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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차라리 빨리 망했다면? '亡國 콤플렉스'에 하이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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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 차라리 빨리 망했다면? '亡國 콤플렉스'에 하이킥!

[프레시안 books] 김기협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건강한 사람도 죽는다

"그런데 그렇게 제대로 된 나라가 왜 망했어?"

얼마 전 평자(評者)가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이란 책을 냈을 때, 어떤 선배가 던진 질문이었다. <조선의 힘>은 대중서의 성격을 지향했지만, 평자의 연구 노트이기도 하다. 아마 그 책에 기존의 견해와는 다른 접근이나 관점, 해석이 많았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을 것이다. 질문의 행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 시대에서 '힘'을 읽어내려는 평자의 시도에 대한 냉소가 섞인 반박이 포함되어 있다. 평자도 역시 약간 코웃음을 섞어 대답하려다, 그 연배에서는 충분히 할 만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반문하는 데 그쳤다.

"건강한 사람은 안 죽나요?"

물론 건강한 사람도 죽는다. 마찬가지로 건강했던 문명이나 나라도 언젠가는 망한다. 사람으로 치면 자연스럽게 수명이 다하고 죽듯이 망하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급작스럽게 죽듯이 망하기도 한다. 앞의 경우는, 고대(古代)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이 대체로 그렇고, 뒤에 경우는 많은 정복 전쟁의 사례, 앵글로색슨의 기습으로 보호 구역에 갇힌 아메리카 인디언 등이 그렇다.

한창 젊은이가 자동차 사고를 당하면 억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 된 노인이 암이나 횡사를 당하면, 그런 욕을 당하기 전에 돌아가시지 그랬냐며 안타까워한다. 한 사람의 생명은 슬픔과 안타까움에 그친다. 그런데, 나라나 왕조의 경우는 그 흥망을 둘러싸고 복잡한 심사가 교차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조선의 경우는 어떤 죽음에 해당될까? 나는 둘 다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사(自然死)할 만큼 나이가 먹은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격이랄까? 새로운 문명의 전환이 필요할 시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당한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망국의 실제를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조선의 망국을 이해하는 우리의 관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빨리 망했으면' 관념

일단 이 경우에 생겨나는 안타까움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안으로, 하나는 밖으로.

먼저 밖으로. 일본의 침략, 나아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비판이다. 하긴 이 선명한 비판조차도 근대화라는 망상에 빠져 호도하는 모양이다. 제국주의 침략의 부당성을 오히려 부정하고 근대화 논리에 휘둘려서 오히려 식민지의 긍정성을 부각하는 주장이 있다. 물론 통계(統計)와 실증(實證)이라는 이름으로. 그 끝은? 돈이면 자식도 팔 것이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그럼 안으로는? '빨리 망했으면' 관념을 형성한다. 좀 더 빨리 망해서 사회나 나라가 바뀌고 왕조든 뭐든 정체(政體)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면 식민지로 전락하는 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애처로움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 '빨리 망했으면' 관념은 하나의 가정(假定)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는 말은 역사가 가정이 낳을 '허구'에 기초하지 않고 '사실(史實)'에 기초해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빨리 망했으면', '빨리 망했다면'이라는 가정은 이미 역사학의 궤도를 이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은 망할 때가 되어 망한 것이고, 하필 그때 사고를 당한 것이다. 어떤 노인이 팔순, 구순이 되어 돌아가실 때가 되었는데, 불행히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치자. 우리는 그때 운이 나빴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라, 민족, 문명이 망했을 경우에는, 이렇게 '쿨'하게 운이 없었다고만 말하기가 어렵다. 특히 그 망하는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그 가정에 온갖 사념이 개입한다.

아쉬움이 원망으로, 다시 원망이 바람으로, 바람이 다시 원망을 낳고, 원망은 다시 아쉬움으로 돌아온다. 이 사이클은 당사자의 논리로만 전개되지 않는다. 거기에 슬쩍 제국주의의 선전이 흘러들어온다. 식민지의 곤혹은 이미 불리한 지형에 서 있는 그 자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빨리 망했으면' 관념 자체가 이미 심각한 상처의 소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념은 이미 식민사관으로 범벅이 될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그래서 평자는 '빨리 망했으면' 관념이 보이는 모든 글을 경계한다.

