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전술용'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사용에 신중했던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콜린스가 있었다. 그는 이전까지는 치열한 교전으로 미국 병사의 일부가 희생되더라도,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보류되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미국이 전술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자국군 방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며 공격적인 자세로 변했다. 전술 핵무기가 기존 핵무기에 비해 살상력이 적어 정치적 부담을 덜 수 있고, 중국군에 대한 수적인 열세를 만회할 수 있으며, 적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유용하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적의 공군 기지를 파괴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2년은 미국 대선이 있는 해였다. 미국 군부도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에 확전 계획인 OPLAN 8-52나 핵무기 사용을 추진하기는 어려웠다. 11월 7일 콜린스는 클라크에게 "지금 시점에서 귀하에게 새로운 작전을 지시할 수 없다"며,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고, 새로운 행정부의 정책을 봐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클라크는 54년 펴낸 저서 <다뉴브 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우리가 신속하고 강력한 자세를 취했다면 더 좋은 휴전 조건을 확보하고 많은 생명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나는 한국군의 급격한 증강, (대만의) 장제스 군대의 활용, 그리고 미국 정부가 승리하기로 결심했을 때 필요한 핵무기 사용을 권고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미국 대선과 확전시 야기될 경제적 부담에 대한 워싱턴의 신중론에 막혀 클라크의 확전론과 핵 사용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
아이젠하워의 등장과 미국 핵 공격 태세의 강화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전쟁은 미국에서 "인기 없는 전쟁"이었고 그래서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정전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미군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희비도 엇갈렸다. 또한 급격한 군비증강과 동원 체제로의 돌입은 대폭적인 세금 인상과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면서 미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트루먼은 재선에 도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에 지지율이 22%까지 떨어지자 출마를 포기했다. 트루먼의 대타로 일리노이 주지사를 지낸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이 나섰지만 아이젠하워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거 유세에 나선 아이젠하워는 미국인이 한국에서 싸우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그 이유를 간명하게 설명했다. "공산 진영이 우리를 야만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자유 진영의 리더십이 공산주의자의 야심을 견제하고 되돌리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은 단지 우리의 정치적 방어벽이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트루먼 행정부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보고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자신도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로 재직할 때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주둔시킬 만큼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다는 점에 동의했던 인물이다. 어쨌든 트루먼 행정부의 대외정책과 한국전쟁 수행방식을 강력히 비난한 아이젠하워는 대선에서 압승을 거뒀고, 이에 따라 백악관의 주인도 20년 만에 바뀌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최우선적인 임무로 "한국전쟁을 조속하고도 명예롭게 종식하는 것"으로 삼고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1952년 12월 초, 한국 땅을 밟은 아이젠하워는 정찰기를 타고 산악과 계곡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반도의 허리에서 유엔군과 공산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목도했다. 그는 이러한 전장 환경에서는 재래식 공격을 지속하는 것은 사상자만 늘릴 뿐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을 2차 대전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한국전쟁이 지속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미국은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도착 성명을 통해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적을 상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말한 행동은 "한반도에서 재래식 지상 공격과는 확실히 다른 행동이 필요했다"며 핵 공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밝혔다.
1953년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핵정책과 관련해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로의 정권교체가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수반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핵무기 사용자인 트루먼은 군사적 관점 못지않게 도덕적·정치적 관점에서도 핵무기를 바라봤다. 그는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을 때에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한국전쟁에서는 달랐다. 이미 핵폭탄의 엄청난 파괴력과 부도덕성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비핵국가인 북한이나 중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뒤따르는 선택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문제 권위자인 로렌스 위트너는 "트루먼은 군사적 고려보다 정치적 고려에 압도되어 맥아더와 같은 군부 인사들의 핵무기 사용 요구를 거절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달랐다. 한국전쟁 개전 당시 나토 총사령관에 있었던 아이젠하워는 1950년 6월 28일 펜타곤을 방문해 트루먼 행정부의 전쟁 수행 방식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며,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것이 결국 원자폭탄의 사용에 의존하더라도 단호한 행동을 요구했었다"고 말했다. 펜타곤에서 그를 만났던 리지웨이 장군 역시 아이젠하워가 트루먼의 전쟁 수행 방식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적절한 목표물이 있다면, 한반도에서 1-2개의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확인해주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반영하듯 아이젠하워는 "핵무기 사용의 도덕적 문제와 금지"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원자폭탄도 수많은 미국의 무기들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이면에는 재래식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이 엄청난 경제적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핵무기를 통해 "군사적 요구와 경제적 건전함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고도 깔려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저렴한 것은 분명하다"는 그의 발언은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줬다.
