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한 달 후인 12월 23일 취임식을 하면 학교 일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 이 정세토크를 접으려고 합니다. 우선 지난 2년 반 가까이 해왔듯이 정세를 면밀히 추적하기에는 시간 여유가 없을 것이고, 또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서,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첨단 정보화 기기를 통해서 원격으로 인터뷰를 할 수도 있겠지만, 학교 일에 몰두해도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정세토크를 계속하면 학교 측에도 미안할 것 같습니다.
정세토크는 이명박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이나 정세 판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자리였습니다. 독자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제목만 보고 무조건적인 비판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고,..그러나 만일 내용을 꼼꼼히 보셨다면 정세토크가 언제나 대안을 제시했다는 걸 아실 겁니다.
또 어떤 측면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제가 얘기했던 방향으로, 비록 시차가 좀 있었지만, 그렇게 움직였던 일도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여기서 제안하는 대안을 채택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어쨌든 '우정 있는 충고'가 가끔 먹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도 2년 넘게 정세토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정세토크를 잠정 중단하는 시점에 그동안에 했던 얘기들이 이 코너와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는데, 그 책을 보면 그동안 비판과 함께 많은 대안들이 제시됐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 공개되자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이끄는 미 행정부 대표단이 21일 황급히 서울을 방문했다. ⓒ뉴시스 |
부랴부랴 움직이는 미국, 이렇게 될 줄 몰랐나?
오늘은 세 가지 이슈에 대해서 얘기를 할까합니다. 첫째,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정부의 정책에 대한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얘기했지만, 북한의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에도 다시 한 번 얘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적십자회담 등 남북대화와 관련해서 이명박 정부의 옹색한 입장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북한 붕괴 가능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첫째,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2년 몇 개월 남았는데 사실 1년 후인 내년 말을 지나면 대선 정국이 되면서 남북관계나 대외 문제에서 새로운 방향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추동력이 안 생길 겁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 남은 시간은 내년 한 해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면 내년 한 해에도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 특별한 정책 변화가 일어날 조짐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설사 우리가 움직이려고 해도 이번 중간선거 패배로 힘이 빠져버린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한국 정부의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대북 이니셔티브를 뒷받침해줄 수 있겠는가? 매우 애석하게도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 그대로 간다는 얘기고, 결국 남북관계는 지금 상태보다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북한은 자기네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이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이런 저런 요구를 공개적으로 내놓다가 시간이 흘러도 상대방이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벼랑끝 전술을 써왔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미국인 경우, 미국은 결국 북한이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이 영변 핵 단지에 25~30MW인지 100MW인지 경수로 원자로를 새로 짓는다고 하는데, 그 자체만으로는 당장 그렇게 큰 위협은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게 완공이 되고, 천연우라늄을 3~5%로 저농축해서 연료봉을 만들고, 2년 정도 원자로를 가동한 후에 가동을 중단하고 연료봉을 꺼내서 재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데까지 가는 건 이명박 정부 임기가 끝난 뒤고, 오바마 정부 임기도 넘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 학자한테 농축 우라늄을 만들 수 있는 원심분리기 수백 개가 가동되는 걸 보여주면서 "사실은 2000개의 원심분리기가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는데 원심분리기가 실제로 2000개가 있다면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천연 우라늄을 3∼5% 정도로 저농축(LEU)해서 지금 짓고 있다는 경수로 원자력 발전기용 연료봉으로 만들지 않고 그냥 90%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HEU)을 만들어서 그걸로 곧장 핵무기를 만드는 쪽으로 가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더 큰 문제는 이미 비축되어 있는 플루토늄이 폭탄을 몇 개 더 만들 정도가 된다는 겁니다. 지금 알려진 대로 플루토늄 폭탄을 두 개 만들어 폭파 실험을 하고도 플루토늄이 40kg 정도 남아 있다면, 북한의 기술로 봐서는 핵폭탄 6~8개 이상은 지금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또 플루토늄탄 폭파 실험을 이미 두 번 했기 때문에 3차 실험을 하면 그건 핵무기의 소형화·경량화의 의미가 있는 실험이 될 겁니다.
