다. 이 울적함의 상당한 부분은 무력감일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 딴에는 지역에서 함께 하는 분들과 이런저런 지역 현안들에 목소리도 높이고 행동도 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나도 그랬고, 다른 분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게 참 괴로웠다. 온 도시가 미친 듯 똘똘 뭉치는 분위기가 있었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바람을 잡고 모두가 동조하도록 강요당하는 강압적인 공기가 몇 달 동안 이 도시를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온 시내가 현수막으로 거의 도배되다시피 했고, 관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이벤트를 벌였는지, 관변 단체들은 또 제 세상을 만난 듯 얼마나 활개를 치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 사람들은 '잘 안 될 거라고' 예측들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2009년에 벌써 발표되었어야 할 후보지 선정이 세 번이나 연기되었던 속사정을 다들 짐작하고 있었던 것도 같고. 지역 언론들은 거의 보도하지 않았지만, 2009년 말 발표된 국토연구원의 용역 보고서에는 밀양이건 가덕도건 경제성이 없다고 (비용 대비 편익 지수(B/C) 1을 기준으로 밀양은 0.73, 가덕도는 0.7) 이미 백지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단 말이지.
이명박은 신공항으로 선거 때 재미를 톡톡히 봤지만, 책임질 형편이 안 되니 차일피일 발표를 미루고 있었던 것이었고, 덩달아 재미 본 정치꾼들은 대통령한테 떼쓰고 목소리 높이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최대한 그럴듯하게 빠져나가기 위한 출구 전략들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관에서 바람을 잡고 엄청나게 선전을 해 대니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뭔가 큰 패라도 잡게 되는 것처럼 단꿈에 젖기도 하는 것 같았어.
신공항 건설로 살던 곳에서 떠나야 하는 사람들, 공항 곁에 살면서 엄청난 소음 공해에 시달려야 하는 지역민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억눌렸다. 찬성 현수막은 온 천지에 도배가 되어 있는데, 반대 목소리를 담은 현수막이나 차량 스티커는 금세 떨어져버리고 말았어. 누가 했는지 모르게 그렇게 신속하더란다. 우리 시민단체들이 시장의 농민 폭행 관련한 성명서를 유인물로 만들어 신문 간지에 넣으려 했더니 신문지국에서 아예 받아주지를 않더란다. 이런 광기어린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말이야.
▲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 백지화되자 가덕도 신공항 유치에 찬성했던 시민들이 규탄대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
가치의 허무주의, 토건 광풍
역사는 우리가 지내온 이 30여년을 분명 '개발과 토건의 시대'로 규정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 '토건'이라는 표현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토건 광풍의 바탕에는 일종의 허무주의가, 가치로운 것들에 대한 깊은 경멸이 똬리 틀고 있는 것 같다. 푸른 산과 흐르는 강, 농토, 뿌리 내린 삶, 이런 게 밥 먹여 주냐고 핏대를 세우는 것이다. 돼지처럼 마구 살자는 것이다.
요즘 언론 보도를 보면 영남 쪽 사람들이 박탈감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가덕도와 밀양으로 나뉘어 서로 할퀴고 물어뜯던 지역 언론들이 요즘 한목소리로 쏟아내고 있는 이야기들도 종합하면 결국 '서울 너네들만 연년세세토록 푸지게 먹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살다 죽으란 말이냐' 하는 소리들이다.
이명박 정부의 노골적인 수도권 편향 정책을 생각하면 거기에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긴 하겠지. 그렇지만, 이 무슨 과장된 허세냐. 공항이 없어서 우리가 굶어 죽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대다수 서민들에게 공항이 들어서서 생기는 유익이란, 평생에 몇 번 비행기 탈 일 생겼을 때 굳이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일 뿐이지.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다. 내가 작년에 몇 달 동안 지역의 장애인 야학에서 교사 노릇할 때 알게 된 분이 있어. 그 분은 나이 든 어머니와 함께 사는 노총각인데, 장애인 몫으로 배정된 공공 근로 예산이 줄어드는 바람에 장애인 공공 근로에도 경쟁률이 5대1이나 되어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몇 달째 놀고 있다는 거였어.
신공항 유치 홍보한다고 쓰는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할 것인지 너도 충분히 짐작할 거야. 재정 자립도가 16%밖에 안 되는 기초지방자치단체가 뭔 돈이 있다고 포털 사이트 초기 화면에도 광고를 하더구나. 장애인들 생계와 직결되는 예산은 그렇게 함부로 줄여놓고서는 뭐하자는 수작인지. 정말 화가 나더라.
