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후보는 지난 10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가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느냐'고 묻자 "나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며 "그러나 정부를 신뢰하지 못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박 후보는 이어 "그런(못 믿는) 사람을 탓하기보다 정부가 왜 신뢰를 잃었는지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북한은 잘 관리하고 평화를 구축해야 하는 상대인데 이 정부 들어 북한을 자극해 억울한 장병들이 수장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이에 <조선일보>가 다음 날 1면 톱기사로 색깔론 공세를 예고했고, 곧바로 한나라당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12일 "충격적인 발언"이라며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분이 이런 안보관, 국가관을 가지고 서울시장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 상당히 걱정스럽다"고 비판했다.
13일이 되면서 색깔론의 농도는 짙어졌다. 한나라당 김장수 최고위원은 이날 "(천안함 사태가) 남북 모두 책임이 있다고 하더니, 점차 남측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며 "자신들의 가정에서 음모론을 완성해 가는데 흔히 좌파나 종북주의자들이 이런 수법을 잘 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북한 노동당) 평양시당위원장이 북한 군부를 옹호하고 면죄부를 부여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덧붙였다.
▲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프레시안(최형락) |
'엄기영 개콘'의 기억
이 장면을 보면서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문순 강원도지사와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선거 혹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 번씩 '천안함 풍파'를 겪은 이들인데, 그 결과는 달랐다.
지난 4월 강원지사 선거에 나온 최문순 후보는 TV 토론에서 "(천안함 사고 원인에 대한) 정부 공식 발표를 부정하고 의혹을 제기했는데 여전히 북한을 두둔하는 식의 의견을 거두지 않는 것은 심각하다"는 한나라당 엄기영 후보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최 후보는 "천안함 사건은 진실과 사실이 명명백백히 국민들에게 모든 자료가 공개돼야 한다는 의견"이라고 대응했다.
그로부터 9일 뒤 또 한 차례 TV 토론에 나온 최 후보는 엄 후보의 '불법 콜센터'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자 엄 후보는 "최 후보가 지난 번 TV 토론 때 나와서 천안함 사건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현재 국민 정서와 동 떨어진 그런 발언을 해서 반드시 나를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해 자원 봉사로 전화 홍보를 한 것"이라고 답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당시 엄 후보의 이 발언을 담은 동영상이 떠돌고 있다. 제목은 '엄기영 개그콘서트 4탄'이다. 최 후보는 며칠 뒤 강원지사에 당선됐다.
반면, 민주당이 추천한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 선출안은 국회에서 석달째 표류중이다. 한나라당의 색깔론 때문이다. 조 후보는 6월 2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천안함 사건이 누구의 소행이냐는 질문에 "북한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답했다. 그러나 '북한의 소행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냐?'는 보충 질문에 "정부 발표를 받아들이지만 직접 보지 않아 확신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같은 천안함 논란인데 왜 최문순은 됐고 조용환은 안 됐는가? 선출권의 소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용환 후보의 헌법재판관 임명 여부는 한나라당이 다수파인 국회가 결정한다. 하지만 최문순 후보는 강원도민, 즉 일반 국민들이 뽑았다.
천안함 사건에 관한 국민들의 생각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9월 21일 발표한 여론조사가 잘 보여준다.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정부의 발표를 믿는다는 응답이 33.6%, '믿지 않는다' 35.1%, '잘 모르겠다' 31.3%였다. 국민의 1/3만 정부 발표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결과는 이 연구원이 작년 9월에 발표했던 같은 여론조사 결과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 1년 사이에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연평도 사건을 보니 천안함도 북한 소행이 맞아'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높아졌을 법도 한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관련 기사 보기)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에 피격됐다는 정부의 주장은 과학자들에 의해 강한 도전을 받았고, 여론도 '도전자'들의 손을 들어 주고 있다. 강원지사 선거에서는 그러한 여론이 반영됐다. 천안함을 먼저 꺼내들었던 엄기영 후보는 역으로 민심의 심판을 받았다. 헌법재판관 후보의 발을 묶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는 그래서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민의 왜곡의 전당'이다.
국민들은 강원도지사 선거에서 뿐만 아니라 작년 6.2 지방선거에서 정부와 한나라당의 북풍(北風) 몰이에 이미 레드카드를 빼들었다. 6.2 지방선거는 천안함이 북한에 의해 침몰했다는 정부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보름 쯤 후에 치러진 것이었다. 그러한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한나라당이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또 다시 천안함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자멸의 수렁을 파는 일이다.
박원순의 실수 혹은 이중성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박원순 후보의 답변이다. 박 후보는 "나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진실을 위해 자료가 공개돼야 한다'는 최문순이나 '북한 소행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지만 확신이란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조용환과는 차원이 다른 말이었다.
믿음은 자유다. 정부가 내놓은 근거들이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부정당했음에도 북한 소행이라고 믿는다면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과 "정부를 신뢰하지 못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다"는 말이 한 문장에 양립할 수 있는가?
이는 천안함의 진실을 그토록 되물어 온 과학자들의 양심을 욕보인 것이다. 온갖 돌팔매를 맞으면서도 외롭게 싸웠던 과학자들을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는" 박 후보가 자신의 면피를 위해 끼워팔았기 때문이다.
만약 박원순 후보가 선거기간이라는 특수사정 때문에 그런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더 문제다. 천안함을 빌미로 색깔 공격을 퍼부어 보수층을 결집시키려는 한나라당의 의도가 너무 뻔해서? 이미 질 나쁜 색깔론에 휘둘리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준 시민들을 믿지 못한다면 박 후보의 정치 감각이 한나라당보다 나은 게 무언가?
한나라당의 천안함 색깔론 자체가 저급한 행위임에도 굳이 박 후보의 답변을 문제 삼는 게 가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개인 박원순'을 넘는 중요한 문제다. 천안함 문제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반드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른다. 그것도 한나라당의 선공(先攻)으로.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억지 주장을 펴는 측이 상대방에게 그걸 믿느냐고 추궁하는 건 적반하장이지만, 그들은 지금처럼 그렇게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 의제로 가는 길목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입장은, 정치세력과 정치인에게 피해갈 수 없는 숙명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하기에 박원순 후보가 회피하고 있는 건 천안함에 관한 알쏭달쏭 퀴즈가 아니라 '평화'라는, 시민들이 매일매일 공기처럼 접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외면이다. 아울러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를 파탄의 길로 이끈 현 정부에도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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