1953년 들어 또 하나는 중대한 변화는 미국 핵 전력이 양적·질적으로 크게 증강되면서,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해도 유럽 및 미국 본토 방어와 같은 사활적인 이해를 지킬 수 있는 여분의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초기에는 핵무기의 숫자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공격태세로의 전환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역할도 소련 위협 대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한반도와 같은 좁은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술 핵무기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핵무기 보유고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전쟁 발발 당시 292개였던 핵무기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즈음에는 1천개까지 치솟았다. 또한 52년 여름에 핵 대포를 비롯한 전술 핵무기 개발·생산에도 성공했으며, 표적 식별 훈련 및 모의 핵공격 훈련을 비롯한 핵공격 준비태세도 크게 강화해 신속한 핵공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미국에서 핵무기 사용에 훨씬 적극적인 행정부가 등장했고, 전술 핵무기 개발과 함께 유럽과 미국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억제하면서도 핵무기를 한반도나 중국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확보하면서 핵전쟁은 시간문제가 되는 듯 보였다. 더구나 정전협상마저도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서 핵무기 사용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맥아더의 조언도 한몫했다. 아이젠하워는 당선자 신분이었던 52년 12월 맥아더를 만나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유엔군 사령관 때 주장했던 군사작전을 다시 강조했다. 여기에는 북한을 두 동강 내기 위한 대규모의 상륙작전과 함께, 북한 및 중국의 군사 및 산업 시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중국군의 보급로인 압록강 유역의 방사능 오염 작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전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핵무기를 사용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당선자 시절에 만난 맥아더 장군도 이렇게 권고했다. 합참은 중공군이 광범위한 지하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술 핵무기 사용의 유용성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핵무기는 분명 북한과 만주, 그리고 중국 연안의 전략적 목표를 파괴하는데 효과적인 무기였다. 물론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최소한 소련군의 참전 가능성을 높였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핵전쟁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이 이미 상당량의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곧 수소 폭탄 실험도 실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언컨대 핵무기 사용을 금기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전세계적인 신사협정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핵폭탄 투하를 강행하는 데에는 몇 가지 걸림돌과 고려 사항이 있었다. 우선 미국의 동맹국들을 비롯한 한국전쟁 참전국가들은 조속한 종전을 희망했는데, 미국의 원폭 투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소지가 컸다. 아이젠하워도 한국전쟁 종식을 핵심적인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원폭 투하가 조속한 전쟁 종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고려해야 했다. 핵의 위력을 선보여 공산 진영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을지, 아니면 소련의 참전과 이에 따른 3차 세계대전이라는 '지옥의 문'을 여는 결과를 초래할 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육군 참모차장인 헐(John E. Hull)의 지적처럼, "북한에는 원폭을 투하할 만큼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전 이전부터 북한에는 대규모의 군사 및 산업 시설이 미비했고, 개전 이후에는 미국의 대규모 공습으로 이마저도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권고처럼 만주나 북중경계 지역에 원폭을 투하하면, 중국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지만, 이는 미국의 핵심적인 개입 목적인 "세계 3차 대전을 회피하기 위한 예방적 제한 전쟁"을 넘어서는 조치였다. 전선이 중국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직접 개입까지 야기해 '제한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는 1952년 후반기 들어 전선이 38선 인근으로 고착되면서 원폭 투하의 실효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참호와 지하시설을 파고 진지전에 돌입한 공산군을 상대로 원폭을 투하하더라도 지하로 피신한 적군들의 살상 효과는 크게 반감된다는 것이 미국의 실험 결과였다. 미국은 52년 5월 네바다주에서 원폭 투하 지점으로부터 5.5km 떨어진 지역에 1.5m 깊이의 참호에 피신한 군인들에게 어떤 피해가 있는지를 실험했다. 결과는 살상 효과가 그리 크제 않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적군과 아군이 근접 전투를 벌이는 지역에 원자탄이 떨어지면 아군의 피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핵무기 사용에 주저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원폭 투하의 전략적 가치를 자신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는 원폭 투하가 확전을 야기하지 않고 조속한 종전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원폭 투하에도 불구하고 전세가 크게 달라지지 않으면, 핵무기의 전략적 가치는 크게 반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도 바로 이 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핵 억제 전략에 자국의 안보를 의존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서 원폭 투하의 전략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으면, 유럽에서 더욱 큰 안보 불안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CIA 역시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1953년 4월 8일자 극비 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원자 폭탄 사용은 공산군에게 미국의 단호함을 주지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이것이 공산주의자로 하여금 정전 협상 마무리에 필요한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문서는 "공산주의자의 반응은 피해 규모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지적해, 원자 폭탄 사용시 공산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혀야 한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강조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보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원폭 투하의 효과를 입증한다면, 동맹국들도 사후에 미국의 조치에 동의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개성을 주목하라"
