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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사고, 이제는 제갈공명을 모셔올 때!

[변방의 사색] 다카기 진자부로의 <시민과학자로 살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4호기에 냉각수가 바닥났다던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발표 이후 이틀간은 지내는 게 말이 아니었다. 수업을 들어가도, 수업을 나와도, 교무실에 앉아 있어도, 복도를 거닐어도 그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20년간 원자력 발전소 기술자로 일하다 암을 얻은 뒤, 남은 생애를 반핵운동가로 살았던 히라니 노리오(平井憲夫)의 기나긴 편지를 숨죽여 읽으며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가 지진 같은 재난에 대해 사실상 별다른 대책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이 끔찍한 재앙을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가르치던 과목의 수업 진도를 잠시 중단하고 아이들과 그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때마다 문득 종말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서 제3차 세계 대전을 암시하는 전쟁의 소음 속에서 무거운 고독으로 침잠해 가던 주인공 알렉산더 교수의 얼굴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영상 미학이 창조한 하나의 시적인 이미지로만 받아들였을 뿐, 그것이 오늘날 내 당대에 실제로 구현되리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향한 나의 인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이런 식의 삶의 방식은 절대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물적 풍요를 일구어낸 근대적 기술에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자연적 안정성을 비틀어버림으로써 얻어낸 악마적인 힘을 동력으로 삼은 파우스트적 속성이 분명히 있으며, 그것의 상징적인 존재가 바로 핵에너지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이를테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1986년 체르노빌 사고로 봉합된 과거형으로만 여겼을 뿐, 이것이 나의 당대에 실제적인 종말의 가능성을 가져다줄 현실적인 위협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 <시민과학자로 살다>(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11년 전, 일본의 반핵운동가이자 과학자인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의 자서전 <시민과학자로 살다>(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가 발간되었을 때, 그리고 몇 달 뒤 그가 타계했을 때 나는 그의 비범한 삶의 곡절에 흥미를 느껴 그의 자서전을 한 번 훑어본 적이 있다. 나는 그가 대학 교수를 그만두고 반핵운동가이자 시민과학자의 길로 나서게 되었을 때, 그것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 피폭 경험을 가진 나라에 흐르고 있을 반핵 분위기의 토양에 힘입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가 60세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암을 얻은 뒤 앞서 말한 원자력 발전소 기술자 히라니 노리오가 후배 세대들에게 간곡한 편지를 남기듯, 병상에서 자서전과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같은 유언적인 저서를 집필한 '절박한 뜻'에 대해서는 사실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태를 겪으며 새삼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사태에서 그의 존재감은 굉장해 보였다. 그가 설립했고, 일생토록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원자력자료정보실'(☞바로 가기)은 지금 이 사태와 관련하여 일본 시민사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정보원 노릇을 하고 있다. <한겨레> 보도에 의하면, '일본 정부나 도쿄전력의 발표는 못 믿겠다. 원자력자료정보실을 보라'는 분위기라고 한다.

상황이 이런 데도, 우리 대통령은 도쿄전력 사장님이 된 듯 "괜찮다"고 되뇌고, 언론은 미아리 철학관 점쟁이가 된 듯, "편서풍이 불 터이니 괜찮을 것이다"라는 소리만 주억거린다. 사고보다 더 전율스러운 것은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 '우리는 괜찮다'는 표현 그 자체가 아닌가.

새삼스럽게 나는 다카기 진자부로와 과학자의 존재감을 생각한다. 비록 다카기가 그러했듯 대학을 뛰쳐나올 정도는 아닐 지라도, 생애 마지막 남은 1년을 반핵 활동에 바친 히라니 노리오의 극적인 전회는 아닐지라도, 체제 내에 있는 과학자들의 솔직한 발언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껏 그 누구도 발언하지 않고 있다. 그 누구도.

