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분신' 막고자 오른 종탑, "내려갈 수 있을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분신' 막고자 오른 종탑, "내려갈 수 있을까"

[혜화동 종탑 편지·①]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 첫날

2007년 재능교육(주)은 특수고용노동자인 학습지 선생들이 결성한 노동조합은 불법이므로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단체 협약을 해지, 노조원들을 집단 계약 만료했다. 이에 반발한 해고자들은 햇수로 7년 동안 '단협 회복·해고자 복직'을 외치며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1월 "학습지 교사들도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다. 또 법원은 재능교육의 2007년 계약 해지는 부당노동행위이므로 '무효'라고 판정해, 원직 복직 가능성을 열어줬다.


하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급기야 지난달 6일 해고자 여민희(41), 오수영(40) 씨가 서울 종로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맞은편 혜화동성당 종탑에 올라 고공 농성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이 흔한 풍경이 돼 버린 시대. 낯익은 풍경은 무감각을 낳고, 무감각은 망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혹한의 추위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잊히는 것"이라고 재능지부 유명자 지부장은 말했다.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잡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기록'이다. <프레시안>은 종탑 농성 중인 오수영·여민희 씨가 기록한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이들이 겪었던 일들,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들, 그리고 농성을 접을 수 없었던 이유들을 두 해고자가 종탑 위에서 글로 옮겼다. <편집자>

▲ 빨간색 옷을 입은 사람이 오수영 씨, 파란색이 여민희 씨. ⓒ정택용 사진작가 제공

2013년 2월 6일. 이날은 재능교육 학습지 해고자들이 '노동조합 인정, 해고자 원직 복직'을 외치며 길거리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한 지 1875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이날은 제가 재능교육 학습지 선생님으로서 아이들과 마지막 수업을 한 지 1875일째가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날은 저와 동료 해고자 오수영이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맞은편 혜화동성당 종탑에 오른 날입니다.

종탑에 오르기 전날 밤이 생각납니다. 밤새 심장이 두근거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아침이 왔고, 지난밤 챙겨놓은 작은 가방 하나를 달랑 둘러메고 수영이와 혜화동성당 입구에 들어섰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을 텐데, 괜히 주변을 살피게 됐습니다. 슬쩍슬쩍 성당 본당으로 들어가 종탑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습니다.

다행히도 며칠 전 사전 답사를 왔을 때처럼 종탑으로 향하는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성당 측에 양해를 구하지 못한 채 들어섰기에, 혹시라도 누군가의 눈에 띄어 옥상으로 오르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됐습니다. 캄캄한 계단. 불도 밝히지 않고 한 발씩 조심스레 내디뎠습니다. 오래된 나무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누군가가 이 소리를 들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심장이 조여들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최대한 사뿐하게 5층 높이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계단 끝에는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종이 매달린 천장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가 보였습니다. 뚜껑이 닫힌 출구. 저 출구를 열면 우리가 농성을 시작할 그곳, 종탑 옥상입니다.

일단 종탑 옥상 가까이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깊은숨을 쉬었습니다. 이제는 천장 입구까지 연결된 나무 사다리를 오를 차례.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나무 사다리는 야속하게도 중간이 끊겨 있었습니다. 수영이가 먼저 올라봤다가 내려오고, 다시 제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가방을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도 올라보고. 이리저리 시도를 해봤지만, 도저히 사다리의 끊긴 부분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아…. 어쩌나, 이대로 실패하면 안 되는데…."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그러던 중 나무 사다리 아래에 있던 수영이가 "여기! 여기! 이곳으로 오르면 되겠어!"라며 벽에 박힌 철근을 하나씩 밟으며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안전 장비 하나 없이, 오래된 철근 몇 개에 체중을 실어 수직으로 선 벽을 오르는 수영이. 그런 수영이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금세 온몸이 얼어버렸습니다.

씩씩하게 벽을 올라, 마침내 천장 출구 가까이게 도달한 수영이가 말했습니다.

"안 되겠어…. 뚜껑을 열 수가 없네…."
"왜?"
"뚜껑이 철사로 잔뜩 감겨 있어…. 장비가 필요해."


종탑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기 뚜껑에 5mm 굵기의 철사가 여러 번 감겨 있어요. 이걸 끊어야 하니 장비 좀 사다 주세요."