학교에서도 그렇다. 신학기에는 학비 감면 대상자를 선정하는 일이 참 갑갑하다. 신청자는 많은데, 인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담임인 나는 이 아이가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인지를 시시콜콜 적어 추천서를 써내야 한다. 부모들은 담임에게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를 하소연해야 한다. 세계 최빈국으로 아사자가 속출하는 북한에서도 무상 교육을 실시하는데,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에서 이게 무슨 꼴이냐는 거지.
창피한 일도 있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밀양 시장이 신공항 유치 반대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는 한 농민을 주먹으로 때리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한 사건이야. 본인은 절대로 때리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러면서도 아직 검찰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어서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폭언 녹취록이 공개되어서 대략의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었다.
'너 같은 시민 필요 없다', 'X만한 새끼'. '내가 때렸다, 어쩔래' 따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들을 퍼붓고 있더구나. 세상에, 선출된 공직자가 선출권자인 시민에게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있냐. 그런데,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지역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오히려 시장을 두둔하는 글들이 마구 올라오더구나. '시장님, 힘 내세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제대로 해 줄 텐데' 따위. 그런 소리를 내뱉는 인간들이 실로 가여웠고, 참을 수 없이 한심했다.
석유 정점, 토건의 황혼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저물고 있다. 이제 비행기를 지금처럼 편하게 이용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다. <녹색평론> 116호(2011년 1~2월호)에 실린 <장기 긴급 상황>(제임스 컨스틀러 지음, 갈라파고스 근간)을 소개한 번역가 이한중의 글에 잘 나오지만, 석유 생산이 지금 정점에 도달했거나 이미 정점을 지나지 않았느냐 말이다. 전 세계에 묻혀 있는 석유의 절반을 이미 다 써버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써 버린 절반은 '채굴하기 제일 좋은 절반,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정유하기 좋은 절반'이란 말이지. 남아있는 석유란 지난 번 BP가 멕시코 만에서 일으킨 대형 사고에서 보듯, 바다 밑까지 수천 미터(m)를 넘게 들어가야 뽑아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지. 지금 시대에 만들어진 사우디 속담 중에 이런 게 있다고 해. "내 아버지는 낙타를 탔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타고, 아들의 아들은 낙타를 탈 것이다."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4분의 1을 가진 사우디 사람들이 하는 농담이란다.
그런데 이 나라 정치인들은 나 같은 필부도 하는 예측은 꿈에도 해 보지 않는 것 같다. 석유뿐만 아니라 과연 2025년까지 영남권에서 1년에 1000만 명이 공항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 성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지금 어느 누가 앞으로 15년 동안 경제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예측하고 있냐 말이야.
너랑 술 마시면 만날 하는 이야기지만, 토건 광풍은 확실히 끝자락에 다다른 것 같다. 두바이가 지금 그렇게 주저앉고 있듯이, 한국의 두바이로 불리던 송도 신도시가 그러하고, 단군 이래 최대 개발 사업이라는 용산 역세권 개발이 그러하고, 지난 총선에서 수많은 '타운돌이'들을 만들어낸 뉴타운 개발이 그러하다. 지금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지고 있는 빚이 120조란다. 하루 이자만 100억을 넘는단다. 이건 누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냐. 이제 서서히 불이 꺼져가고 있다.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박근혜는 아마도 이명박이 그러했듯, 다음 대선까지 신공항 바람을 끌고 가려 할 것이다. 이 소동을 또 겪어야 하나 싶어 마음 무겁지만, 이제 나는 그따위 정치 놀음에 사람들이 속든, 속지 않든, 이제는 관심 없다. 재미 볼 사람들은 재미 보라 그래라. 세상이, 이 강토가 자기들 것인 양 저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데, 그렇게들 살라고 하지 뭐. 다만, 그 죗값은 언젠가 치르게 되겠지.
나는 이런 소동이 재현되어도 이번처럼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해 본다.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하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가망 없는 짓이라는 것을, 이로 인해 쫓겨나고, 사라져야 하는 힘없는 것들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먼 곳에 살지만 고향의 일이니 그때는 너도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지호야. 신공항 소동을 몇 달 간 겪은 실감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정신이 뿌리째 뽑혀버린 것 같다. 광풍이 휘몰아칠 때 시내에서 1인 시위도 못하면서, 다 끝나고 난 뒤 지면에서 털어놓는 내가 부끄럽구나. 이런 넋두리를 풀어놓을 친구도 이젠 많지 않네. 늘 고맙다. 건강하길 바란다.
2011년 4월, 방사능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밀양 땅에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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