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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엄마, 재능 OUT 되면 집에 올 수 있어?"

[혜화동 종탑 편지·②] 아들 채운이와 노동조합의 8년 동거기

2007년 재능교육(주)은 특수고용노동자인 학습지 선생들이 결성한 노동조합은 불법이므로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단체 협약을 해지, 노조원들을 집단 계약 만료했다. 이에 반발한 해고자들은 햇수로 7년 동안 '단협 회복·해고자 복직'을 외치며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1월 "학습지 교사들도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다. 또 법원은 재능교육의 2007년 계약 해지는 부당노동행위이므로 '무효'라고 판정해, 원직 복직 가능성을 열어줬다. 하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급기야 지난달 6일 해고자 여민희(41), 오수영(40) 씨가 서울 종로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맞은편 혜화동성당 종탑에 올라 고공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시작 1895일째였던 지난달 25일에는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이 세웠던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 일수가 이들로 인해 깨지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이 흔한 풍경이 돼 버린 시대. 낯익은 풍경은 무감각을 낳는다. "혹한의 추위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잊히는 것"이라고 재능지부 유명자 지부장은 말한 바 있다. <프레시안>은 오수영·여민희 씨가 작성한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이들이 겪었던 일들,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들, 그리고 농성을 접을 수 없었던 이유들을 오수영·여민희 씨가 종탑 위에서 글로 옮겼다. <편집자>


혜화동 종탑 편지
① '분신' 막고자 오른 종탑, "내려갈 수 있을까"

2005년, 임신과 출산

3800명의 힘을 모아 만든 재능교육 교사 노동조합은, 2001년 파업 이후 사측의 탄압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때 조합 가입률 100퍼센트를 달성했던 금천지국에선 지국장의 '나 좀 살려 달라'는 눈물 젖은 하소연에 잇따라 노조 탈퇴자가 발생했다. 급기야 2004년 2월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20대 초반 신입 교사가 '그만두려면 위약금 300만 원을 내야 한다'는 지국장의 거짓말에 가슴앓이를 하다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고 쓰러져 가는 노동조합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노조는 끝없이 추락했다.

재능교육에 입사해 4년 넘게 일하며 상처가 늘어갔다. 그러다 2005년 봄, 나네(아들 김채운의 태명)를 갖게 되면서 휴식이 필요해 노조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 담당 의사는 임신 초기인 만큼 유산 위험이 있으니 휴직을 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출산 휴직 후 6개월 안에 일터로 복귀하지 않으면 재계약이 어려울 것 같아 임신 9개월이 되도록 악착같이 회사에 다녔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줄 알았던 뱃속의 나네는 출산 예정일 2주 전에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맞았다. 갑자기 양수가 줄고 탯줄이 영양 공급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렇게 채운이를 나는 유도 분만으로 어렵게 출산했다.

세상으로 힘겹게 나온 아이는 호흡 이상 때문에 엄마한테 제대로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한 채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심장중격결손(ASD·심장에 구멍이 뚫린 상태)'이라고 했다. 아이도 없이 친정에서 산후 조리를 하는데, 어른들이 걱정하실까 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참 많이 울었다. 두 주가 지나 엄마 품으로 돌아온 채운이는 잠도 안 자고, 젖도 못 먹고 자지러지게 매일 울었다. 하지만 백일이 넘어가면서 젖도 잘 빨게 됐고, 다행히도 아이는 병치레 없이 잘 자라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상처에도 하나씩 새살이 돋아났다.

2006년 여름, 현장 복귀

▲ 채운이. ⓒ오수영 제공

아이가 비로소 어렵게나마 젖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런 아이를 떼어놓고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복귀하지 않으면 재계약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근처에 사는 시어머니댁에 아이를 맡기고 출근을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재능교육은 수업을 주지 않았다. 지국은 본사에서 수업을 주지 못하게 한다고 했고, 본사는 지국이 줄 수업이 없다고 했다.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아침마다 채운이를 힘들게 떼어놓고 지국으로 출근해서 버텼다.

