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했던 영욕의 한 시대를 위대한 국민과 더불어 거침없이 써내려갔던 거인. 존경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고 또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언제나 '지지와 비판' 사이에서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숙명과도 같은 존재.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은 이제 '계승과 극복'이라는 두 과제를 우리에게 남기고 영면에 들었다.
회상 1
1970년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얘기다. 경주로 향하는 수학여행 길에서 담임 선생님은 '김대중이 역전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였다. 호기심 많은 소년은 김대중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의 책 '내가 걷는 70년대'를 접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통일이 무엇인지 그런 심각한 주제보다 가수 남진이 더 좋았던 철부지에게 DJ는 젊고 멋있는 청춘스타였다. 이듬해 4월 17일로 역사는 기록한다. 전주유세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총통제가 온다'고 외치던 그의 연설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까까머리 소년은 유세가 끝난 뒤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단상으로 쫓아올라갔다. 하지만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그 옆에 있던 사람의 사인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소년의 손에 들린 DJ의 책에는 'YS Kim'이라는 사인이 적히게 됐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세상은 이미 유신치하였다. 그사이 DJ는 도쿄납치 사건을 겪고, 76년 3.1 구국선언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가택에 연금되어 있었다. 유신반대 투쟁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79년 5월 제1야당 신민당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박정희 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김영삼을 총재에 당선시켜야 한다는 DJ의 연통이 돌았다.
YS는 3년 전 각목전당대회 끝에 축출된 상태였고 당시 신민당 지도부는 유신 정권에 기생하고 있었다. 깡패들을 막기 위해 학생들도 마포 신민당사로 집결했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게 했던 힘은 아마도 용기가 아니라 양심이었을 것이다.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한강의 얼음은 녹았지만 서울의 봄은 끝내 오지 않았다. 광주의 원혼을 뒤로 한 채 나는 군에 입대해야 했고, 사형 집행을 면한 DJ가 미국으로 추방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회상 2
그리고 10년 세월이 흘렀다. 내가 특전사 법무참모를 끝으로 군 생활을 마쳤을 때 대통령은 노태우로 바뀌어 있었고 야만적인 3당 합당으로 민주화는 미궁에 빠졌다. 어느 날 노태우 대통령은 법이 정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자기 마음대로 연기시켰고 DJ는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나는 몰상식에 저항하고 싶었다.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대통령이 '선거가 너무 많다'는 자의적인 판단을 근거로 법을 어기고는 통치행위라고 강변함으로써 앞으로 대통령을 본받아 법을 계속 어기고 합리화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법에 무지한 사람들을 보조하는 변호사로서 막대한 심적 고통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 소송 취지였다.
재판부는 피고 노태우의 위법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원고 임종인이 겪은 심적 고통과 직접 관련성을 찾기는 어렵다고 판결했다. 처음부터 손해배상금을 받을 목적의 소송이 아니라 대통령의 위법사실을 법정에서 판단 받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92년 대선은 결정적인 승부였다. 해방 이후 수십 년을 거치는 동안 온갖 모순을 축조해온 반역의 역사를 우리를 과연 뛰어넘을 수 있는가. 그러나 3당 합당과 보수화의 물결 속에 지역과 이념의 벽에 갇힌 DJ는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정계은퇴를 선언하던 그날 아침의 처연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대선이 끝나고 두 달 뒤 DJ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젊은 변호사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DJ는 자신은 이제 정계를 떠난 사람이라며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라고 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비결이었다. DJ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노점상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의 표정을 자세히 살핀다'고 말했다.
회상 3
내가 '한통련'(한국민주통일연합)의 문제를 알게 된 것은 92년 8월이었다.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인권위원장 자격으로 일본에서 열린 '원폭금지 세계대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당시 통역을 맡은 동포가 바로 한통련 회원이었던 것이다.
72년 가을 DJ는 신병 치료를 위해 머물고 있던 일본에서 유신쿠데타를 맞았다. 뜻하지 않은 망명객이 된 그는 일본에서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했고 재일한국인 조직인 민단의 개혁파들과 뜻을 모으게 되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자연스럽게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한통련의 전신)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DJ가 납치되자 일본에 있던 한민통 인사들은 피랍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며 구명운동에 나섰고, 이후에도 줄기차게 유신반대 투쟁을 전개하며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78년 재일교포유학생사건을 조작해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였고, 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DJ가 한민통 의장을 맡았다며 반국가단체수괴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97년 마침내 정권이 교체되고 DJ가 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이제 반국가단체라는 한통련의 누명이 벗겨지고 회원들의 입국 금지가 해제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바뀌었을 뿐 세상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전히 수구세력의 '빨갱이'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던 DJ에게 한통련 문제는 스스로 풀기엔 너무나 뜨거운 감자였다.
나는 2000년 시민사회의 뜻있는 분들과 함께 '한통련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고국방문은 허용하면서도, 공안당국은 여전히 곽동의 선생을 비롯한 한통련의 귀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DJ가 퇴임한 뒤였다. 2003년 한통련을 포함한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나는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사실상 전향서인 반성문을 써야 한통련 인사들의 귀국을 허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조치가 '독립군이 귀국하는데 친일경찰이 반성문 내라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논리로 맞섰다.
2003년 9월 19일 한통련 인사들은 마침내 아무런 조건 없이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DJ의 동교동 자택에서 30년 만에 역사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한통련 인사들과 DJ의 감개무량해 하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 '옛 동지들과의 감동적인 해후' 2003년 9월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국을 방문한 한통련 대표들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한통련은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쿄 납치 사건 때 DJ 구명운도에 앞장섰던 재일민주인사들의 단체다. 사진 맨 오른쪽은 이날 만남을 주도적으로 성사시킨 임종인 전 의원(당시 해외민주인사 귀국추진위 집행위원장). ⓒ한통련 제공 |
계승과 극복
95년 정계복귀 이후 DJ의 변화된 행보는 그가 열어낸 민주화 시대의 성과와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97년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화와 민족화해의 시대를 열어낸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DJ의 업적일 것이다. IMF 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만년 인권 후진국의 오명을 씻어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무엇보다도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으로 그가 소개될 때 대한민국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가.
사형집행을 거부하고 복지문제를 국정의제로 삼았던 첫 번째 대통령이 그였다는 사실은 내겐 또 다른 특별함으로 남는다. 그러나 IMF 위기를 계기로 본격화된 사회양극화는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은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 시대가 극복해야할 과제로 남았다.
허나 누가 무슨 말을 하든, DJ는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일궈낸 대통령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가 온 겨레를 대표해서 받은 노벨상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두려움 없이 싸웠던 위대한 한민족의 상징으로 세계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것은 지난 5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이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는 6.15 9주년 기념 강연은 유훈이 되고 말았다. 때마침 한반도에 다시 해빙의 조짐이 비친다. DJ는 살아서도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올 때마다 특유의 혜안으로 평화의 길을 열어내곤 했다. 그의 마지막 길을 국장으로 예우하고 북에서도 조문단이 내려올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그의 시대를 계승하고 극복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이제 우리 후손들의 몫이 되었다. 그는 떠난 것인가? 결코 아닐 것이다. 철의 실크로드를 달리는 우리 겨레의 앞길을 밤하늘의 별이 되어 불 밝혀줄 것이다. 이제 그 길을 달리자. 삼가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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