요즘 나오는 경수로 건설 공사 소식, 우라늄 농축 시설관련 새 소식만 가지고 보면 '아직 멀었어' 하는 얘기도 할 수 있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플루토늄과 기술만으로도 핵무기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북한의 전력(電力) 사정으로 볼 때 HEU 프로그램을 가동시켜서 우라늄 핵폭탄을 바로 만들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폐연료봉 재처리를 통해서 플루토늄을 만들고 그걸로 핵폭탄을 만드는 기술은 확실히 있는 거니까, 핵실험의 차수를 거듭하면서 핵무기가 소형화·경량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 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작년 5월 25일 2차 핵실험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 안 움직이고, 한국 정부는 이런 저런 이유로 미국을 못 움직이게 하면서 북한에게 1년 반이라는 '틈새시간'을 주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미국과 한국이 '태업'(Sabotage)을 함으로써 북한이 핵실험을 한 번 더 하거나 우라늄 농축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게 만든 결과가 됐습니다.
그동안 한·미 정부가 1874호 유엔 제재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북한을 좀 더 압박해서 비핵화 의지를 가시적으로 확인한 연후에 6자회담을 재개해야만 한다고 버텨왔지만, 결국 1874와는 별개로 북한은 핵기술을 더 발전시켰다는 결과만 남게 됐습니다.
금년 11월 초부터 북한이 미국 내 북한 전문가들을 3∼4팀으로 나누어 차례로 불러들이더니, 드디어 미국의 조바심을 자극할 만한 일을 벌이는군요. 북한은 미국이 한국 정부를 뿌리치고라도 뛰쳐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봅니다. 결국 북한의 의도대로,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 등 미국 대표단이 부랴부랴 한·일·중 3국을 순방하면서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보즈워스 일행이 서울을 들러 도쿄로 가는 날 한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는 베이징으로 떠난다고 하는데, 북한을 그렇게 오래 지켜보고 겪어온 미국과 한국의 정부, 특히 우리 정부가 북한이 이렇게 나올 줄 정말 몰랐을까요? 정말 몰랐다면 그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이제 그나마 이 대목에서 우리 정부가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입장을 계속 견지해나갈 것인지 아니면 대승적인 자세로 6자회담 재개에 협조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의 핵무기가 소형화·경량화 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6자회담에 끌려들어가듯이 참가하거나 미·북 양자회담 결과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생길 겁니다. 이명박 정부의 남은 임기 2년 내에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요.
사실 저는 이런 얘기를 여러 번 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어떤 말도 마이동풍처럼 흘려들으니까 이제 저도 다소 지쳤습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이런 식으로 제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정세토크가 마지막 충고라고 정부가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어요. 정책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북쪽을 상대로 진짜 국격을 세우자
둘째, 남북관계에 대해서. 25일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리게 되어 있는데, 요즘 북한이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회담을 제의하고 우리가 거절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와 관련해서 웬 전제조건을 그렇게 많이 거는지 이해가 안 되더군요.
우리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 관광지구 시설을 일방적으로 몰수·동결했으니까 일방적으로 철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물수·동결을 푸는 게 금강산 관광재개 회담을 여는 전제조건이라고 조건화합니다. 말을 위한 말을 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의 논리체계로는 말이 되기는 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꾸 조건을 갖다 붙이면 남북관계의 큰 틀에서 볼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적십자회담도 성과 없이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이 정부에서 두 번 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건 두 번 다 외상으로 한 겁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 이산가족 상봉 16회를 한 건 연간 쌀 40~50만 톤, 비료 20~30만 톤 지원에 대한 북한 나름의 성의 표시였고, 그 다음 해에도 지원이 계속됐으면 하는 기대감 때문에 협조했던 겁니다. 이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면서 40~50만 톤 지원은 인도적 지원이 아니라는 식의 말장난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도 규모의 지원은 단순한 인도적 지원이 아니기 때문에 북쪽의 변화가 있어야만 해줄 수 있다는데...6.25 이후 미국이 우리한테 엄청난 양의 식량과 옷가지 등을 지원할 때 '이승만 정부의 대미외교 자세 변화' 같은 조건을 단 적이 있었나요? 이념? 이념이 같으니까 지원했다고? 한국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줬다? 그건 아니에요. 실제로 한국 사정이 딱해서, 불쌍하기 짝이 없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 겁니다.
