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책당국자들은 지금은 디플레이션 위험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섣불리 통화긴축정책으로 전환하면 디플레이션에 빠진다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같은 저명한 학자들도 현재는 디플레이션 위험이 높고, 통화팽창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초래될지라도 그것은 향후 몇 년 뒤의 일이라고 보고 있다.
"인플레이션 일어날 조건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도 '미국의 공공부채(America's public debt)'라는 분석 기사에서 미국의 천문학적인 부채가 미래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면서도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당장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조건은 생각보다 만들어 내기 쉽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인플레이션이 되려면 돈을 많이 풀었다는 조건만으로는 부족하고, 경제가 실업률이 급감하고 기업들의 완전 가동될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
시장에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기대한다면 인플레이션이 빨리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도널드 콘 미연준(Fed) 부의장은 최근 "인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는 상승하기보다는 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전망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지금 당장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감내하는 길을 택하지 않으면, 또다시 거품 형성과 붕괴, 스태그플레이션을 거쳐 그야말로 다시는 헤어나기 힘든 일본식 장기 디플레이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문제는 구조조정을 선제적으로 하는 선택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책당국자들은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 정치적으로 쉬운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현재 디플레이션 위험이 더 크기 때문에 이른바 출구전략은 신중하게 시기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 거품 붕괴와 이에 따른 더 큰 재앙을 경고하는 루비니 교수. ⓒ로이터=뉴시스 |
그러나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해 명성이 높은 루비니 교수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3~4년 뒤 이번 위기보다 더 큰 위기가 도래할 것을 거듭 경고하고 있어 주목된다.
루비니 "투기적 원유 가격, 또다시 타격 줄 것" 우려
루비니 교수는 최근 미국의 지수펀드 정보사이트 <인덱스유니버스>와의 인터뷰에서 "거대한 유동성이 모든 종류의 자산으로 몰려들고 있으며, 경제가 기대에 못미칠 경우 한꺼번에 붕괴될 것"이라면서 더 큰 위기가 닥칠 가능성을 경고했다.
우선 요즘 배럴당 80달러 선까지 오른 원유 가격에 대해서 그는 거품이라고 진단했다. 지난해 여름 배럴당 145달러까지 치솟았던 원유 가격은 올해 초 30달러 선까지 급락했다. 수요 공급이라는 펀더멘털로 볼 때 수요는 2005년 수준으로 떨어지고 석유 재고는 사상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배럴당 30~50달러 정도가 적정 수준이라는 것이다.
루비니 교수는 "현재 배럴당 원유 가격 중 30달러 정도는 투기적 수요와 이에 부화뇌동하는 사재기 때문에 낀 거품"이라면서 "현 상황에서 배럴당 100달러가 넘어가면, 지난해 원유 가격이 145달러에 이르면서 글로벌 경제에 타격을 준 것과 맞먹는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지난해 원유 가격이 배럴당 145달러일 때는 그나마 글로벌 경제가 성장하고 있을 때였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제가 무너진 뒤 회복하는 중이기 때문"이라면서 "수요 공급의 펀더멘털과 상관없이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가 넘어가면 원유 수입 국가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산 거품 걷잡을 수 없이 붕괴할 것"
그는 "지난해 오일 쇼크로 타격을 받았던 미국, 유럽, 일본, 중국, 인도 등 모든 나라들이 여기에 포함된다"면서 "현재 원유 가격은 완전히 투기성으로 오르고 있어 글로벌 경제에 위험한 요소라는 점에서 눈여겨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가 넘어가 글로벌 경제에 또다시 타격을 줄 것으로 우려하면서, 원자재 등 자산 가격 전체에 대해서 "현재 엄청난 거품이 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이유에 대해 루비니 교수는 "미국 등 도처에 제로금리의 달러가 퍼지고 있으며,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있어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로 대출을 해 자본 이득을 얻고 있다"면서 "이런 자금이 상품, 주식 등 위험 자산에 투자되고 있어 예전보다 더 큰 거품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루비니 교수는 "이 거품은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붕괴에 돌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루비니 "나는 시장 자율 규제를 믿지 않는다"
이런 거품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 정책당국의 해결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정책당국의 의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낸 보고서에서 미국의 금융시장의 수준을 영국과 호주에 이어 3위로 평가 절하했다.
