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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후에도 이어진 대북 핵위협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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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전쟁 후에도 이어진 대북 핵위협 '잔혹사'

[정욱식의 '핵과 인간'] 미국의 대량 보복 전략과 북한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이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지 정확히 4년 후인 1954년 1월 12일,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인 덜레스는 미국외교협회(CFR)에서 새로운 안보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에게 전략적 여유를 주지 않을 정도로 아시아에 지상군을 영구히 주둔시키는 것은 현명한 군사 전략"이 아니라며, "공산 진영의 막강한 지상 전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량 보복 전력의 추가적인 억제에 의해 보강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우리가 선택하는 수단에 의해, 그리고 장소에 대해 즉각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에 우선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공산군이 또 다시 침략한다면, 유엔의 대응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새로운 집단 안보 개념을 이행할 수 있는 적절한 공격 전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미국의 점령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에 미국의 핵무기를 배치할 뜻을 분명히 했다. 애치슨 라인과는 달리 한국 방어를 위해서는 공산군의 재래식 공격에 대해서도 핵무기로 보복하고, 전선도 중국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다는 '대량 보복 전략'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국의 '대량 보복' 전략의 채택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대상은 한국전쟁을 일으켜 미국을 곤경에 처하게 했던 북한과 대규모의 참전으로 미국에게 사실상의 첫 패배를 안겨준 중국이었다. 덜레스는 1958년 4월 7일 펜타곤 고위 관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대량 보복" 전략을 고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우리는 한국에서 핵 대포(nuclear artillery)의 사용이 방어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마찬가지 상황이 이탈리아와 이란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량 보복 전략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핵무기를 이용한 위협이 효과적인 강압 외교 수단이자 저렴한 방법으로 미국의 군사 패권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판단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대량보복 전략"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번 다시 대규모의 미군 사상자를 야기하는 지상전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또한 아이젠하워는 NSC-68에 담긴 전력 증강을 재래식 군사력에 의존할 경우 미국은 파산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우리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거나 그것을 사용할 의지가 없다면 전 세계에 걸쳐 우리의 군사적 공약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저렴한 방법으로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핵무기를 이용한 "대량 보복"에 있다고 판단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에도 착수했다. 그에게 "대량 보복" 전략은 지상전의 대안이자 주한미군 감축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의 핵 사용 위협이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믿음과 선전은 "대량보복 전략에 대한 회의론과 비판을 무마시키는 데 유용한 수단"이었다. 또한 미국의 안보 전략의 핵심을 핵무기에 둠으로써 "펜타곤으로 하여금 재래식 군사력 증강에 경제성을 고려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제창한 '뉴룩(New Look)'이었다. 뉴룩은 "안보와 지불 능력(security and solvency)"를 핵심 기조로 내세우면서 재래식 군사력은 가급적 늘리지 않는 대신에 핵 전력과 사용 위협을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핵으로 보복하라"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 무기의 사용 위협이 한국전쟁을 끝냈다고 믿은 아이젠하워는 이후 더욱 철저한 핵무기 신봉자가 되었다. 이에 따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은 북한과 중국이 정전협정을 위반해 또 다시 남한을 공격할 경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맞춰졌다. 그런데 총성이 멈춘 이후에도 한반도의 긴장은 가시지 않았다. 1953년 9월 초 덜레스는 공개적으로 중국이 한반도나 인도차이나에 개입하면 미국의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10월에는 공산진영이 군사력을 재건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특히 중국이 북중 국경 지역에 공군력을 증강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권은 공공연히 북진통일을 언급했다. 이처럼 한반도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자, 미국 정부는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1953년 10월 13일에 열린 NSC에서는 바로 이 문제가 심도 깊게 논의되었다. 합참의장인 아서 래드포드(Arthur Radford)는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에게 정전협정 파기시 합참은 핵무기 사용에 의존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동맹·우방국들의 여론이 문제라면서도 "우리는 (공산권의) 공격이 재개되면 핵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2주 후에 열린 NSC 168차 회의에서도 이러한 입장은 거듭 확인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핵 사용 추진시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동맹국의 여론과 관련해 덜레스의 의견을 물었고, 덜레스는 동맹국과 공식적인 협의는 하지 않더라도 통보는 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 합참은 이러한 NSC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국방장관에게 한반도 전쟁 재발시 군사 행동 계획안을 제출했다. 합참은 승전하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의 사용, 중국, 만주, 북한에 대한 대규모의 공습"이 요구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현 시점에서 충분한 분량의 핵무기를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1953년 5월 NSC 때의 결정, 즉 핵무기 사용은 9∼12개월의 전력 증강 이후에 단행되어야 한다는 결론과는 달리, 이번에는 지체 없이 신속하고도 단호하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계획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재발시 중국군이 개입해 "우리를 또 다시 공격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베이징을 포함해 어디든 강력하게 보복해 괴멸적인 타격을 입혀야 한다"며, "이는 중국과의 전면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강경파인 덜레스마저도 만류하고 나섰다. 