망국을 돌아보는 이유

평자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옛 이야기가 재미있는 경우이다. 아이들이 옛날 얘기 해달라는 것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대부분 재미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다만 역사라는 이름만 빌린 소설책이나 연속극이 많은 게 안타깝다.

둘째는 역사의 교훈을 얻는 것이다. 시대는 변하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보편성 때문에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근대 진보사관은 근원적으로 역사의 교훈을 부정한다. 그런 점에서 근대 진보사관은 역사학의 이름을 빈 신학(神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믿음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의 이름으로' 현대인은 과거의 인간들에게 지독하게도 오만하다.

셋째는 인과(因果)를 이해할 수 있다. 지층처럼 형성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인과성에 대한 집착은 변이와 우연을 놓치게 되고, 그 무력감에서 자칫 환원론으로 내닫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역사의 효용 중에서 김기협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은 둘째 효용을 중심에 놓았다. 김기협은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지나친 애국심에 휘둘리지 말고 망국의 상황을 좀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전통의 가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위기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는 극복도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1부는 '조선은 어떻게 시들어갔는가(17~18세기)', 2부는 '조선은 어떻게 쓰러져갔는가(19세기)', 3부는 '조선은 어떻게 사라져갔는가(대한제국기)'로 나누었다. 그 아래 25항목의 세부 주제를 설정하여 '망국의 과정'을 살피고 있다. 3부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보면 조선이 망해가는 과정과, 직접적인 식민 침탈 과정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라, 민족, 문명

▲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김기협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아울러 김기협은 식민지=망국을 세 차원에서 보겠다고 했다. 하나는 500년을 통치해온 조선 왕조의 멸망이다. 둘째는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한민족이 이민족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셋째는 한국이 속해 있던 동아시아 문명권으로부터 유럽에서 발원한 근대 문명으로의 전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 때 필자가 말하는 동아시아 문명이란 '유교' 문화를 기반으로 한 문명이라고 생각된다.

평자도 '조선 문명'이란 표현을 즐겨 쓰고 있다. 평자는 이때 '문명'을 '자연 상태'와 대비된 용어로, 그러니까 일상생활부터 국가 같은 제도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의 '유위(有爲)'에 의해 이루어진 삶의 양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여기에는 왕조도 들어갈 수 있고, 서원(書院)도 들어갈 수 있으며 동네 생활도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왕조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지속되지만, 조선식 동네 생활은 중종 이후(16세기 초반)부터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이전까지 지속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시스템이 '문명'이다. 그리고 국가는 그 시스템의 하나이며, 매우 유력한 힘을 갖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 제도는 흉기일 수도, 보험일 수도 있다.

인간은 한 문명 속에서 살면서도 여러 차원의 공동체나 제도를 넘나든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홍경리(弘慶里)는 행정 구역상으로는 대한민국 충청남도에 속하지만,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동네 사람과의 연대에 더 영향을 받고, 같은 동네 사람이라도 학교에 다니는 학동들은 학교에,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나 절에,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직장에 삶의 중심이 놓여있었다. 삶의 다영역성(多領域性)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이유는 국가주의를 경계하자는 뜻도 있다.

'근대'의 상대화

김기협은 그동안 망국을 이해할 때, '근대화 과제의 내용을 후세 사람의 기준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당시의 상황을 음미하는'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변화 주체의 주체성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근대 유럽의 독선적 문명관으로부터 20세기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압력과 충격을 받은 결과다. 그리고 이 관점이 대한민국의 특권구조 유지에도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편향성의 보정이 지체되고 있다.'

따라서 김기협은 '근대'라는 용어를 '중세의 해체' 이후의 무엇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산업화, 식민지, 소유권 등으로 표현되는 근대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일부 유럽의 근대를 절대화하여 그 밖의 세계를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주의적 관점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날 뿐 아니라, 앞으로 모색할 새로운 시대에 대한 다양한 검토와 실험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볼 때도 반성해야할 시각이다. 평자는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조선 이후'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기협이 '근대'를 포괄적인 열린 개념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조선 이후'를 그려냈던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발굴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동학(東學)이든 서학(西學)이든, 또는 성리학의 자기 분열을 통해서든, 또한 정체(政體)가 무엇이든 새로운 '조선 이후'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검토했어야 문명사적 전환의 의미가 드러났을 것이다.

