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대하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를 보면 나폴레옹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버렸듯, '동맹국' 미국과 '전략적 동반자' 중국이 한국에 등을 돌리는 순간 한국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철저히 고립되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그나마 전 유럽을 자신의 발 아래 두고 있었지만 한국은 다르다. 북한을 붕괴시키거나 최소한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 라인의 핵심 당국자 두 사람이 지난 2009년 방한한 미 국무부 당국자를 만나 '북한은 무너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풍경에서는 이런 맥락이 엿보인다. 곧 붕괴할 테니 자신들의 정책을 믿고 맡겨 달라는 것이다.
최근 정보공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밝힌 2009년 7월 24일자 주한 미국 대사관의 외교전문(電文)에 따르면, 김성환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만나 '북한이 경제 제재로 인해 처음으로 압박감을 느끼고 있고 제재의 영향력을 깨닫고 있다'며 "김정일 사후 북한 체제는 '잠시 동안' 버틸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현인택 통일부 장관도 캠벨을 만났다. 현 장관은 캠벨 차관보에게 '북한이 대화로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라며 북한의 굴복 전망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캠벨에게 "김정일은 2015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어차피 무너질 정권이니 잠시만 '전략적'으로 기다리면 된다는 투다.
김성환 당시 수석이 풍계리 핵시설을 다시 언급하며 북한의 핵 위협을 강조한 것도 미국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읽힌다. 현인택 장관 역시 '북한은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핵 관련 기술이나 심지어 플루토늄을 외국에 팔아넘길 수도 있다'고 캠벨에게 말했다. 미국이 가장 염려하는 것이 북한 핵의 확산임을 정확히 공략한 것이다.
또 김 수석은 당시 개성공단 관련 남북 대화에서 북한은 단지 돈 얘기만 하고 싶어했으며 '언제 돈을 지불할 준비가 돼 있는지 알려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2009년 4월 21일 개성 남북접촉에서 북측이 통지한 내용 중 입맛에 맞는 부분만 발췌해 전달한 것이다. 북측 주장의 핵심은 '돈이나 달라'가 아니었다. '6.15 선언 부정'으로 요약되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때문에 개성공단이 위기에 처했으니, 남측에 제공하던 특혜를 거둬들이겠다는 논리였다.(☞관련 기사 : 北은 다 얘기했고 南은 '돈 문제'만 공개했다)
이같은 '축소 왜곡 보고'까지 감행한 한국 정부의 대응이 효과를 발휘한 것인가. 취임만 하면 금방이라도 북한과 빅딜을 할 것 같았던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라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안 하는 정책을 취하며 이명박 정부에 장단을 맞춰줬다. 물론 그해 4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5월 2차 핵실험이라는 북한의 구식 '벼랑끝 전술'도 오바마 정부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지만.
문제는 중국이었다. 4월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북한을 규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에 찬성한 중국은 하반기 들어 북한과의 협력 기조를 재확인했다. 그로 인해 대북 봉쇄망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한 전문가는 이 구멍의 크기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 길이만큼" 크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2009년 이명박 정부의 당국자들은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했다. 전문에 따르면 김 수석은 중국이 북한의 핵실험과 군사적 도발을 자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한중 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인해 이듬해 천안함‧연평도 사태 때 중국이 한국 편을 들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의 단초를 엿보게 한다.
하지만 김 수석이 캠벨과 만난 불과 3개월 후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북한을 찾았고, 그 일을 기점으로 북중 경협은 지속적으로 강화됐다. 또 천안함‧연평도 사태 이후 국면과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북을 통해 중국과 북한은 혈맹 관계를 과시했다. 붕괴론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 중국과 북한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3일 평양을 방문한 리웬차오(李源潮) 중국공산당 조직부장을 접견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뉴시스 |
'붕괴되면 대한민국에 귀속된다'는 착각
그런데도 여전히 '붕괴론'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16일 통일부는 정책실에 '위기대응과'를 신설했다. 유사시 대비계획, 을지연습 및 유사시 대비 종합훈련 계획의 수립·종합·조정을 담당하는 부서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나 이른바 '보수언론', 탈북자 단체 등은 전혀 상반되는 맥락에 놓여 있는 사실들도 붕괴의 근거로 탈바꿈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예컨대 식량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등 시장경제적 요소가 관측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의 통제력이 이완된 것'이기 때문에, 북측 당국이 시장 거래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 '강압적인 통치에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붕괴할 거라는 식이다.
이제 와서 북한 붕괴론은 '근거는 없지만 아마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수준으로 논리적 근거가 크게 약화됐다. 물론 실제로 붕괴할지도 모른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이같은 사태에 대한 '대비책'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런 대책이 이렇게 여론의 주목을 끈 적은 없다.
이같은 '급변사태 대책'은 김 수석이 캠벨에게 "북한 정권이 완전히 붕괴될 경우 북한 영토는 대한민국의 일부이며, 한국의 유일한 목표는 통일"이라고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북한 붕괴시 한미 연합군이 북한을 '접수'하겠다는 '작전계획 5029'의 논리와 상통하는 인식이다.
그러나 국제정치 및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고개를 젓는다. 북한이 붕괴한다손 치더라도 유엔 회원국인 북한 국내 안정을 위해서는 안보리 결의를 거쳐 평화유지군이 파병돼야 하며, 한미 연합군이 북한을 '접수'하는 것은 '침략행위'이며 국제법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한국과 미국의 이같은 행동을 중국이 묵과할 리 없다.
대북정책 '목표' 실종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등의 발언으로 '붕괴론 신앙고백'을 한 것이라는 비판을 자초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흡수통일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여러 차례 선을 그었다.
그러나 붕괴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기다리는 전략'은 논리적으로 허구다. 무엇을 기다리냐는 것이다. 통일부가 15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보고에서 "앞으로도 인내심을 갖고 정상적인 남북관계 발전과 북한의 바람직한 태도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밝히는 등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했다. 이것을 기다린다는 것인가?
북한이 지난 1일 남북 간 비밀접촉 내용까지 폭로하면서 '이명박 정권과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등 기세등등한 것을 보면 별로 버릇이 고쳐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과거에는 북한이 그냥 만나자고만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이 대통령의 낙관적 관찰을 수용해, 이런 전략이 효과가 있다고 치자. 문제는 대북정책의 목표가 그저 북한 길들이기냐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버릇 고치기'가 아니라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지난 13일 국회에서 "(핵실험 이후) 기간이 오래됐으니 소형화나 경량화에 성공했을 시기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설명에 따르면 핵개발은 '1단계 핵시설 건설·가동 - 2단계 핵물질 생산 - 3단계 핵폭탄 제조·실험 - 4단계 소형·경량화(핵무기화) - 5단계 다수 생산‧실전배치(핵무장화)'라는 단계를 거친다. 김관진 장관의 말은 북한의 핵능력이 4단계로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버릇이 고쳐졌든 말든, 북한이 완성된 핵무기를 손에 들고 대화 테이블로 나온다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붕괴론'에 입각한 기다리는 전략의 계산서는 쓰디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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