그는 이러한 군사작전이 소련의 개입, 일본의 중립화 선언, 대만의 중국 공격, 나토 내 균열 등 "중대한 불이익"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그는 대신에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핵 공격"과 북한의 군부대 폭격, 그리고 중국해 봉쇄와 하이난 섬 점령을 대안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 때와 같은 유사한 상황을 되풀이 하자는 뜻이냐"며 덜레스를 힐책하면서, 중국이 또 다시 한국전쟁에 개입하면 핵 공격을 포함한 중국과의 전면전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굳히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전쟁 재발시 핵무기 사용 입장을 확고히 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핵심적인 동맹국들인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버뮤다로 향했다. 덜레스의 메모에 따르면, 1953년 12월 4일 처칠을 만난 아이젠하워는 "공산주의자들이 고의로 정전협정을 위반하면 우리는 군사 목표물에 대해 핵무기로 반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처칠의 우려를 달래기 위해 핵 공격은 중국의 대도시가 아니라 공군 기지 등 군사 시설에 한정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처칠은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핵무기를 사용한 국가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우리는 핵무기를 단지 무기고에 있는 또 하나의 무기로 간주한다"며 핵 공격 의지를 굳히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 외무성은 미국이 핵 공격 추진시 영국과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문했고,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미국의 영국 기지 사용을 불허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며칠 뒤 아이젠하워를 다시 만난 처칠은 미국이 중국에 핵무기를 사용하면 영국이 소련으로부터 핵 보복을 당할 우려를 제기했다. 처칠 역시 3년 전 트루먼이 핵 사용을 암시하자 애틀리가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루먼을 만류했던 같은 논리로 아이젠하워를 설득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중국의 대도시가 아니라 "기지와 보급로, 병력 밀집 지역"에 핵 공격을 국한시킨다면 소련이 영국을 핵 공격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국의 핵심적인 우려 사항은 미국이 중국에 핵 공격을 가하는 문제였지, 북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이젠하워로부터 한국전쟁 재발시 핵 공격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은 합참과 국무부는 1953년 12월 7일 공동 보고서를 작성했다. 핵심적인 내용은 "한반도에 투입되는 중국 군사력의 효과적인 파괴"를 위해 북한, 만주, 중국에 대해 재래식 폭격과 함께 핵 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두 가지 핵심적인 문제, 즉 국제 여론과 소련 개입 문제에 대한 대책도 포함됐다. 공산권이 침공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켜 핵 공격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중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포격이나 중국 정권 붕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소련의 개입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듬해 1월 8일 열린 NSC에서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계획을 승인했다. 그리고 합참의장으로부터 공산군의 공격을 핵무기로 반격하는 데에는 22시간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승인하는데 충분한 시간이라며, 그 시간이면 공산주의자의 침공 사실을 영국 등 동맹국에게 알려 핵 사용의 불가피성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휴전선에서의 국지적 충돌과 같은 모호한 상황이 아니라 공산권의 중대한 공격에 대응해 핵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아울러 중국 및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미국은 곧바로 총동원 체제로 돌입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한국전쟁 재발시 핵 공격 계획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는 1954년 3월 2일 CIA가 극비리에 작성한 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공산군의 남침에 대응해 북한과 만주 등 중국의 병참 기지 및 보급로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를 전제로 삼았다. CIA는 중국이 미국의 핵 공격을 비롯한 대대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가용할 수 있는 능력을 총동원해" 반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련의 반응과 관련해서는 중국에게 공군력과 방공망 등 군사 지원을 제공하겠지만, 직접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면 "지원군으로 가장해 지상전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해 개입 수준을 크게 높일 것이고, "가능성은 낮지만 중국 공군에게 원자폭탄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소련 정권은 중국의 공산정권을 구할 수 있다면, 일시적으로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을 가능성도 있다"고도 봤다. 동시에 공산 진영은 한국과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민간인에게도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했다고 비난하면서 국제 여론전에 몰두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처럼 공산군이 다시 남침하면 핵으로 반격하겠다고 결심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국에 핵무기 배치에 돌입하게 된다. 미국은 사정거리 27km의 280mm 핵 대포와 사정거리 35km의 762mm 어니스트 존(Honest John) 핵 로켓을 우선 배치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정전협정에는 '신무기의 반입'을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자신의 정전협정 위반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반영하듯 덜레스는 "전 세계에 걸쳐 심각한 파장"을 야기할 것이라며 핵무기 배치를 반대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그럼 모르게 하면 되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미국은 몰래 핵무기 반입을 시작했고, 이에 대한 정보는 비밀에 붙였다. 1958년 1월부터 핵 대포와 어니스트 존이 한국에 배치됐고 이듬해에는 사정거리 1,100km의 마타도르(Matador) 핵 순항 미사일도 배치됐다. 이후 미국은 핵무기의 수량과 종류를 늘려나갔고 그 결과 1970년대 중반에는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가 1천개에 육박했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의 등장 이후 그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1991년 부시 행정부가 전술 핵무기 철수를 선언할 때까지 100개 정도의 핵무기가 남아 있었다.