하지만 그때 시간은 이른 아침. 철물점이 아직 문을 열기 전이라 동료는 편의점에서 겨우 1mm 굵기의 철사에나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니퍼를 사다 주었습니다. 부실한 장비지만, 어떻게든 해보자는 생각으로 뚜껑을 감은 철사를 끊어보려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난관.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겨우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프레시안(최형락)

고공 농성의 계기가 됐던 날이 생각납니다. 장기화할 대로 장기화한 투쟁. 재능교육 해고자 8명은 지난해 12월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싸울 것이냐"란 주제로 심각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조합원들은 하나씩 아이디어를 내놨습니다.

"본사 로비를 점거하자!"
"농성장을 시청에서 본사 혜화동으로 옮길까?"
"분신…."

순간 '분신'을 말한 해고자의 얼굴을 모두 쳐다봤습니다. 그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결연했습니다.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그는 이어 말했습니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인정받고 회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분신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들고 있어…."

그랬습니다. 우리는 무려 6년째 천막 농성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잔인하고도 잔인한 재능 자본을 우리는 충분히 겪었습니다. 이제는 천막 농성 이상의 조금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 시기인 것을 조합원들 각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분신과 같은 극단적 방법이 아닌, 하지만 재능 사태를 해결할 투쟁 전술이 필요했습니다.

이 토론이 있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수영이가 맥주나 한잔하자며 저와 다른 해고자 두 명을 불렀습니다. 지난해 8월 사측과 교섭이 최종 결렬된 후 우리가 무력감에 빠져 있다는 문제의식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단식과 고공 농성을 해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수영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고공 농성을 하겠다고 의지를 밝혔습니다.

"고공 농성…. 언제 내려오게 될지도 모르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선뜻 결심하지 못했습니다. 미처 생각해본 적 없는 투쟁 방식이었고, 내가 처한 여러 가지 상황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진행 중인 고공 농성들이 떠올랐습니다. 현대차 사내 하청 노동자 최병승·천의봉 씨가 오른 송전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문기주 정비지회장과 복기성 비정규직지회 수석부회장, 한상균 전 지부장이 오른 송전탑이 떠올랐습니다. 또 재작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타워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을 했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도 생각났습니다.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올라갔을까? 제대로 씻을 수도 없을 텐데. 생리적인 현상은 어떻게 해결하지? 나라면 도저히 결심할 수 없었을 텐데…. 대단하다….'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일단 두 사람이 고공 농성을 하기로만 정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 더 고민한 후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번에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 긴 시간 투쟁을 함께한 동지, 지현 언니의 해고자 딱지를 내가 벗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결심을 굳히고 나니,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가장 탐스러운 딸기 세 팩을 사서 평택 쌍용자동차 송전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송전탑에 있는 세 농성자를 바라보며 다짐했습니다. '나도 저들처럼 잘 버티고, 반드시 승리해서 내려오겠다'고 말입니다.

고공 농성까지는 두 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종탑에 오르기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마치 버킷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목록)를 작성하듯 하나씩 적어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종탑에 오른 지 18일로 41일째. 단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제공
어디서 그런 괴력이 솟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풀릴 것 같지 않던 철사가 조금씩 풀리더니, 마침내 전부 다 풀렸습니다.

"수영아, 내가 다 풀었다!"

기쁨의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위로 들려 했는데, 헉! 얼마나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몸이 온통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는 걸 그때야 알았습니다. 그날은 기온이 영하 15도였는데 말입니다.

'장하다! 여민희!' 나 자신을 칭찬하며 옥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뚜껑을 밀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뚜껑은 들썩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전날 펑펑 쏟아졌던 함박눈 때문에 뚜껑 주변이 얼어붙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철사를 푸느라 제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습니다.

이번엔 수영이 차례. 수영이가 다시 올라 몇 번의 시도 끝에 뚜껑을 마침내 열었습니다. 작은 구멍으로 빛이 한가득 쏟아져 내렸습니다. 빛을 따라 철근을 하나씩 하나씩 밟으며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하얗게 눈에 덮인 커다란 십자가가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른 이곳은, 흡사 해방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농성 1875일째. 이렇게 우리는 해방공간, 혜화동 성당 종탑 옥상에서 농성 첫날을 시작했습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