고종에 대한 '재조명'

김기협은 박규수, 박영효, 김홍집, 대원군, 고종, 민비 등의 인물을 통해 '개화' 시대를 조명하고 있다. 증거로 삼는 자료와 시각에 따라 역사의 해석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학계의 연구 성과를 대체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평자도 잘 모르는 데가 많기 때문에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이 펼치는 국제 관계를 포함하여 비교적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한편, 고종에 대해서는 근래 일본에 저항한 능력 있는 군주로 해석하는 일련의 경향을 김기협은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매천야록> 등의 자료, 사사로운 왕실 경비 운영, 을사늑약 당시 대신(大臣)의 구성 등을 근거로 고종의 무능과 기회주의를 비판했다.

사실 500년을 이어온 나라가 운명이 다할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된다. 사람들의 삶의 영역은 왕조만이 아니라, 가족(가문), 사회, 고향, 나라 등 다양한 영역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굳이 왕조에 집착하지 않는다. 당연히 조선 왕조에서 벼슬한 사람들이나 조선에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이 자결을 하거나 의병을 일으킨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으로 넘어가면 왕조로 돌아가는 복벽운동이 아닌 독립운동으로 저항운동의 대세가 바뀌게 된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다시 고종으로 돌아가서, 고종이 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평자로서 알 도리가 없으나, 김기협의 말대로 일제의 침략성이 고종이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일반 백성들도 의병으로 나서고, 독립군으로 나서는데,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일이나, 의병에게 거병의 명분을 부여하는 정도야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아닌가? 500년 왕업이 무너지려는 때에 군주가 되어 그 정도도 안 하면 오히려 그게 '사람 노릇'을 못하는 게 아닐까?

유교 정치와 권력의 사유화

김기협이 망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맞서, '지금 단계에서는 극단으로 치우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긍정의 관점을 시도하는 것이 편향성 보정을 위해 필요한 일 같다'고 결의를 다진 데 비해서, 적어도 조선 후기에 대한 서술은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한 듯하다. 이는 역사학계의 탓이 크다. 그중 역사상으로 그려내는 방법이나 구도, 그리고 오류 몇 가지를 논의에 부쳐 그의 문제의식이 더 깊어지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한다.

김기협은, '15~16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는 유교 정치 질서가 적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선의 망국은 그 사이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로 보았다. 그러니까, '조광조 (…) 이 시기 사림(士林)은 학문적 권위는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지만 스스로 정치적 권력을 지향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유교'(이 용어가 유학(儒學)의 종교성을 부각시키고 천황제의 근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앞으로 평자는 '儒家' 또는 '儒學'이라고 쓴다) 정치에서 권력의 공공성을 위한 논리와 제도가 발달했다는 필자의 지적은 적절하다. 특히 유가의 르네상스였던 성리학에서는 환관, 외척, 종친이 아닌 공식 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국가를 디자인했다. 경연, 언관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기협은 '15~16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는 유교 정치 질서가 적합'했다고 하면서, 조광조 등의 사림이 정치 권력을 지향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먼저 정치 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분명히 조광조 등은 정치 권력을 지향했다. 아니면 과거 시험은 왜 보고, 현량과는 왜 설치하겠는가. 정치 할 사람을 등용하기 위한 것이다.

사림이 배제되어야 할 중간 권력?

이런 이상한 이해 때문에 필자의 논리는 점점 수렁에 빠지는 듯하다. '유교 국가가 잘 운영되려면 임금에게 도덕적 권위가 모여야 하고 실력 있는 인물들이 관료 집단에 최대한 편입되어야 한다. 국가 체제와 거리를 둔 집단이 사림이란 이름으로 별개의 도덕적 권위를 누리는 상태가 일차적으로는 국가 기능의 저하를 보여주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국가 체제의 안정을 해치는 것이다.'

그럴까? 첫째, 관료 집단에 최대한 편입되어야 한다는 발상이 걱정된다. 누차 말했지만 평자는 사람들의 삶의 영역이 관료 집단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또 도덕적 권위가 임금에게 모여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도덕적 권위가 다양한 계층에 곳곳에 있을수록 바람직한 것 아닐까? 필자의 말대로 되면, '국가'는 강해질지 몰라도, 사회나 삶, 문명은 피폐해지지 않을까? 왜 이렇게 국왕에게 기댈까?

