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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의 '냉정한' 민주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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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의 '냉정한' 민주주의에 반대한다!

[변방의 사색] 최장집 생각

2011년, 이계삼 씨(밀성고등학교 교사)가 '프레시안 books'에서 새 연재 '변방의 사색'을 시작합니다. 교육 현장에 기반을 둔 날카로운 사회 비평 칼럼으로 유명한 그는 이 연재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담론을 반추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새 담론을 모색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새해 첫날, 마음먹고 일찍 일어나 산에 올라 새해 첫 일출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에 들어갔더니, <프레시안>에 최장집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아하, 정치의 계절이 왔구나, 싶었다.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는 2012년까지 앞으로 2년 동안 우리는 각자의 인생 걱정에 더하여 선거 걱정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 하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나날들이 2007년 12월 19일 그 하루의 결과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나는 머리부터 아프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은 내 경험으로는 완전한 개소리다. 대학 시절, 학생회 선거를 한 번 치르고 나면 다들 원수가 되었다.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는 한 순간의 선택 앞에서 이해관계로 엮여 있는 이들은 대개 이성을 잃었고, 이해관계의 끈을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선거 자체를 차갑게 외면했다. 한 표만 적게 받아도 쪽박을 차야 하는 야바위 같은 놀음 속에서 온갖 다툼과 협잡이 생겨났다. 멀쩡하던 사람까지 미쳐 돌아가게 만들고는 끝내 환멸을 안겨주는 지옥도의 현현이 바로 선거였다. 그런데 그 지옥도의 소용돌이 속으로 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무슨 선거가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내 기억으로는 2007년은 새해 벽두부터 연말까지 1년 내내 대통령 선거로 떠들썩했던 것 같다. 2008년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2009년에는 지방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내년에는 대선과 총선이 한꺼번에 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 동안 선거가 없는 해는 딱 두 번 뿐인데, 그 중 하나인 올해 2011년은 내년 있을 선거로 벌써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진보 진영에도 보수의 재집권 저지를 위한 논의가 분분한 것 같다. 지난 12월에 창원에서 열린 집회에 갔더니 연단에 오른 야당 정치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야권 단일화를 목 놓아 부르짖었다.

▲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이런 현실 속에서 최장집 교수의 발언이 가지는 힘의 원천은 아마도 '냉정함'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2008년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시절 그는 '(촛불 집회 같은) 운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파시즘으로 갈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찬물을 확 끼얹은 것인데,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는 '체질을 바꾸지 않은 채 여러 행운들이 동시에 작용해서 집권한들 달라질 건 없다'고 냉정하게 쏘아붙이고 있다.

그의 지론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사회·경제적 이슈들을 정당을 통해 제도화하고, 이들이 서로 경쟁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거리의 정치', 혹은 '대중들의 흥분된 상태'를 그는 특히 문제시하는 듯하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는 이를 후진성의 징표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냉정함이 빛을 발하는 것은, '일단 집권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논리가 횡행하는 시점에서 '이 상태에서 집권해봤자 뭐가 달라지는데?'라고 따지면서 문제는 정치 공학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임을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바대로 우리 정치가 그렇게 변화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 그는 실현 불가능한, 또 다른 이상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정당 정치와 대의제 체제를 통해서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의 표현이기도 하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천은…

누구나 인정하듯 우리 현대사에서 이렇게 되건, 저렇게 되건, 결국 정치를 통해서 관철된 것은 가진 자들의 이익이었고, 그들의 지배였을 뿐이다.

제도권 바깥의 운동 지도자들이 더러 제도권으로 진출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수혈'이라고 표현했다. 대단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의 혈액을 교체하는 과정을 수혈이라고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피'로 수혈된 그들은 늙고 더러운 독혈을 더 세차게 펌프질해주는 촉매가 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수혈된 '젊은 피'의 품질 문제라기보다는 그 피가 수혈된 신체 자체가 그릇된, 애초에 가망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 체제는 출발부터 가진 자들의 지배와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것은 한국만의 체험은 아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연방헌법이 다수 농민에 대한 소수의 대지주, 상공업자, 정치 엘리트들의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슨 큰 비밀처럼 말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최장집 교수가 상정하고 있을 모델은 아마도 유럽이 되겠지만,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예외적이며, 일시적인 체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또한 유럽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정당 정치의 활력과 실질적인 대표성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그 활력이 1960년대의 거리와 광장의 에너지로부터 발원하고 있고, 또한 그 대표성의 원천이 광장을 체험한 세대가 여러 풀뿌리 현장에서 일구어낸 성과에 바탕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논리에서 궁극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정당 정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광장의 경험, 그리고 (노조와 각종 이익단체를 포함한) 광범위한 풀뿌리 조직의 존재인 것이다.

