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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여, 더 이상 고향을 찾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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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여, 더 이상 고향을 찾지 마라!

[변방의 사색] 김원일의 <전갈>

이 세대를 끝으로 사라질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명절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한 귀성행렬도 지금 시골을 지키는 60~70대가 세상을 뜨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고향'이라는 단어 또한 서서히 사어(死語)가 되어갈 것이다.

아파트 숲에서 태어나 아파트를 오가며 살다가 자신이 태어난 최초의 아파트 단지를 찾았을 때 이미 새로운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된 콘크리트 더미를 보며 고향의 추억이니 정취니 하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심히 민망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톨게이트 입구에서, 혹은 서울역 대합실에서 방송사의 인터뷰에 응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좀 힘들긴 하지만, 고향에 간다고 생각하니 행복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들의 소감, "잠은 여덟 시간 푹 잤고,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말처럼 상투적이면서 믿기 어려운 진실이다.

오늘날 귀성이란 그저 어찌할 수 없는 혈연과 사회적 습속에 떠밀린 고달픈 유랑의 대열이 아닌가. 이미 고향의 산천도 인간관계도 해가 갈수록 낯설어져만 갈 것일진대, 여인들에게는 며칠간의 거북스런 눈칫밥과 강제 노동의 나날이기가 십상일 텐데, 말이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정겹지만, 며칠만 있어도 돌아오고 싶은 맘이 솟구치는 곳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고향이 아닌가.

나는 바로 그 고향에 되돌아와 지금 9년째 살고 있다. 삭풍이 몹시 불던 1월 어느 날 내가 찾은 낙동강은 눈을 뜨기 힘든 어마어마한 모래바람이 날리고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준설토에서 날아온 모래먼지가 폭풍이 되어 온 강변을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할퀴고 있었다.

이곳 밀양은 4대강 사업이 진행되면서 또 동남권 신공항의 주요 후보지로서 부산 가덕도와 명운을 건 혈전을 치르고 있다. 온 도시는 현수막으로 도배가 되었고, 공항 유치에 실패하면 도시가 결딴날 것 같은 긴장감마저 감돈다. 천혜의 옥토 500만 평이 졸지에 활주로가 되고, 수십 개의 산봉우리가 비행기의 이착륙을 위해 깎여나가야 하는 참혹한 환경 파괴에 대해, 거기서 쫓겨나는 농민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뜬금없다는 눈빛을 만나게 된다. 얼마 전에는 밀양역 앞에서 신공항 유치 반대 유인물을 나눠주던 한 농민에게 밀양 시장이 다가와서는 '너는 밀양 사람도 아니다' 어쩌고 하면서 주먹을 휘둘렀다고, 맞았다는 농민이 병원에서 기자 회견을 열기도 했다. 사실 여부는 곧 확인되겠지만, 이런 정도의 분위기가 있다.

지금 고향은 고향이 아니다. 망가졌고, 신음하고 있다. 고향에는 여전히 수십 년 이래 토호라는 세력들이 주름잡고 있으며, 풀뿌리들의 민주주의는 없다. 이념적으로는 극우, 경제적으로는 토건업자 혹은 행정공무원, 그리고 '형님과 아우님', '사바사바'들이 지금도 고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파헤쳐지지 않은 곳이 없고, 파헤쳐지기만을 기다리는 땅들이 널려있다.

생각해보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고향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현재를 설명할 수 없을 때 결국 더듬게 되는 것은 과거와의 연쇄이다.

나는 내 고향을 무대로 한 김원일의 장편 소설 <전갈>(실천문학사 펴냄)을 꺼낸다.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3대가 겪은 슬픈 인생 유전이다. 거기에 우리들의 고향이 왜 이렇게 가망 없는 땅으로 망가져왔는지를 설명해주는 회로가 숨어 있다.

독립운동가 집안 3대의 인생 유전

▲ <전갈>(김원일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실천문학사
할아버지 강치무는 왜정 초기, 일제가 저지르는 참상을 보고 분연히 만주로 떠난다. 거기서 고향 선배인 약산 김원봉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으며, 대한독립군의 일원으로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적군에 의한 자유시 참변을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무력하게 떠돌던 그에게 고향 친구가 활동을 권유한다. 그러나 일제의 밀정에게 붙잡혀 죽기까지 고문을 당하고, 친구의 존재를 누설하고, 부끄러움으로 혀를 깨물어 '혀짤뱅이'가 된다. 이제 그에게 인생의 의미는 그저 하늘을 향한, 친구와 역사를 향한 부끄러움 속에서 짐승처럼 웅크린 삶이다. 강치무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만주 731부대의 초병으로 반병신 반벙어리로 산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강치무는 세상과 연을 끊고 지낸다. 그런데 거물급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약산이 그를 알아보며 '이제 향토를 위해 일하자'고 격려한다. 여기에 힘입은 강치무는 자신감을 되찾고 당시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던 농민들의 쟁의와 미군정 반대 싸움에 앞장선다. 결국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산악 지대까지 쫓긴 그는 좌익 게릴라가 되어 처절하게 싸우지만, 동료들은 모두 죽거나 떠나고, 그는 경찰 간부인 인척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만 건진다. 그리고 그는 다시 벙어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세상과 담을 쌓고 강태공으로 지내다 죽는다.