대북 원폭 투하의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다는 일부 군 수뇌부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대북 핵공격 계획을 접지 않았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53년 2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핵무기 사용 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핵무기 사용을 금기시하는 도덕적 문제가 있지만,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하는 "그릇된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 등 동맹국의 반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는 "만약 동맹국들이 원자탄 사용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에 3개 이상의 사단을 파병할 것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구체적인 핵 공격 대상도 거론됐다. 바로 개성이었다. 브래들리(Omar N. Bradley) 합참의장은 공산군의 수중으로 넘어간 개성에 "(공산군의) 병력과 물자가 집중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브래들리는 "적군의 은신처인 개성을 파괴하는 문제를 동맹국들과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개성이 전술 핵무기 사용에 적합한 목표라는 의견을 동의했다. 이에 브래들리는 동맹국들과의 협의에서는 "원자 폭탄 사용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클라크 장군도 거들고 나섰다. 그가 개성이 공산군의 은신처이자 군사력 증강의 요충지가 되고 있다고 불평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면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 회의로부터 50일이 지난 3월 21일 아이젠하워는 펜타곤에 한반도에서 교착상태를 타개할 공격 작전 방안 마련을 지시하면서 그 작전이 핵폭탄 사용을 요구한다면 자신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NSC 회의가 끝난 이후 동맹국들과 이 문제를 협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젠하워는 53년 3월 31일 NSC 비밀회의에 초대된 민간 자문단과의 대화에서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은 (미국이 동북아에 핵무기를 투하하면) (소련의) 보복으로 유럽이 핵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공포심을 갖고 있다"며, "이에 따라 현재로서는 핵무기 사용 전술을 배제해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핵 공격 계획을 철회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비롯한 미국 군부는 미국이 원폭 투하를 결심하면 확실하게 적들에게 군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최대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원자폭탄의 광범위한 전략적·전술적 사용이 요구된다"고 아이젠하워에게 권고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53년 5월 20일 NSC 회의에서 한반도의 허리 부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중국 본토에 대한 해공군 합동 작전을 승인했다. 여기에는 "저렴한 공격 작전을 위해 핵무기 사용도 포함"되었다. 북한에 적절한 핵공격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전비 부담을 줄이고 공산군의 결전 의지를 꺾을 수 있으며 미군 사상자 수를 줄일 수 있다면, 그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이젠하워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아이젠하워는 1년 후인 1954년 5월을 실행일(D-day)로 잡았다. 이처럼 즉각적인 핵 사용이 아니라 1년 후를 기약한 데에는, 대규모의 핵공격을 강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 기간이 필요했고, 소련군의 개입 등 확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비롯한 충분한 군사적 힘을 갖출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3차 세계대전을 불사한다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아이젠하워는 소련이 일본 등을 상대로 보복 공격에 나설 것을 우려하면서도 "더 신속한 작전이 소련의 개입 위험을 낮추게 될 것"이라며, "소련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합참의 계획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이젠하워의 핵 공격 협박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종식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핵무기 사용이 저렴하면서도 미국에게 유리하게 종전을 가져올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간주했지만, 영국 등 동맹국들은 오히려 확전을 야기할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선택한 카드는 1년 후를 세계대전도 불사하는 'D-day'로 잡으면서 중국에게 즉각적으로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행정부가 공산군에게 핵무기 사용과 관련해 모호한 신호를 보낸 것이 사태를 꼬이게 했다며,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1953년 5월 20일 NSC 회의 직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중국에게 사실상 '신사협정' 파기를 통보했다. 유엔군이 압록강을 넘지 않고, 교량이나 강을 폭격하지 않으며, 원자 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철회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이 유엔군이 제시한 정전협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가공할 보복을 각오하라"는 의미였다.
미국 정부는 4가지 경로를 통해 공산군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우선 53년 5월 20일 NSC 회의 다음날 덜레스는 인도를 방문해 네루 총리에게 "정전협상이 붕괴된다면, 더 강력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이고 전선도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협상 지침을 하달한 것이었다. 포로 문제에 대한 유엔군의 '최종안'을 공산군 측에 전달하고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면서 공산군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협상은 일시 중지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종료될 것이라는 지침이었다. 셋째는 클라크로 하여금 김일성과 팽더후이에게 서한을 전달케 했다. 5월 27일 전달된 이 서한에는 "당신들이 휴전을 진심으로 원하면 이번 기회를 잡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끝으로 주 소련 미국 대사인 볼렌(Charles Bohlen)이 6월 3일 소련의 몰로토프(V.M Molotov) 외무장관을 만나 유엔군이 제시한 최종 제안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전달한 것이었다.
이처럼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핵무기 사용에 공세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 한국전쟁은 정전 협상 타결이냐, 핵전쟁을 포함한 확전이냐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게 됐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때 입안된 NSC-68 준비에도 박차를 가했는데, 이는 소련과의 핵전쟁도 불사한다는 무시무시한 계획이었다. 그는 핵무기 사용에 따른 도덕적·외교적 문제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군사 논리에 매몰되었다. 소련의 핵실험 및 전력 증강에 따른 '공포의 균형'도 상대방에게 더 큰 공포를 주지시킴으로써 돌파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즈음 북-중-소 3국 동맹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북한의 남침 승인자이자 실질적인 최고사령관이었으며 정전 협상 지연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탈린이 사망한 것이다.
<주요 참고문헌>
Lawrence Wittner, "What Has Prevented Nuclear War?" The History News Network, July 7, 2009.
Paul G. Peirpaoli, Truman and Korea(Missouri Publishers, 1999).
Matthew Jones, After Hiroshima: The United States, Race and Nuclear Weapons in Asia, 1945-1965,(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AWC STRATEGY RESEARCH PROJECT(2006).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America in Korea 1950-1953 (Time Books, 1987).
CIA 홈페이지: http://www.foia.cia.gov
*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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