우리의 경험을 돌이켜보자.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것은 선거나 제도가 아니었고, 최장집 교수가 염려해마지 않는 거리의 정치였으며, '열정과 흥분' 같은 덕목이었다. 사람들은 정당 정치의 작동 과정, 이를테면 선거와 의회의 토론(물론 쌈박질이 훨씬 잦았지만)보다는 거리의 열정과 그 흥분된 에너지의 소통을 통해서 더 깊숙이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럼에도 최장집 교수는 대의제 체제만을 유일한 가능성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대중가요는 트로트밖에 없다는 믿음과 똑같은 발상이다. 그리고 대의제는 18세기까지만 해도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은 '타인의 손'이다. 대의제 정치란 내 삶의 결정권을 정당이라는 타인의 손을 통해 이익과 갈등의 아수라로 떠나보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다수결에 바탕을 둔 힘의 원리와 술수로써 움직이는 정치 공학으로 작동한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감정이 유통될 수 없는, 힘과 술수, 물질과 물질의 교호 작용일 뿐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인민의 지배이며, 따라서 무력감을 느끼지 않는 체제이다. 그것은 나와 내 이웃의 삶의 향배를 내가 속한 공간에서 직접 풀어내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구든 대번에 이런 질문을 떠올릴 것이다. 지금 그럴 가능성이 어디 있느냐고. 그 가능성은 찾아보지 않아서 그렇지 어디든 많이 있다.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그 가능성의 공간을 구축하고 확장하기 위해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정식화하는 것이 정치학이며, 시민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정치 운동이다.

경제 성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최장집 교수가 그리는 정당 정치가 정착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물질적 이익의 대표와 분배를 목표로 하는 한 경제 지표의 추이에 따라 요동칠 수밖에 없고, 결국 경제 성장에 대한 욕구를 제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가 삼성공화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메커니즘이 있다. 지난 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지갑을 채워드리겠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했듯이, 대의제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경제 성장 논리와 만나게 되어 있다. 이렇든 저렇든 선출된 대표의 역할은 이 체제에서 '지갑을 채워주는 존재'로 자리매김되고, 따라서 뭔가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가 인정하듯이, 이명박 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도, 지금 수없는 실정에도 일정한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도 경제가 그럭저럭 돌아가기 때문이다. 대의제 체제는 결국은 '묻지도 따질 필요도 없이' 풍요와 성장을 기약하는 자가 선출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경제 성장의 흐름에 '한계'를 가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를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지표가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지 않은가. 이것은 오늘날 정치를 다루는데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성장의 분배가 아니라 성장 그 자체인 것이다. 물론,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마나한 소리겠지만.

선거는 다가온다!

나는 지금과 같은 체질로서는 누가 집권한들 우리의 삶이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최장집 교수의 진단에 동의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체질을 갖춘 정당과 정당의 후보를 선거를 통해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가망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를 뽑아야 할지, 누구를 당선시켜야 할지 애태우지 말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조직하려는 그 노력이 바로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실천이다. 물론 최장집 교수는 이것 또한 가망 없는 이상주의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민주주의의 본령에도, 그리고 구체적 가능성에도 이쪽이 훨씬 가깝다고 나는 믿는다. 결국, 그의 논리는 우리 삶의 불구성과 희망 없음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길에 동원될 것이라고 나는 예측하는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선거는 다가온다. 선거에서 우리 삶의 조건과 관련한 상당한 부분이 결정되고, 선거를 통해 재생산되지만 또한 선거에 목을 매야 하는 이 악순환을 타개할 길은 무엇일까.

선거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공간, 풀뿌리들의 직접적인 협력과 소통으로 움직이는 작은 단위로 삶의 공간을 쪼개고 구축하는 실천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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