이민족 간에도 인도주의 차원에서 그렇게 대규모의 지원을 하는데, 어떻게 동족간에 그럴 수 있습니까?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북이 호락호락하게 순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규모 지원은 정치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느니 하면서 자꾸 지연시키느냐 이겁니다.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정례화하겠다고 말만 하지 말고, 대북 인도적 지원을 재개하면 이산가족 상봉사업은 정례화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쪽도 자기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상봉 횟수를 늘리자고 할 겁니다. 한 달에 한 번은 비현실적이고, 1년에 3~4회 하던 걸 더 늘릴 수도 있어요.
그렇게 인도지원과 이산가족 정례화가 합의만 되면 금강산 동결·몰수는 제풀에 풀게 돼있습니다. 그걸 먼저 풀라고 하면서 대화를 하는데 차단봉을 여러 개 내려놓는 것은 이산가족 상봉은 쌀·비료 같은 거 받으려고 하지 말고 인도적으로 나오라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북한을 상대로 그런 조건을 다는 게 과연 인도적인 것인가? 현 정부가 말하는 인도주의의 개념은 뭡니까? 이산가족 상봉은 인도주의고, 굶어 죽는 사람들 살리는 건 인도주의가 아닌가요?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와 관련해서 관광객 사망 사건 진상 규명, 재발방지 대책 마련, 신변 안전 보장 강화 이렇게 3대 선결 조건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하는데, 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그거야말로 만나서 내용을 서로 조율해야 할 것들입니다. 만나서 얘기를 해야지 회담하기 전에 북한이 먼저 조치해야 한다면 회담은 뭐 하러 합니까?
어른스럽게, 북쪽보다 경제 규모가 100배 정도는 큰 어른답게 처신을 하란 말입니다. 체격이 크면 체격에 어울리는 처신을 해야지요. 북한이 하듯이 밀어붙이기나 티격태격 하는 건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적십자회담을 문산에서 하자는 우리 쪽 제의에 북쪽이 동의해왔다고, 그런 조그만 데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됐다고 쾌재나 부를 일은 아닙니다.
그런 형식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이산가족 상봉 횟수를 늘리자'고 하면서 '그와는 별개로 쌀·비료를 주는 문제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정도의 언약을 하면, 이산가족 상봉은 활성화 될 겁니다. 물론 별개로 하는 건 아니에요. 북한의 체면도 있으니까 외형상 말만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북쪽도 금강산 관광 시설 동결·몰수는 자진해서 풀게 되어 있습니다.
대북 쌀 지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인도주의도 인도주의지만, 우리 농민들의 정서와 농심(農心)도 고려해야 합니다. 금년에는 날씨가 안 좋았기 때문에 벼농사 상황이 아주 안 좋다고 합니다. 벼의 수확량이 줄어드는 것 그 자체를 걱정하는 건 아니고, 지금은 쌀의 질을 따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벼농사 상황이 안 좋다고 하는 겁니다. 지난 금요일에 남북관계 관련한 특강을 했는데 거기 농민운동을 하는 분이 와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까, 부스러기가 되는 쌀이 올해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쌀 한 가마 80kg당 12만원까지 떨어지니까 농민들이 불만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신곡 가격은 작년 쌀 재고량이 얼마냐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데, 과거의 쌀을 대북 지원으로 덜어냈으면 올해 쌀이 좀 안 좋더라고 해도 12만원까지는 안 떨어질 겁니다. 그런데 쌀 지원 안 해서 재고가 넉넉한데 누가 안 좋은 쌀을 사먹겠느냐, 차라리 1년 전 쌀을 방출하면 그걸 사 먹지. 그런 말을 농민운동 대표가 하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농민들의 심사가 뒤틀려 있는데, 거기다가 한미 FTA 쇠고기 협상까지 잘 못해서 촛불이 다시 켜지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쌀 농사 농민들의 불만이 덧붙여지면 이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농민들의 숫자가 적어서 정치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농촌에 뿌리를 둔 도시 사람들이 가진 정치적 힘도 같이 생각해야 돼요.