8월 여름휴가가 끝나고 나서야 지국에서 수업을 하나씩 할당해줬다. 수업을 가게 된 곳은 정말 넓은 지역이었다. 회원이 많지 않아 대부분의 시간을 이 집 저 집에 홍보지를 꽂으면서 돌아다녔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그 길로 시댁에 갈 수가 없어 대교 눈높이 농성장으로 갔다. 채운이를 출산할 즈음 대교는 노동조합 간부를 해고했고, 노조는 대교 본사 앞에 천막을 쳤다. 용역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301일간 농성을 벌였다. 그 끝에 학습지 노동조합 최초로 복직 합의서를 쟁취했다. 곧이어 또 다른 학습지 회사 구몬학습의 부정 영업 희생자 고(故) 이정연 교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 처벌, 유족 보상이 이루어졌다. 한없이 추락하던 노동조합이었지만, 소수라도 남아 끈질기게 싸운 결과로 얻은 값진 승리였다. '이제 더는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학습지 기업들이 우리를 해고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2007년, 남편의 해고와 재능지부 농성 투쟁 시작

채운이가 돌을 지나고 이제 막 첫 걸음마를 뗐던 2007년 1월. 어린이 교육 업체 '한솔교육' 주니어 플라톤 교사로 일하던 남편이 갑자기 해고됐다.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신분이 공개된 데 따른 일이었다.

남편과 동료들은 한솔교육 본사가 있는 마포 태영빌딩 앞에 봉고 차량을 세워 두고 농성을 시작했다. 나 역시 금요일마다 시어머니에게 채운이를 맡겨 두고 한솔 본사 앞 투쟁에 결합했다. 주말에는 남편이 나 대신 아이를 봤고, 나는 종일 봉고차에서 농성을 벌였다. 엄마 사랑에 굶주린 채운이는 간혹 주말에 같이 있는 날이면 종일 칭얼거렸다.

2007년 5월, 재능교육지부는 조합원들과 교사들의 반대에도, 삭감된 임금안에 합의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현장은 참혹하게 망가져 갔고, 수천의 교사들이 현장을 떠났다. 단협을 체결했던 노조 집행부는 사퇴했지만, 누군가는 이 어려운 시기에 다시 노조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채운이는 당시 한참 걸음마를 배우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연로한 시어머니는 힘들어하셨고, 남편의 복직 투쟁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누구도 노동조합 활동을 결의하지 못하는 상황.

"제가 하겠습니다."

몇 번의 회의 끝에 명자 언니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명자 언니가 지부장을 결의했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2007년 12월 21일, 농성 투쟁 시작

ⓒ오수영 제공

본사 앞 천막 농성과 관련한 회의가 밤늦게까지 이어지던 날이었다. '채운이를 재우고 회의에 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아이와 함께 잠들어버렸다. 잠에서 깬 후에야 천막 농성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잔뜩 겁이 났다. 막막했다.

천막 농성에 대해 재능교육의 반응은 예상보다 격렬했다. 천막은 채 세워지기도 전에 죄다 부서졌고, 바닥에 깔려고 가져온 스티로폼도 산산조각이 나곤 했다. 사측과 이틀간의 전쟁을 치르고, 일요일이니 별일 있겠나 싶어 시어머니 댁에 아이를 보러 갔다.

전화가 왔다. 그날은 농성에 결합하던 누군가의 생일이었고, 현장 교사들이 그래서 저녁을 집에서 챙겨와 함께 농성장에서 먹으려 했었다. 그런데 음식을 펼치자마자 10년 넘게 얼굴 맞대며 일했던 재능교육 직원들이 시커멓게 몰려와 동료들의 사지와 머리채를 잡고, 험한 욕을 퍼부었다고 했다. 그나마 바닥에 깔아두었던 비닐마저 걷어갔다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많은 선생님들이 농성에 참여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저 회사를 그만두거나, 숨죽여 일하는 게 그들이 선택한 생존 방식이었다. 이렇게 모든 선생님의 임금 삭감을 막아보려던 노동조합의 농성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끔찍한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며 천막 앞 날짜판에 적어놓은 농성 일수가 하나씩 커졌다. 채운이는 그래도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2011년 3월, 지부장 단식과 삭발 투쟁

2010년 가을, 비정규직 최장기 투쟁 사업장이었던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투쟁과 거대 자본 '현대'를 상대로 벌였던 동희오토 해고자들의 투쟁이 승리했다. 공장에서 쫓겨난 소수의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사회적 관심과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 승리했기에 남다른 기쁨을 느꼈다. '이제 재능으로 가자'는 외침. 고립된 싸움을 사회적 관심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2010년 겨울, 연일 영하 15도를 기록하는 추위 속에서 재능지부 투쟁은 다시 잊히고 있었다. 결국 이 막다른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2011년 3월 유명자 지부장이 단식 투쟁에 돌입했고, 나를 포함한 노조 간부 5명이 삭발을 했다.

