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됐지만 자주 쓰이는 '상식'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둘로 갈라서 하나가 좋거나 맞으면 다른 하나가 나쁘거나 틀리다고 하는 이분법적 상식이 그러하다. 이러한 이분법적 상식의 논리는 내가 주장하거나 속한 한 쪽은 좋거나 맞고,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나쁘거나 틀리다는 것인데, 그게 만약 잘못된 상식이라면 무수히 많은 억울한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상식의 이름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벌이거나, 반대편의 사람을 제거하거나 벌주게 되는 비극도 발생한다. 따라서 이분법의 논리는 인권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논리이다. 이분법적 상식은 자칫 잘못하면 아주 쉽게 인권을 짓밟을 수 있다.
이러한 위험하고 잘못된 이분법적 상식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주주의의 반대말로 알려져 왔던 공산주의이다. 필자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닐 때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라고 배웠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니까 당연히 그 반대말인 공산주의는 반민주적이라는 논리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상식에 익숙해지면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나쁜 것이라는 관념이 자연스레 강하게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 독재라는데 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대말이다.
여기서 범한 오류는 정치제도에 대한 반대를 경제제도에서 찾는 오류인데, 이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있는 의도적인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즉, 공산주의라는 경제제도가 매우 비민주적이고 나쁘다는 것을 학습시키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 사상을 갖거나 운동을 한 사람을 벌하고 압박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이다.
재미있는 것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가 실패해 냉전이 종식되었지만 공산주의가 없어진 나라에 공산주의의 반대라고 배워왔던 민주주의가 들어선 나라는 몇 안 되고 오히려 권위주의가 많이 들어섰다.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공산주의의 반대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매우 쉽게 반증한다. 한편, 자본주의를 오래 해온 싱가포르의 경우는 아직도 권위주의 국가이고, 한국과 대만 같이 자본주의를 채택했던 나라의 1960~80년대 시기는 군사 권위주의의 시대였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위험하고 잘못된 이분법적 상식은 '민주주의 대(對) 공산주의'가 아니라, 성장과 분배라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작금의 한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이분법이다. '성장 대 분배'라는 이분법은 조금만 생각하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성장의 반대는 당연히 정체 혹은 축소이다. 그리고 분배의 반대는 독점이나 독식이다.
자본주의를 채택해 성장을 해도 사회구성원 간 분배는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에서 마이너스 성장을 해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를 채택해 성장을 하거나 마이너스 성장을 해도 역시 분배는 이루어진다. 어떠한 사회든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소수가 독식하고 독점하면 나머지는 굶어 죽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따라서 성장이 이루어지건 안 이루어지건 사회구성원 간의 분배는 상식이다.
문제는 어떠한 원칙과 방식에 의해서 얼마나 공정하게 분배를 하느냐는 것인데, 성장의 반대를 분배로 설정하게 되면 분배는 성장을 해치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어 '공정한 분배의 방식과 원칙'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것조차 원천적으로 차단하게 된다. 논의의 의제에서 분배 문제를 아예 빼버리고자 하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있다. 분배라는 것이 꼭 국가가 뺏어서 다시 나누어 주는 분배만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즉, 분배를 얘기한다고 해서 사회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배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라고 치자. 하지만 성장과 분배의 상극 관계는 역사와 경험에 의해서 증명되지 못했다.
과거의 통계를 보면, 분배에 보다 관심을 가졌던 케인즈 경제정책이 주류였던 5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서방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성장은 괄목할 수준이었다. 소위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Era of Capitalism)였다. 미국이 지금은 신자유주의의 상징이지만 당시는 케인즈 경제정책을 채택해 1인당 실질국민소득은 매년 2.25%씩 증가했고,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워렌 버핏이 말하듯 비서가 자신보다 고율의 세금을 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기였고, 한 회사에서 연봉의 차이가 300배씩 나는 분배의 원칙도 있을 수 없었다.