이처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아이젠하워는 핵에 대한 일관된 집착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억제의 수단이든, 전시에 적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무기의 일종이든, 유사시 적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강압 외교의 수단이든 핵무기는 미국 외교안보전략의 기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뿌리는 한국전쟁에 있었다. 핵 공격 위협을 통해 전쟁을 끝냈다는 믿음과 한국전쟁 당시 개발·생산한 전술 핵무기는 도덕적 부담마저 경감시켜주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을 거치면서 핵 사용에 도덕적 부담을 느낀 트루먼과는 달리 "아이젠하워는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 도구적 관점에서" 핵무기를 바라봤고, "핵 금기(nuclear taboo)를 미국의 무기고에 있는 모든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미국의 자유에 대한 제약으로 간주"했다.

트루먼과 대비되는 아이젠하워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핵 공격 권한 위임에서도 잘 나타난다. 트루먼은 "원자폭탄은 대통령의 무기"라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반면에, 아이젠하워는 특수한 경우에 군 수뇌부에게 핵 공격을 가할 권한을 부여했다. 소련이 미국 본토나 유럽에 선제공격을 가해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한데,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데 시간이 걸린다면, 군 사령관의 재량으로 핵 보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보다 핵 공격이 용이한 방향으로 움직였고, 이에 맞서 북한은 미국의 핵 공격을 어렵게 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국전쟁 당시 세계 전쟁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공습을 당한데다가 미국의 '대량 보복' 전략의 핵심 대상이 된 북한은 군사 시설의 요새화하는 것으로 맞섰다. 주요 무기 체계와 장비, 그리고 지휘통제 시스템을 지하화함으로써 미국의 핵 공격을 비롯한 공습에 버텨보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또한 미국이 대량의 핵무기를 남한에 배치하자 군사력의 70%를 평양-원산 이남으로 결집시켰다. "적 껴안기" 전술, 즉 북한군을 한미연합군에 최대한 근접시킴으로써, 미국의 핵 공격 추진시 아군의 피해 발생 우려를 자아내 핵 공격을 억제하겠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 채택시 북한의 비밀특사였던 박성철 부주석이 헝가리의 외교사절단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적들은 우리를 핵폭탄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지 않아요. 물론 핵폭탄은 대량살상무기이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러나 두려워만 해서는 안 되지요. 핵폭탄에 맞설 방법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하 시설을 만들어 우리 인민들을 보호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조만간 우리는 지하 수송 체계를 운영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12년 동안 건설해왔습니다. 평시에는 지하철로 이용되고, 긴급 상황에서는 우리의 인민을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17년 이상 전국 방방곳곳에 땅을 팠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고, 그래서 핵폭탄이 두렵지 않습니다."