삭발을 한 날 오후, 나는 남대문 시장에 가서 싸구려 가발을 샀다. 내가 집으로 들어가기 힘들어할 게 걱정이 됐던 남편이 농성장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잠을 잘 때는 가발을 쓰고 있는 게 불편해, 남편과 채운이를 함께 재운 후에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잤다.

어느 날 밤에는 채운이가 새벽에 일어나 방문을 두들겼다. 가발을 찾아 쓰는 그 잠시 동안 아이가 얼마나 문을 열라고 아우성을 치던지…. 삭발을 한 첫 주말에는 가발을 쓴 채로 보냈지만, 월요일이 되니 삭발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너무 가려웠다. 결국 가족들에게 삭발을 공개하기로 했다.

상황 설명을 하자, 어머니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모자를 벗어보라고 했다. 모자를 벗자 어머니가 웃었다. 채운이도 따라 웃었다. 채운이에겐 요즘 축구 선수 차두리 머리가 유행이라 엄마도 따라 머리를 깎았다고 말했다. 머리고 어느 정도 자라나고 난 후부터 채운이는 가끔 예전의 빡빡머리를 얘기하며, 다시는 머리를 깎지 말라고 한다. 아마 다른 엄마들과 다른 엄마의 모습이 상처로 남았던 모양이다.

2011년, 7월 입원

명자 언니의 단식 투쟁이 끝나고 회복을 위해 애쓰는 시기. 당시 나는 밀려드는 스트레스로 남편과도 삐걱거렸다. 여름이 시작되며 시름시름 앓더니 7월에 들어서자 두 주 동안 열이 내리지 않았다. 결국 쓰러져 응급실로 가게 됐고, '급성패혈증'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한 주 동안 중환자실에서 항생제로 샤워를 했다. 다행히도 고비를 넘겨 일반 병실로 옮겼고, 채운이를 다시 만났다. 다른 때 같았으면 참 많이도 칭얼거렸을 텐데, 채운이는 아픈 엄마를 옆에 두고 조용히 혼자 잘 놀았다.

퇴원을 하고 이번에는 채운이가 아팠다. 귀가 아프다고 하기에 중이염이라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머리부터 등까지 아이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기 때문에 생긴 통증이라고 했다. 아이는 이 고비도 잘 넘겼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잘 적응했고, 잘 먹고 잘 자라주었다.

2013년 2월 6일, 종탑에 오르다.

행정법원은 지난해 11월 학습지 교사들도 노동자로 인정해야 하며, 사측이 2007년 단행한 계약 해지는 부당노동행위이므로 무효라고 판결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특수고용노동자에게도 노조법이 적용될 수 있도록 관련법을 발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와 비슷한 대선 공약도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사측은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공식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더는 일을 미뤄둘 수 없었다. 그간 고강도 투쟁을 벌이자는 논의가 몇 차례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난 아이가 있고, 시어머니와 살고, 또 실무 전반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항상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만은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남편은 왜 지금 고공 농성을 하면 안 되는지를 열심히 설명할 것 같았다. 종탑에 오르기 전 날인 지난달 5일, 채운이를 아침 일찍 학교에 보내고 집안 정리를 했다. 그냥 나오려다 편지 한 통을 집에 남겨두고 나왔다.

너무 멋지고 씩씩한 착한 아들 채운아!

엄마가 한 달 정도 채운이를 못 볼 것 같아. 더 길어질 수도 있고 금방 올 수도 있어.

이제 아홉 살이고 2학년이 되니 혼자서도 씩씩하게 할 수 있지?
엄마는 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채운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지켜볼 거야.

어디 가냐구? 재능OUT 시키려고.
빨리 끝내려면 모든 에너지를 모아 강력한 파워 슛을 날려야 하거든.
그러려면 당분간 에너지를 모으는 데 집중해야 하기에 다른 일들은 할 수가 없어.