반면 승자독식의 분배 원칙이 용인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도입된 70년대 초반부터는 저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실업률도 평균 7%에 이르렀다. 소득의 양극화는 물론 심화되었다. 한국은 97년 경제위기 이후에 신자유주의적 분배 원칙을 채택했지만 본격적으로 저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는 성장을 강조한 이명박 정부에서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성장이 더 나빠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매우 평등한 사회주의적 분배의 원칙을 채택한 사회주의 국가들도 2차 대전 종전 후 경제성장은 괄목할 만 했다. 소련과 북한의 성장을 기적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를 채택한 남한이 사회주의 경제인 북한 경제를 추월하기 시작한 것도 70년대에 들어서였다. 소위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VoC) 연구와 논쟁에서도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성장과 실업 면에서 혼합경제, 즉 사회주의적 요소가 섞여있는 경제보다 실적이 좋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Jonas Pontusson이 지은 "Inequality and Prosperity: Social Europe vs Liberal America"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작년 11월 복지 문제에 관한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이분법이 어쩌면 우리에게 잘못된 시대정신을 다시 한 번 강요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 시대정신이 '성장'이라고 주장하면서 '747'과 같은 포퓰리즘 공약이 생겨났다. 당시 성장과 신자유주의가 시대정신이라고 주장한 논객들, 정치인, 지식인들은 저성장이 지속되고 양극화가 심화되자 이제 '복지'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반성과 자기성찰 없이.
복지는 물론 중요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복지를 시대정신이라고 말하는 논객과 정치인들은 다시 한 번 잘못된 시대정신을 말할 위험성이 있다. 왜냐하면 양극화의 해법으로 제시된 복지는 잘못하면 양극화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 즉 공정하지 않은 분배의 원칙을 고치는 해법이 아니라, 양극화라는 구조 속에서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 즉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는 의미에 머무를 수 있기 되기 때문이다.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통해 사회에 진출해도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노동과 실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복지는 그저 '위로' 정도의 처방에 불과하다. 사회의 동력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신자유주의적 분배의 시대에서 새로운 분배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사실 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소위 진보 정권은 복지를 늘려나갔으나 신자유주의적 분배의 원칙을 채택했기 때문에 심각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그래서 필자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진보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우파 정부라고 진단해 왔다.(☞관련 글 : "정권교체가 아니라 우파 정권의 재창출이다") 결국 문제는 복지가 전부가 아니라 새로운 분배의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다. 노동과 실력에 비례해서 보상을 받는 분배의 원칙이 특권적 분배와 신분에 의한 분배의 원칙을 대체해야 한다.
보수라고 자처하는 정치세력도 복지를 늘릴 수 있다. 하지만 복지를 늘리면서 특권을 내버려 두고, 지위와 부와 권력과 경영권이 세습되는 신분제 사회를 용인하는 분배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봉건적·귀족적·신분적 분배를 타파해 보다 공정한 분배로 이전할 것인지에 따라 진정 국민을 위하는 정치세력과 특권을 위하는 정치세력이 갈릴 것이다. 문제는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분배의 원리와 원칙인 것이다.
민주주의 하에서 정권교체는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소위 진보에서 보수로, 또 보수에서 진보로. 하지만 아무리 민주주의가 잘 되어 있고, 정권교체가 여러 번 이루어져도, 분배의 원칙이 특권 시장세력에 포획되어 양극화를 극복해 내지 못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해 지거나, 최소한의 복지에 기대어 그럭저럭 사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혁명적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의 예를 보면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정치에 무관심해 지고, 알바에 만족하거나 체념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정권교체가 몇 번 있었지만 별로 희망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마치 거대한 봉건주의적 특권 신분사회 속에서 적당히 불만을 달랠 수 있는 복지가 도입된 국가와 같이 보인다. 알바로도 생계가 유지되니까. 하지만 국가가 전반적으로 정체되고 있다. 잘못하다가는 한국도 정권교체가 아무리 여러 번 있어도 일본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빨리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사회구성원이 공정하다고 여기면서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분배의 원칙과 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특권적 신분사회로 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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