다카기 진자부로의 생애

일본의 고도 성장기를 이끈 이공계 분야의 최고 엘리트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제도권 바깥을 선택한 다카기 진자부로의 삶은 확실히 고난과 풍파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자신이 고백하듯, 그는 유년 시절부터 고분고분한 학생은 아니었고, 무언가에 기대는 것을 싫어하는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그는 대동아 전쟁 말기에 "천황은 신이며, 영미는 귀축(鬼畜)"이라고 떠들다가 종전 후에는 "군인들이 야만스러운 전쟁을 일으켰으며, 미군은 해방군"이라며 표변하는 교사를 보면서 "국가라든가 학교라든가 여하튼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말자, 될 수 있는 한 나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겨울이면 고향 마에바의 아카기 평야를 가로질러 불어오는 건조하고 엄혹한 바람을 깊이 사랑하는 땅의 사람이었고, 촌놈이었다. "오너라, 덤벼라, 강철의 겨울이여, 모든 걸 밝게 빙결시키는 용사여, 나는 오로지 한 개의 화살이 되리라"는 아나키스트 시인 하기하라 교오지로의 시를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괴벽을 가진 이단아였던 것은 아니다. 수학에 뛰어났고, 지나치게 공부를 잘했던 그는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는 소시민의 기질도 갖추고 있었다. 도쿄 대학에 다닐 무렵, 그 당시 일본 사회를 뒤흔들던 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수학에서 좌절을 겪고, 형이 먼저 선택한 물리를 피하다보니 떠밀리듯 화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방사능 물질을 다루는 핵화학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기적의 연금술'로 찬양받던 플루토늄의 새로운 장을 써보겠다는 공허한 야심에 잠시나마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는 초창기 원자력 발전소 사업에 뛰어든 일본의 대기업 도시바(東芝) 계열의 연구소에 취직했다. 그러나 그는 실험이 거듭될수록, 이 기적의 에너지를 알면 알수록, 방사성 물질의 괴력과 위험성에 놀라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가 동료들에게 제안했던 원칙은 "방사성 물질의 거동은 의외로 복잡해서 아직 모르는 게 많다. 더욱 기초 연구를 충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향해 질주하던 회사가 그에게 준 대답은 '이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게 회사라는 것인가'라고 그는 괴롭게 자문했다. '반대'를 좀처럼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양심과 종신고용을 맞바꾸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기업이었다.

도시바를 나온 그는 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도쿄 대학 원자핵연구소에서 학위 논문을 마치고 도쿄도립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금세 절망하게 된다. 대학이 기업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원들은 학문의 자주성과 중립성을 이유로 당대 사회의 요구 앞에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교수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자 이야기나 하면서 현실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무렵, 나리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산리즈카 농민들의 감동적인 투쟁을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그야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불도저는 문자 그대로 국가 권력 그 자체였고, 그 앞에 맨몸으로 자기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나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심정적으로 나는 농민들 편이었지만, 실제로 나는 국가 권력이라는 거대 시스템 측에 속해 있는 게 아닌가.

농민들은 '땅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고, '왜 우리가 쫓겨나가야 하는가, 우리 뜻을 무시한 국가 계획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다카기는 '당신들이 옳다'고 답했다. 그러나 동료 교수들은 농민들을 만나거나 자료를 읽어보지도 않고선 그들의 투쟁을 땅값 올리려는 수작 정도로 치부했다. 그에게 대학은 가망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던 때, 그는 요절한 동화 작가이자, 농민운동가였던 미야자와 겐지를 접하게 된다. "세계가 모두 행복해지기 전에는 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미야자와 겐지가 농민을 위한 과학을 고민하며 던진 명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을 우리의 과학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명제 앞에 그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야자와 겐지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실험 과학자로서, 나 또한 상아탑 안의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 자체를 실험실로 삼아, 방사능을 두려워하는 어민들과 불도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농민의 처지를 내 것으로 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나가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그는 산리즈카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신선함과 평화를 느꼈다. 그리고 제도 바깥의 과학자가 된 그에게 필연처럼 원자력 발전 반대 운동의 손길이 찾아든다. 그리고 당시 큰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기록된 미하마 1호 원자로의 연료봉 절손 사고를 만나게 된다. 뒷감당이야 어찌됐든 일단 하고 보자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국가, 이윤 말고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자본은 서로 결탁하여 수없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은폐하려 하였으며, 진실을 향한 노력들을 억눌렀다.

그는 이 싸움에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을 보았고, 자신에게 닥칠 난관을 직감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의 원칙을 점검한다. "눈앞에 제기된 문제로부터 도피하지 않을 것, 어떠한 조직과 권위에 대해서도 자신의 독립을 유지할 것, 그리고 모든 문제에 지적 성실성을 갖고 대처할 것." 그는 일생토록 이 원칙을 지키려 했다. 일본 정부와 관료들이 그를 위험 인물로 낙인찍었고, 협박과 음해에 시달렸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고 땅과 고향을 지키려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배웠다.