사랑하는 아들 채운아!
엄마가 돌아올 때면 우리 채운이를 더 많이 사랑할게.
동화책도 재미있고 실감나게 읽어주고, 포켓몬 카드게임도 배워서 한판 붙자.
따뜻한 봄날이 오면 꽃구경도 하고 바다에 가서 채운이 좋아하는 회랑 고기도 많이 먹자.

엄마는 채운이가 약속했으면 하는 일이 있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2학년 올라가면 새로운 친구를 3명 사귀어서 엄마한테 이름을 알려줘.
엄마가 없어서 할머니가 많이 힘드실 거야.
네가 할머니 식사 준비하실 때 숟가락 젓가락 정도는 식탁에 놓자.
혼자서 20분 안에 밥도 먹어야 해.
아빠랑 사이좋게 놀기.
어렵겠지만 운동도, 공부도 열심히 하자.

엄마가 채운이 진짜 사랑해!
채운이가 태어나서 건강하게 자라줘서 정말 기쁘고 행복해. 더 씩씩한 모습으로 만나자.
밥도 잘 먹어서 다시 볼 땐 130cm 돼서 놀이동산에서 못 타본 거 신나게 타자.

2013.2.5.엄마

남편은 나의 고공농성 소식을 SNS를 통해 전해 듣고,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야 서방님한테도 안 알려주고 뭐냐?"

잠시 후 "무기한이냐?"

그렇다고 했더니 "안녕"이란다.

그날 저녁 남편은 집에 들어가 어머니께 상황을 전해드리고, 채운이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채운이에게 문자가 쏟아졌다.

ⓒ오수영 제공
"미워미워미워미워미워(분노의 스마일 아이콘 다섯 개)"

아이는 문자 30개를 보내고 나서는 엉엉 울었다고 했다.

지난 설에 채운이는 동영상으로 세배를 했다. 친척들이 떠난 밤에는 다시 화가 났는지 "빨리와!!!! 분노의 이모티콘*11개"를 보냈다. 연휴가 끝난 화요일 채운이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엄마 전화하자"

바보 같은 엄마는 "엄마가 채운이 목소리 들으면 울 것 같으니 문자로 얘기하자"고 답했다.

종탑에 올라온 지 12일 만에 채운이가 아빠와 함께 종탑으로 찾아왔다. 잔뜩 긴장해 마음이 콩닥거리고 눈물이 났는데, 아이는 눈을 껌뻑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드라큐라 성 같은 종탑 계단과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종이 아이를 주눅 들게 했나 보다. 아니면 지저분한 엄마의 모습이 낯설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품에 잠시 안겼다가 채운이는 아빠한테 가버렸다. 게임을 하겠다며 핸드폰을 찾는다. 엄마랑은 눈도 잘 안 마주친다. 아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백기완 선생님이 주신 세뱃돈을 채운이에게 주고, 안 먹고 모아두었던 초콜릿도 줬다. 잠깐 화색이 도는 듯하다가 다시 게임을 찾는다. 오랜만에 본 아이의 얼굴은 참 작아져 있었다.

2월 말 갈아입을 옷을 챙겨 채운이와 남편이 다시 종탑으로 왔다. 집을 나올 때 썼던 편지에서 '한 달보다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고 했더니, 한 달쯤 지났으니 이제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나 보다. 아이는 이제 3월인데 안 내려오냐고 묻는다. 아직 재능 OUT이 안 돼서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얘기했다. 채운이는 "어차피 해결도 못 할 거면서 뭐하러 올라갔느냐"며 엄마를 원망한다. 어차피 해결도 못할 거면서….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엄마를 향한 아이의 그리움이 점점 더 커진다. "빨리 와! 화났어!"라는 채운이의 문자가 밤마다 들어온다.

아이는 내게 묻는다.

"재능 OUT 되면 이젠 집에 있을 수 있어?"
"채운이 중학교도 가고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교도 가야 되는데 돈 벌어야지 어떻게 집에 있어?"
"뭐야. 엉엉."
"대신 채운이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만 일할게."
"정말?"


'그런 게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안하다. 채운아!' 종탑에서 육아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아빠를 통해 준비물을 준비시키고, 수학 문제풀이를 점검하고, 밥은 먹었는지, 뭘 하고 놀았는지, 친구는 사귀었는지, 짝꿍은 누구인지, 방과 후 수업은 재미있는지….

채운이와 노동조합의 8년 동거기의 결말은 어떻게 끝날까. 해피엔딩이길 간절히 바라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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