급기야 필자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드러난 권력 조직과 병립하는 감춰진 권력 조직이 사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하극상', '음성적 권력 조직'이라고 표현한다. 나아가, '한 사회의 지식층 주류가 현실 변화에 대응하는 경세의 과제를 외면하고 형이상학적 과제에만 매달리는 퇴행적 풍조는 왜곡된 권력 구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단정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만 확인하자. 집현전부터 퇴계, 율곡에 이르기까지, 세조의 찬탈부터 선조가 즉위해서 사림이 조정에 들어오기까지 줄줄이 사화(士禍)가 이어졌다. 사화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의 변화 방향이나 성격을 보면 정치가 개별 이익보다 공공의 안녕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가, 연산군이, 중종대 공신이, 남곤이나 이기, 윤원형이나 문정왕후 같은 자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무고를 자행해서 그 노력을 억눌렀다.

바로 사림은 이런 노력을 통해 성장한 사회 세력이자 정치 세력인 것이다. 필자가 말한 권력의 공공성은 바로 성리학을 내면화, 자기화 했던 사림들의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생겨나지 말았어야 할 중간 세력이라고 보는 것은 사실(史實)과 정반대일 뿐 아니라, 현재성의 측면에서도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종종 조선 시대사 개설서 등을 보면, 조선이 '빨리 망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퇴율 시기 이래로 성리학은 경직화했다고 단언한다. 임진왜란까지 터졌으니 타이밍도 그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좋다. 그래서 임진왜란 무렵 조선이 망했어야 한다고 한다. 이거, 전형적인 식민사학의 논리와 같지 않은가?

평자는 학부 다닐 때 이런 해석이 너무 이상했고, 이런 해석 때문에 평자가 성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도대체 퇴율 시기에 성리학을 자기화했는데, 긍정적 기능할 새도 없이 곧바로 경직화 단계에 들어갔다는 주장이 이해가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한다는 말도 성립하긴 하니까 이런 주장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통상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서 노년기를 맞는 것 아니겠는가.

왕권과 신권의 구도

김기협은 결국 '중국과 한국의 유교 질서는 군주와 평민 사이에서 중간 권력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핵심적 원리가 있었다'며, '왕권이 중간 권력의 힘을 통제함으로써 서민을 보호하는 역할이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핵심'이라고 정리했다. 평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유학(유가)을 연구하는 어떤 학자가 이런 주장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유가의 정치 이론에는 왕권이든, 중간 권력이든 공도(公道)에 어긋나면 통제한다. 그 공도 또는 천리(天理)를 익히는 것이 공부이고, 그 공부를 통해 세상을 바로잡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교목지가(喬木之家, 존경 받는 명문가)를 말했고 입현무방(立賢無方, 편견 없는 인재등용)을 가르쳤다. 그뿐이랴! 임금답지 못한 임금은 그저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는 역성혁명의 논리도 함께 전해 주었다.

이는 문민(文民) 정치를 우수한 유가 전통으로 이해했던 김기협의 논지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조선은 논리, 근거, 명분이 딸리면 정치판에서 행세를 할 수 없던 나라였다. 그게 문치의 힘이다. 사림을 나라의 으뜸가는 기운(元氣)라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퇴율을 존경하고 의병장들을 기렸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림들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사람들이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행동을 국왕권에 대한 '하극상' 정도로 보거나, 이들이 형성한 정치 세력을 '음성적 권력 조직'이라고 이해하는 한 조선 시대사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왜곡으로 빠져들 위험이 커진다.

김기협은 '왕권과 신권을 같은 평면 위에 놓고 보는 근대적 시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아마 민주주의적 시각을 '중세 권력 구조'에 투영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걱정 이전에, 대통령이 관료제의 우두머리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권력의 고하, 권위의 존귀는 있다. 그나 여타 연구자들이 구사하는 왕권-신권 구도의 문제점은 다른 데 있다.