그는 실로 겸허한 영혼이었다. 그의 불굴의 의지는 실은 이 겸허함에서 온 것이었다. 인상적인 예화가 있다.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시절, 여러 곳을 다니며 시료를 채취하여 방사능을 측정하던 때, 나이든 어르신이 다카기에게 '방사능이란 결국 위험한 것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허용량 이하'이니 괜찮다고 말하다가 문득 '언제부터 내가 국가의 앞잡이가 되었는지'를 자문한다. 그는 이 '무식한' 농민을 상대로, 전문가적 식견을 뽐내며 안심시키려 들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 농민의 질문을 결국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지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수없이 다루어 왔고, 그 자신 오염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이 방사능의 '본질적인' 위해를 한 무식한 촌로의 질문 앞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이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실험실의 세계가 말하는 '객관성'이라는 명분, 측정 데이터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강요하는 전형적인 과학의 이데올로기를 이런 인간적인 겸허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전문가들이 '과학'을 참칭하며 떠들어대는 논리, '미미한 수치이니 호들갑 떨지 말고, 안심하라,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이야기에 대해 다카기가 그러하듯, '그렇다면 방사능은 위험하지 않단 말인가'라고 되묻는 과학자가 실로 필요하다. 바로 이 겸허함만이 석유 고갈 시대의 청정한 에너지라는 명분으로 막무가내로 질주하는, 그 자신 거대 기업의 이해관계와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원자력 마피아'들의 전횡으로부터 핵에너지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그가 겪었던 고초는 작지 않았다. 몇 상자나 되는 협박 편지를 받았다. 그가 법정에서 원자력 발전소 반대 주민을 위해 증언할 때, 국가 측 대리인은 노골적으로 '방 한 칸 얻어놓고 소꿉장난 하는 것이 당신의 반핵운동 아닌가', '실험 설비가 있기는 하냐'는 식으로 빈정거리고, 화학 분야의 학위를 가진 그에게 기초 지식을 테스트하듯 바보 같은 질문만 던졌다. 그는 수없이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는 원자력 발전소 반대 주민들이 또한 늘 그렇게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버러지'로 취급되었으며, 자신은 지금 그들과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시민과학자의 삶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 폐기 : 생존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원리

원자력 발전에 관한 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추구한 그는 이번 사태의 예언자가 되고 말았다. 그가 암 진단을 받고, 두 번에 걸친 수술을 받고 난 뒤 병상에서 집필한 유언적인 저서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11장에는 "2010년이 되어 가동한 지 40년이 되는 원자로들에게서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머리가 쭈뼛하는 느낌을 받았다.

"40년 된 원자로에서 사고가 날 수 있다고 진단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찬성론자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묻는다. '그렇게 잘 알면서도 왜 다카기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라고. 확실히, 지금 과학자들의 침묵에는 기괴한 허무주의 같은 것이 있다. 여기에는 '될 대로 돼라'는 식, '내가 사는 동안, 내가 월급을 받는 동안'에만 별 일 없으면 된다는 식의 기괴하고 끔찍한 허무주의가 엎드려 있다.

한국창의재단이 발행하는 <사이언스타임즈>에 실린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관련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그 기사들을 관통하는 핵심 논리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빼고는 아직 멀쩡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다. 1970년대 일본의 원자력 발전 찬성론자들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양키스타디움에 운석이 떨어질 확률보다 낮다'고 설쳐댔다. 그런데 그 운석이 양키스타디움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의 과학자들은 지금 또 똑같은 소리들을 한다. 곁에 2분만 있어도 사망한다는 고준위 폐기물을 처리하는 곳이 전 세계에 단 한 곳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인데, 이 위험천만한 쓰레기를 계속 우리 머리맡에 쌓아두어야 한단 말인가.

원자력 발전을 폐기하자는 주장을 이상주의라고 말한다. 다카기는 이 소리를 평생 동안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이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다.

이상주의는 그림으로 그려진 이상의 천국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주의는 지금 인류의 생존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원리가 되었다. 그것이 아직도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그만큼 엄혹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기대는 것은 편서풍과 목숨을 걸고 방사능과 싸우는 '영웅'뿐이다. 영웅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낀다. 원자력 발전이 안전하다고 강변하던 그 많은 과학자들, 정부 관료들, 반대 운동을 억누르며 양양해하던 그 작자들이 지금 당장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로 달려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일당 10만 원짜리 계약직 인부들에게 죽음의 고통을 전가시켜놓고는 '영웅' 어쩌고 하는 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말이다.

편서풍이 동남풍으로 바뀌는 계절이 다가올 때까지 이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정부는 이제 동남풍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갈공명을 모셔 와야 할 것 같다. 미아리 철학관에도 모셔 와야 할 분들이 더러 계실 것이다. 다카기 진자부로의 자서전을 덮으며 나는 가슴이 답답하다. "원자력 발전 폐기, 과학자들이여 말을 하라, 말을!" 나는 외치고 싶은 마음이다.

다카기 진자부로는 죽음 직전에 남긴 메시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애석하게도 나는 '원자력 최후의 날'을 살아서 보지 못하고 먼저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낙관만 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말기 증상 속에서 거대 사고와 부정(不正)이 원자력의 세계를 엄습할 위험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뒤에 남는 사람들이 역사를 꿰뚫어보는 투철한 지혜와 대담하게 현실에 맞서는 활발한 행동력을 가지고 일각이라도 빨리 원자력 시대에 종지부를 찍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다카기 진자부로의 <시민과학자로 살다>,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은 개정판이 나올 예정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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