아들 강천동이 있다. 그는 가족을 건사하지 않은 부친에 대한 한없는 적의만 가득하다. 고향에서 벌어먹던 그는 산업화 초반의 울산으로 간다.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제일 밑바닥 자리에서 밥을 벌던 그는 손목이 잘리는 재해를 당한다. 아버지는 고문 끝에 혀를 깨물었는데, 아들은 기계에 손목이 잘려 고무손이 되었다.

강천동은 술과 폭력 속에서 아내를 떠나보내고, 강간으로 한 울산 어촌의 처녀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그는 딴에는 살아보겠다고 공장의 맹독성 산업 폐기물 처리 요원으로 일하지만, 산업 폐기물의 존재 자체를 숨기려는 정보기관에게 엄청난 구타를 당하고 또 한 번 좌절한다.

결국 강천동이 하는 일이란 굴뚝 청소에 행상에, 개장수에 무시무시한 개백정이 되어 인륜 따위는 생각지 않는 막장의 삶을 산다. 그의 폭력과 광기의 근원에는 아버지가 물려준 좌절의 기억과 자신이 겪었던 거듭된 실패로 체득한 신경증이 있다. 결국 그는 술김에 사람을 떠밀어 죽이게 되고, 감옥살이 끝에 기가 푹 꺾인 채 아버지처럼 고향집에서 산송장으로 지내다 죽는다.

이제 손자 강재필이 있다. 그의 유년은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 때문에 지옥과 다름없었다. 그도 아버지의 광기와 우울증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가 기댄 것도 결국 폭력이다. 밀양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소년 주먹쟁이였던 그는 결국 서울로 가서 퍽치기, 도둑질로 청춘을 지내고, 자살 충동과 우울증을 견디는 방책으로 택한 마약으로 감옥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된다.

겨우 30대 청년이 인생의 막장까지 치달았을 때, 문득 할아버지 강치무의 혼백이 그를 찾아온다. 그에게도 희미한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독립군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그는 할아버지의 삶과 연관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한다. 출소 후, 그는 여든다섯이 된 할머니가 자신의 아들이자 증손자인 종호를 키우며 죽음을 기다리는 밀양 고향집을 찾아온다. 거기에서 시립도서관으로 출퇴근하며 가열차게 공부한 끝에 조금씩 할아버지의 삶을 글로 옮기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옭아맨, 그 어찌할 수 없었던 굴레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강재필에게 뱀처럼 칭칭 감겨드는 유혹이 있다. 감방 동료 나 회장은 친일파의 자손으로, 온갖 개발의 이권에 끼어들어 거대한 부를 축적한 악한이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 회장의 청부 폭력 요구를 보기 좋게 따돌리며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자신의 세대에서 복수를 감행한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시절, 제국주의의 침략의 발톱을 피할 수 없었던 이 고장에서도 정의로운 인간들이 살아 있었다. 잡히면 고문 끝에 불구가 되거나,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끔찍한 공포를 견디며 불의한 세상을 직시하고, 인민의 삶을 연민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은 모두 죽거나, 어디론가 떠났다."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통일운동가인 안재구가 고향을 방문하여 행한 강연을 통해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고향의 후배들 앞에서 칠순의 노혁명가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갔다.

"내 소년 시절, 이 고장에는 참으로 훌륭한 이들이 많았다. 정의감이나 인품이나, 학식까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해방 공간의 몇 년 동안 모두 죽거나 지하로 숨어들었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리고 이들을 잡아 족치며 활개 치던 사람들이 있었다. 무장투쟁을 하던 빨치산들을 잡아와서는 작두에 뉘어놓고 서슴없이 목을 자르던 자들이다. 몇 십 년 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 자들이 내 고장에서 유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밀양 출신의 사상가 신영복의 인터뷰에서도 보았고, 이문열의 소설 <변경>에도 등장하는 장면, 잡혀온 빨치산들의 머리를 잘라 '뱃다리거리'라 불리던 시내 중심가에 철사에 꿰어 걸어두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아직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실감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나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 이곳이 왜 그렇게 답답하게 느꼈던 것인지를. 반공 웅변대회를 격려하기 위해 연단에 앉아있던 불콰한 얼굴의 지역 유지라는 어른들을 떠올려본다. 똑같이 술 마시고 비틀대는 고등학생을 놓고서도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아이에게는 호통을 치던 어른들이 생각난다. 남성 가부장, 극우 이념, 속물근성과 전체주의로 작동하는 이 세상 수많은 고향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리라.

수없는 강치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없는 강천동과 강재필들이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망가져 갔을 것이다.

60년이 흘렀다. 두 세대의 삶이 지나갔지만, 고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억은 벌써 박제가 되어버렸으나, 강치무를 유린한 힘들은 박제가 된 역사 위에 똬리 틀고 앉아 여전히 또 한세상을 구가하고 있다.

사람들이여, 더 이상 고향을 찾지 마라. 지하에 있을 수 없는 강치무와 강천동의 넋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갈 수많은 강재필들에게 술 한 잔 올리고 싶은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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