여러 연구자들이 즐겨 쓰는 왕권-신권의 구도가 그다지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이유는 왕권-신권을 정말 소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두 가지만 정리하자. 첫째, 왕권은 원래 신권보다 강한 것이다. 관료제의 정점에 군주가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게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국왕의 수양을 강조했던 것이다. 둘째, 어떤 왕권이고 어떤 신권인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 이를 따지지 않으면 권력 게임만 남는다. 이것이 당쟁론이다. 단순한 정치 공학, 그것도 재미없는 정치 공학, 그래서 독자들이 꺼려하는 정치 소설이 되고 만다.

또 반복되는 광해군의 부활

그리고 김기협은 광해군, 북벌론, 예송(禮訟), 실학(實學) 등에 대해서 식민사관이나,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던 또 다른 근대주의적 시각인 자본주의 맹아론(내재적 발전론)에 의해 왜곡된 조선 후기 시대상을 반복하고 있다. 실학의 근대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는 듯하면서도, 내용은 근대주의적 해석에서 한 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광해군, 또는 광해군의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조선 후기를 어떻게 보는가의 핵심적인 관전 포인트라고 나는 생각한다. 식민사학자 이나바에서 시작된 광해군 띄우기가 얼마나 황당한 사료 왜곡과 교묘한 식민주의, 패배주의, 기회주의 논리에 의해 자행되었는지는 평자가 이미 <조선의 힘>에서 골격은 정리했으므로 또 반복하지는 않겠다. 그 책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두 가지만 추가하겠다.

김기협의 논리대로라면 유교 정치의 진수로 문치주의의 제도적 장치이자 공적(公的) 제도라고 할 수 있는 경연(經筵)을 광해군은 미루고 미루다 신하들의 비판을 받고 마지못해 참석했다. 참고로, 광해군처럼 경연을 게을리 했던 임금에는 세조와 연산군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광해군 시대에는 역사 편찬도 지지부진하였다.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9년의 세월을 보냈고, 그나마도 왜곡이 심해서 나중에 <선조수정실록>을 다시 편찬해야했다. 이런 것이야말로 김기협이 강조하는 시스템의 붕괴가 아닐까? 이런 붕괴를 바로 잡은 계해반정(癸亥反正, 인조반정)이 왜 그리 비판을 받아야 할까?

왜 의병만 좋아하는지…

논리가 이렇게 되다보니, 후금(청)의 침략으로 시작된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도 청의 '침략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조선의 '분별없는 비현실적 대응', 즉 척화파(斥和派)에 대한 비난만 남는다. 의병운동, 독립운동을 당장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 지라도 미래에 씨앗을 남기는 대의로 이해할 수 있었던 김기협이 호란 때의 의병이나 척화에 대해서는 왜 그리 야박한지 이해할 수가 없다.

첫 번째 후금과의 전쟁인 정묘호란만 해도, 이 전쟁은 후금의 느닷없는 도발로 시작된 것이다. 후금은 명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조선을 먼저 처리해두어야 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전쟁을 피해야했다. 광해군이 궁궐을 짓느라 파탄 낸 재정도 복구가 안 되었고, 방치했던 군비도 정리가 안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 관계를 유지한다는 화의가 성립했던 것이다.

병자호란은 또 다른 트집, 즉 군신 관계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필부필부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먹질 하며 협박한다고 아무나 보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명색이 한 나라인데, 그것도 나름대로 자기들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인데, 죽기로 저항한 것이 그리도 흠이 될까? 우리 사회에 좋은 게 좋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기회주의가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것이 이런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비약일까?

안 나오면 이상한 서술들

이외에도 조금만 생각하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존의 조선 시대 해석을 김기협이 그대로 따르면서 서술하고 있어서 많이 아쉽다. 북벌론을 '정권 독점을 위해 대외적 긴장을 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승만의 북벌론을 연상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효종 당시 북벌론은 이승만처럼 떠벌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 침략을 당했으면, 분하다는 사람부터 당장 원수를 갚자는 사람까지 다 있는 거 아닐까? 그걸 이해하기가 그리 힘들까?

