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렌시나오 장군의 병원'이란 이름의 히마니 지방 병원은 손과 발, 머리 등에 붕대를 감은 부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170여 명의 환자들이 이곳에 있지만, 어린이 환자 37명만 병상을 받았고 나머지는 복도에 임시 매트를 깔고 누워 있었다.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 속에 파리를 쫓는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 히마니 병원. 병상이 부족해 복도까지 환자들로 가득하다.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 |
히마니에 있는 유엔 지원본부에서 자원봉사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인 황부연 씨에 따르면 병원에 의약품과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수도 포르토프랑스에 비해 그나마 상황이 낫다고 한다.
특히 도미니카의 대통령 부인이 전날 이곳을 방문해 전국의 앰뷸런스 동원 채비를 갖추겠다고 약속했고, 국경 지역에 난민 캠프 설치를 지원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숨통이 트였다. 난민 유입을 우려한데 따른 궁여지책이라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이었다. 아이티 지진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는 나라는 아무래도 이웃 나라 도미니카라고 그들은 덧붙였다.
병원 밖에는 의료 지원과 행정을 담당하는 유엔 직원들과 환자를 후송해 오는 미 공군, 도미니카 육군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수송 헬기들이 물과 구호식량 등을 싣고 떠오르고 있었고, 환자를 태우고 내리는 헬기들도 있었다.
구호를 위해 아이티로 입성하려는 각국의 구조대와 국제기구 관계자들은 이곳에서 유엔이 제공하는 말라리아 약을 먹고 파상풍 주사를 맞았다. 이날 정오 이곳에 도착한 한국 구조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티의 위태로운 풍경
히마니 병원에서 2~3km 쯤 떨어져 있는 국경을 오후 2시 40분 통과했다. 국경을 표시하는 3곳의 철조망 부근은 아이티를 탈출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특별한 표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아이티인들은 개조한 트럭은 물론 버스 천장 위에까지 앉아 조국을 떠나고 있었다. 히마니 일대에는 이미 자국을 빠져 나온 아이티인들이 도미니카 사람들보다 더 많다고 도미니카 주재 한국대사관 관계자가 말했다.
▲ 아이티를 탈출하기 위해 도미니카와의 국경지대로 모여든 아이티인들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 |
국경과 국경 사이 약 50m 길가에는 이른바 '국경 무역'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인들이 노점을 차려 두고 신발이나 음식, 옷가지 등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시골 풍경을 보며 왜 이 나라가 중남미에서 '못 사는 축'에 속한다고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도로는 포장된 곳과 그렇지 않은 구간이 번갈아 나왔고, 초등학교로 보이는 곳에서는 아이들이 변변한 교실도 없이 야외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아이티 쪽으로 넘어가자 도미니카는 괜찮게 사는 나라였다. 그곳에서 본 풍경은 왜 아이티가 '서반구의 최빈국'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포장도로는커녕 오른쪽으로 커다란 호수를 끼고 달리는 도로 옆으로는 절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거듭되는 허리케인과 지진에 의해 무너진 산들은 차량 교행도 어려울 정도로 복구 아닌 복구가 되어 있었다.
국경 지역에서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길,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참담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거나 집 난간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벽돌을 얼기설기 쌓아 만든 집들은 지진이 아니더라도 금방이라도 붕괴될 것 같았다. 그나마 철근 몇 개를 넣어 지은 콘크리트 집들도 위태로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지진의 피해가 거의 없는 지역이었지만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를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검은 피부의 사람들과 뜨거운 날씨는 그런 연상을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지진 피해가 전쟁보다 더하다고 하지만, 아이티의 시골은 원래부터가 분쟁지역인 듯 했다.
▲ ⓒ로이터=뉴시스 |
한국 구조단, 야영지 설치 후 곧바로 탐색 나가
한국 정부가 파견한 긴급 구조단 35명과 도미니카에서 합류한 자원봉사단 6명, 취재진,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 일행 등이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35분.
중앙119구조대원 25명을 비롯한 정부 구조단은 포르토프랭스 '시티 솔레일(Citi Soleil)' 지역에 있는 발전소 건설 부지로 곧바로 들어갔다. 22일까지 엿새 동안 머무는 숙영지를 짓고 구조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이티 정부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어 구조 지역을 찾는 일부터 한국 구조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도미니카 한국대사관의 참사관 1명이 이곳에 미리 도착해 각종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이곳에 건설하고 있는 '이 파워(E-Power)' 발전소는 한국동서발전과 아이티 현지 투자자들의 공동 투자로 만들고 있는 발전소다. 한국 구조대는 한국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고 치안이 거의 확실하게 확보되고 있는 이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구조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구조대의 도착과 거의 동시에 미군 약 50명도 이곳에 들어와 캠프를 차렸다.
▲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해 캠프를 짓는 한국 구조대원들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 |
한국 구조대는 쉴 틈이 없었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다음 날 본격적인 구조 활동을 위해 현장 '탐색'을 나갔다. 119구조대의 백근흠 긴급기동팀장은 "무너져 있는 아이티 중앙은행에 사람이 매몰되어 있을 것 같아서 해가 졌더라도 우선 가 봐야 한다"며 대원들을 지휘했다. 구조대들은 중앙은행 부근에서의 인명 구조 외에도, 중앙은행에 보관된 돈을 확보해 돌려주는 일도 맡을 예정이다.
포르토프랭스 시내는 수도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국경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봤던 시골 마을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사람이 훨씬 많고 지진 피해가 확연히 보인다는 점에서 이곳이 '말로만 듣던 그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포르토프랭스는 가까스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며칠 동안 마비됐던 공항은 어느 정도 복구 됐다. 미국 연방항공청(FAA)이 직접 통제하고 있는 이 공항에는 미군 수송기들이 수시로 뜨고 내렸다. 시티 솔레일에 있는 축구장에서 노숙을 했던 이재민도 크게 줄었다고 발전소 건설 관계자는 소개했다. 이 축구장은 지진 발생 직후 며칠 동안 건물이 무너질까봐 무서워 피신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17일 오후 현재 보이는 천막은 10개 미만이었다.
대사관 관계자에 따르면, 미군과 유엔치안안정화군인 '미누스타'가 적극 개입하면서 포르토프랭스의 치안은 점차 안정화되어가고 있다. 지진 이후 시골에서 올라와 판자촌에 거주했던 시민들의 낙향이 줄을 이어, 인구가 많이 줄어 든 것도 치안 안정화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안정'은 지진 직후의 상황에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여전히 상황은 최악이다.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들은 치워졌지만, 최대 20만 명의 사망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매장한 시신이 2만5000구에 불과하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발굴해야 할 유해가 8~9배나 많다.
진원지인 카르푸 지역의 피해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1~2층 집들마저 모조리 무너져 있고 거리는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서울의 종로에 해당하는 곳도 폐허가 되어 시신이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일부 시민들이 잔해 속 남은 물건들을 꺼내가고 있다고 한다. 중무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거리가 여전히 있다.
▲ 지진 닷새째. 피해 복구와 구호 활동은 진행되고 있지만 상황은 여전히 열악하다. ⓒ로이터=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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