▲ 1985년 팀스피리트 훈련 장면 ⓒ연합뉴스


지속되는 미국의 대북 핵 위협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구체화된 미국의 대북 핵 위협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특히 핵 위협 덕분에 정전협정에 도달하고 이후에도 공산군의 도발을 억제했다고 믿은 아이젠하워는 퇴임 후에도 핵무기가 북한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식이라고 주문했다. 그의 퇴임 이후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들을 통해 밝혀진 미국의 대북 핵 위협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68년 1월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하자, 존슨 행정부는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을 동원해 북한을 상대로 무력시위에 나서는 한편, 소련에게 대북 압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군사적, 외교적 압박에 굴복하지 않자 존슨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에게 자문을 요청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방법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며, 외교적 해결과 군사적 봉쇄가 실패하면, 핵 공격 태세를 갖춰 북한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존슨 행정부 관료들이 대북 핵 공격시 중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인한 확전 위험을 제기하자, 아이젠하워는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며 확전 가능성은 낮다고 답했다. 또한 "베트남 공습을 최대치로 높여" 북한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핵 공격을 비롯한 무력 사용은 득보다 실이 클 것으로 판단한 존슨 행정부는 아이젠하워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건 발생 11개월 만에 미국이 북한 영해 침범을 시인·사과하고 북한이 미국 승무원을 송환하면서 푸에블로호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해결 4개월만인 1969년 4월에는 더욱 심각한 북미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대북 정찰 활동에 나선 미 해군 소속 EC-121 워닝스타 조기경보기가 북한의 미그 21 전투기에 의해 피격돼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한 것이다. 그러자 닉슨 행정부는 핵 공격을 포함한 보복 공격을 검토했다. 당시 군산기지에서 전투 조종사로 근무했던 브루스 찰스(Bruce Charles)가 미국 공영 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들어보자. 그의 임무는 한반도 유사시 북한 공군 기지에 핵 공습을 가하는 것이었고, 그가 조정하던 F-4 전투기에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보다 파괴력이 20배나 강한 B61 핵폭탄이 장착되어 있었다. "제 상관이 저를 불러 EC-121기가 격추되었다며,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을 하달했어요." 명령을 받은 찰스는 전투기 및 핵폭탄을 점검하고 출격 대기 태세에 돌입했다. 대기 몇 시간 후, 출격 대기 해제를 명받았다. "전투기에서 내려오라는 명령은 명확한 것은 아니었어요. 제 상관은 저에게 '내가 받은 메시지는 이런 것 같다. 우리는 오늘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다행히 닉슨 행정부는 군사 보복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미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상태에서 2차 한국전쟁까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닉슨 행정부는 북한의 추가 도발시 전술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다. 당시 비밀문서에 따르면, "닉슨 행정부는 한반도에서 전면전 발발 가능성을 우려해 EC-121 정찰기 격추사건에 대해 평정을 유지키로 하는 대신 유사 도발행위가 재발할 경우를 상정해 비상계획을 마련했다." 모두 25개의 비상계획 내용 가운데 작전명 "자유낙하(Freedom drop)"는 북한의 추가 도발에 "전술 핵무기 사용으로 대응한다"는 내용이었다. 유사시 북한의 군 지휘통제센터, 비행장, 해군기지, 미사일 시설 등을 파괴하기 위해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목표가 (북한의) 반격을 예방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취할 행동은 강력한 타격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의 추가 도발시 전술핵 사용을 통해 미국의 단호한 의지를 과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미국이 피해야 할 두 가지로 "한편으로는 겁먹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전"이라고 말해, 미국의 전술핵 사용이 단호함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지만, 확전을 야기할 수 있는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미국의 대북 핵 위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팀 스피리트 훈련'이다. 1976년부터 시작된 이 훈련에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6 전투기'뿐 아니라 'B-1B 전폭기' 등을 동원했고 핵 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도 참여시켰다. 또한 북한의 야포 전력을 초토화시킨다는 명분으로 핵 대포 훈련도 수시로 했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후에는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 및 소극적 안전 보장을 약속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핵 위협도 해소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마저 '기만'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대북 모의 핵공격 훈련을 계속한 것이다. 미국의 노틸러스 연구소가 입수한 미군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고 제네바 합의를 체결한 이후에도 북한에 대한 핵공격 옵션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원거리 작전이 가능한 'F-15E', 'B-1' 같은 장거리 폭격기와 트라이던트 잠수함발사핵미사일 등을 이용하기로 했다. 1998년 상반기에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세이머 존슨 미 공군 기지에서 실시된 수차례의 대 북한 핵무기 사용 모의 훈련은 이러한 미국의 계획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등장과 함께 불거졌다. 부시 행정부는 핵무기 사용을 '보복'에 한정하지 않고 유사시 이른바 "악의 축" 국가들이나 테러 집단에 먼저 사용할 수 있다는 '부시 독트린'을 채택했다. 특히 2001년 핵태세 검토(NPR) 보고서에서는 북한을 이라크와 함께 "고질적인 우려의 대상"이라고 언급하면서 최우선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북한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또 다시 핵 카드를 꺼내드는 것으로 맞섰다. 6자회담은 가다서다를 반복했고, 급기야 북한은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했다. 그리고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해 노벨 평화상을 '선불'로 받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을 핵 선제 공격 대상에 남겨두기로 했다.

*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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