김기협은 청나라에 대한 인식이 '박지원이 이어받은 현실적 대청관이고, 또 하나는 노론 정통론에 따르는 소중화주의'라는 둘을 가른다. 하지만 둘은 같은 것이다. 북벌론이나 소중화주의가 있어야 북학론이든 현실적 대청관이 나온다. 그리고 박지원이란 사람은 노론이다. 참 이상하다. 왜 이럴 때는 노론과 박지원을 나누는지. 이렇게 나누다 보면, 노론엔 누가 남을까 궁금했다.

서인-노론 하니까, 또 송시열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권력 사유화의 장본인으로. 송시열? 권력 사유화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다. 효종-현종-숙종대 정치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송시열을 놓고 '권력 사유화'라는 말은 못한다. 효종-현종-숙종 내내 송시열은 가시방석이었다.

나중에 경종이 되는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말 한 마디로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지 않았던가? 이런 말, 결코! 요즘 우리가 아는 '정치적인 사람'은 절대 못할 일이다. 아니 안할 일이다. 필자의 말대로 '권력을 사유화'한 사람은 이렇게 당하지 않는다. 곧잘 잘난 척하는 평자였다면 아마 입 다물고 몸보신했을 것이다.

김기협은, '지배 집단이 권력 투쟁에 매몰되면서 정치와 학문이 모두 선명성 경쟁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서술하면서, '이항로의 학설은 주리론으로서 존왕양이를 춘추대의, 즉 최고의 도덕적 명제로 삼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정치와 학술을 지배해 온 서인-노론 계열이 주기쪽으로 기울어졌던 경향과 대비되는 자세였다'고 했다.

이항로? 노론이다. 앞에서는 박지원을 노론에서 빼더니, 이번에는 이항로를 노론에서 뺀다. 또 궁금하다. 이렇게 나누다 보면, 노론엔 누가 남을까.

다문궐의(多聞闕疑)

다카하시가 도식화했고 이병도가 이어받아 조선 유학사를 뒤틀어버렸음에도 여전히 학계에서 주기-주리라는 도식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평자가 이미 <조선의 힘>에서 지적했다. 그런데 여기서 김기협이 이항로의 '주리'라고 할 때와, 서인-노론의 '주기'라고 할 때는 그 논리 차원이 다르다.

이런 논리 차원을 혼동한 결과, 다카하시와 이병도는 17세기 이후 당쟁과 학술 논쟁이 불일치한다고 보았고, 당쟁이 이념적 지향도 없는 권력 다툼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다카하시나 이병도에게 인물성동이 논쟁은 너무 버거웠을까? 근대주의의 청산을 주장하는 김기협이 다카하시나 이병도의 오류를 반복할 이유가 있을까?

김기협의 혼동은 이어진다. '기정진, 이진상 등 같은 시기의 거유들이 모두 주리론에 접근했던 것은 왕권의 쇠미가 심각해진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했다. 그런데 리(理)가 왕권에만 있다고 보는가? 리는 천지 만물에 내재한다. 왜 굳이 왕권의 쇠미하고만 관련시키는가?

김기협의 글을 보면서, 모처럼 내가 역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품었던 의문을 되씹어보는 기회가 되었다. 처음 역사를 공부할 때는 근대주의의 맹목성에 눈뜨게 되었고, 차츰 조선 시대 연구를 통해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석과 견강부회식의 사료 절취에서 생긴 숱한 의문점을 노트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많이 듣고 보되, 의심나는 것은 일단 빼놓으라고 했다. 평자는 많이 듣고 본 것도 아니면서, 의심나는 것만 늘어갔다. 의심이 풀릴 때면 그걸 글로 남기고 발표도 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다. 질문이나 의문이 많은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함부로 답을 내지 않는 것도 좋은 일이다. 우리는 너무 답을 빨리 내려고 하는 세상에 살고 있나니.

김기협의 조선 시대 서술의 경우, 비교적 평자가 낯익은 자료와 주제가 많아서 아는 척을 겸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의 글을 통해 배운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콤플렉스 없는 역사 서술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깊은 동료애를 느낀다. 그리고 김기협처럼 성실한 학자이기 위해 평자도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 대한 오항녕 교수의 서평을 놓고, 저자가 의견을 보내왔다. 저자의 의견은 아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오는 9월 3일 발행되는 '프레시안 books'(6호)에 실렸다. (☞관련 기사 : 오항녕의 서평에 답한다…"조선 시대 밖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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