게다가 루비니 교수는 "전반적으로 미국의 금융시장은 3위라고 할 수 있지만, 금융안정성 면에서는 55개국 중 38위에 불과하다"면서 "이미 미국은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었으며, 그 이유는 주로 규제와 감독이 부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금융 규제 실패는 제도가 미비한 탓이기보다는 규제당국이 규제하기를 꺼린 탓이 크다"면서 "그래서 나는 시장이 자율적으로 규제한다는 원리를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시장의 자율 규제는 작동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이데올로기였을 뿐이다. 자율 규제는 규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이성적 과열과 유명무실한 내부 리스크 관리가 있을 뿐인 시장에서 자율규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위험 관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수익을 올리는 사람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신용평가기관도 수수료를 고객인 기업에게서 받는 현실에서 이해충돌에서 자유롭지 못해 평가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규칙 대신 신념에 치우쳐 규제를 무시한 결과는 재앙이었다"면서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교훈을 얻었으며, 보다 단순하고 엄격하고 구속력 있는 규칙을 갖추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값이 1500달러 넘어간다는 것은 넌센스"
이어 루비니 교수는 투자자들을 위한 조언으로 흔히 '안전자산'으로 알려진 금 투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현재 금값이 온스당 1050달러까지 치솟았지만 금은 추가적인 가격 상승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자산거품이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디플레이션 압력 속에 있기 때문에 조만간 경기침체가 닥치게 되고 모든 종류의 거품 낀 자산들은 붕괴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는 것.
루비니 교수는 "금 가격이 오를 수 있는 요인은 두 가지 뿐"이라면서 "하나는 인플레이션인데, 지금은 시설 과잉에 수요는 약하기 때문에 디플레이션 압력이 크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주요 선진 경제국들이 모두 10%가 넘는 실업률을 넘볼 정도로 고용 시장이 열악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은 현재는 물론 상당 기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디플레이션 속에서도 금값이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는 '아마겟돈' 상황, 즉 또다른 공황이 닥쳤을 때라고 루비니 교수는 주장했다.
그러나 루비니 교수는 "현재 공황 위기는 피한 상태"라면서 "따라서 금값이 온스당 1500~2000달러까지 갈 것이라는 황금광(狂)들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인플레이션도 없이, 공황도 없이 금값이 올라갈 이유는 결코 없다"면서 "금값이 온스당 1000달러를 넘어갈 수는 있지만 인플레이션이나 또다른 공황 상황을 맞지 않는 한 현재 수준보다 20~30% 더 오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루비니 교수는 "상당 기간 동안 인플레이션이나 공황이 닥칠 가능성은 별로 없다"면서 "3~4년 이후에는 그런 상황이 올지 모르지만 임박한 일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의 수석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도 "금 가격이 인플레이션 위험을 나타내는 선행지표로 보기는 어렵다"면서 1980년 1월 금값이 급등했을 때의 예를 들었다. 당시 인플레이션은 진정되기 직전의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금가격은 인플레이션 위험을 나타내기에는 모호한 지표라는 것.
또한 울프는 "지금의 과도한 생산력을 감안하면 미국과 세계가 당면한 위험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미국의 경기회복을 지리멸렬하게 만들 복병으로 꼽히는 유력한 후보는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이 꼽히고 있다.
루비니 교수는 최근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 문제가 이제 막 터지기 시작했다"며 "약 2조 달러 규모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이 미국 경기 회복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상업용 부동산 부실 본격화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이 본격화하는 시점은 내년이다. 상업용 부동산 대출은 5년 또는 10년 만기로 미국에서는 2005년부터 상업용 부동산 대출이 본격 진행됐으며, 내년부터 만기가 집중 도래한다는 것이다.
손성원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도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 문제는 경기보다 2년 정도 후행한다"며 "경기침체가 시작된 지 2년 뒤인 올해 말부터 상업용 부동산 부실이 소비 침체와 맞물리면서 미국 경기 회복을 지연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미국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신호탄은 울렸다. 미국의 대표적 상업용 부동산 대출 전문회사인 캡마크파이낸셜그룹이 25일(현지시간) 파산보호를 신청한 것이다.
캡마크의 상업용 부동산 대출 규모는 100억 달러(약 11조7700억원)가 넘는 것으로 집계돼 업계의 연쇄파산 등 파장이 작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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