그런 힘에 밀려서 사후약방문으로 지원하지 말고 이번 적십자회담을 계기로 지원을 해야 합니다. '네가 먼저 때렸잖아?' '네가 먼저 잘 하면 나도 잘 할께' 이런 식으로 초등학생 말장난 같은 대북정책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국격이란 말을 무척 많이 쓰는데, 지금 이 정부가 북쪽을 상대로 해서는 국격이 아예 없어요.
▲ <정세현의 정세 토크 : 60년 편견을 걷어내고 상식의 한반도로>(정세현 지음, 황준호 정리,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
셋째, 요즘 여기저기 들리는 얘기를 모아 보면 최근 북쪽이 식량 지원이나 경협 활성화 등과 관련해서 좀 적극적으로 나오는 모양입니다. 심지어 식량 지원만 하면 정상회담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상회담을 한다면 비핵화 문제를 비중 있게 다뤄야 한다는 둥 6자회담 의제를 정상회담 의제로 해야 한다고 하니까, 다시 말해서 북한 핵 정책의 논리 구조에 안 맞는 요구를 자꾸 하니까 접점을 못 찾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북쪽이 여러 접촉 기회 때마다 식량 지원이 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니까, 마치 북쪽이 이제 남쪽의 처분만 바라면서 애걸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조금만 더 조이면 이명박 정부 임기 내에 무릎을 꿇을지 모르겠다면서 기다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정보를 잘못 해석해서 붕괴 임박론이 나오고, 통일세 얘기도 대통령의 입을 통해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봅니다. 청와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 통일세 얘기를 집어넣었다는 건 대통령 자신이 북한의 붕괴를 믿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통일은 반드시 옵니다"라는 말 속에는 붕괴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었어요.
김영삼 대통령도 자신이 북한의 붕괴를 확신해서 모든 정보를 그쪽에 맞춰 해석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북한 내부적으로 보면 붕괴 촉진 요인이 붕괴 억제 요인보다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붕괴를 억제시키는 요인은 한반도 밖에 있습니다.
우선 중국이 북한의 붕괴를 버텨주고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김정은 후계체제까지도 지지하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1995년 북한이 국제사회에 식량지원을 호소했을 때 일본이 제일 먼저 쌀 50만 톤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도 북한의 붕괴 억지 요인이 북한 밖에서 의외로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북한 붕괴 억제 요인은 우리 남쪽에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막상 북한이 붕괴돼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년 1000∼2000명 규모의 탈북 수준이 아니라, 수십만 수백만 단위의 대량 난민이 남쪽으로 올 가능성이 생기면 내심 북한 붕괴를 은근히 바라던 사람들도 겁을 낼 겁니다. 북한 붕괴를 기다리던 보수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대량 난민은 어떻게라도 막아야 하고, 그러려면 미워도 지원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극단적인 보수 세력은 북한이 붕괴하면 우리가 접수해야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북한에 권력의 진공 상태가 온다면 중국이 어떤 식으로든 먼저 개입하지, 우리 헌법 질서가 곧바로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을 겁니다. 북한 주민들도 자신들이 헐벗고 굶주릴 때 외면한 남쪽보다는 중국에 더 끌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통일은, 동서독이 그랬듯이, 남북의 민심이 연결되어야 우리 주도로 할 수 있다고 강조해왔던 겁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자료사진 |
현 정권의 실세들은 자신들의 희망적 관측을 정당화하는 자문만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정권이 바뀐 뒤에 최악의 평가를 면하고 싶으면 내년 1년이라도 폭넓게 자문을 구해야 할 겁니다.
정세토크 독자 여러분. 2008년 7월 15일 정세토크가 처음 시작 된 후 2년 반 가까이 격주로 연재되면서 2010년 11월 22일 오늘로서 61회나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여러분의 성원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동안 애독해주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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