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G20 금융정상회의 전후로 미국, 한국 등 주요 증시에서 과열이 우려될 만큼 주가가 오르고 있으며, 정부와 시장 쪽에서 끝임없이 '경기 하강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전망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상 지급 불능 상태라는 월스트리트의 대형상업은행들은 이른바 '어닝 서프라이즈'라는 좋은 실적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듯 로런스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NEC)은 금융시장 경색이 완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경기 후퇴가 몇개월 내에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경제 회복에 진전이 나타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를 금방 망할 것처럼 묘사하던 월가의 유력 금융지도 돌연 한국을 세계 경제가 회복된다는 조짐을 보여주는 '희망의 싹'으로 띄워주며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하지만 현재 금융위기에 관한 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두 학자가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나섰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와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다.
▲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로이터=뉴시스 |
크루그먼 교수는 13일(현지 시간) 뉴욕 맨해튼 외신기자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최근의 주가 상승에 대해 "사람들이 앞서 나가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경기 회복 기대감으로 투자 심리가 살아나고 있지만 실질적인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회복이 아니라 천천히 악화되고 있는 것"
그는 "경기 둔화의 속도가 완화되고 있다는 신호가 있다는 점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이는 천천히 악화되고 있다는 것일 뿐 바닥을 치고 올라온다는 신호는 없다"고 말했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경기 후퇴가 올해 안에 끝날 가능성이 있다는 등 경기 회복에 대한 일부 낙관론에 대해 그는 '경기 후퇴'가 형식적인 정의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경기 후퇴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없지만, 경기 후퇴가 모든 지표의 하락이라고 가정한다면 몇몇 지표들이 개선될 경우 경기 후퇴가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경기가 회복됐다는 체감은 내년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경기 회복을 체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실업률을 꼽았다. 지난 2001년 경기 후퇴기에도 11월 산업생산과 국내총생산(GDP)이 소폭 증가세로 돌아서자 경기 후퇴가 종료됐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실업률은 이후 1년 반 동안 상승세를 지속하는 등 2001년 뿐만 아니라 과거 경기 후퇴기마다 종료 선언 이후 실업 사태가 지속됐다는 것이다
"경기 후퇴 종료 선언해도 실업률은 상승세 지속할 것"
이에 따라 크루그먼 교수는 "경기 후퇴가 9월에 끝난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지만, 실업률은 내년말까지 상승세를 지속할 것이며, 2011년까지 경기 회복을 체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나아가 크루그먼 교수는 G20 금융정상회의 이후 국제적인 합의가 이뤄진 대규모의 통화팽창 정책에 대해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과 위기를 어떻게 끝낼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금융시장 정상화를 위한 매우 공격적인 정책, 통화 완화책, 경기 부양책 모두 위기를 완화시키는 전략이 될 수 있으며, 이같은 전략이 도움이 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면서 "하지만 위기를 어떻게 끝낼 수 있느냐에 대한 전례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사상 초유의 글로벌 대공황 올 수도"
그에 따르면, 1930년대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났지만, 2차 대전이 어떻게 경제를 확장시켰는지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수출 호황으로 끝난 반면 현재의 위기는 글로벌 경기 침체라는 점에서 역시 적용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위기가 자칫 대공황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크루그먼 교수가 생각하는 이른바 '위기 탈출 전략'은 무엇일까. 역시 그는 금융 부실 자산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는 "내 견해를 말하자면, 우선 주요 은행들의 부실 자산을 청산해야 한다"면서 "또한 민간 부문의 재무제표가 건전해지고 소비가 되살아날 때까지 지속적인 경기 부양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로이터=뉴시스 |
미국 정부와 월가의 은행들도 부실 자산 해소를 강조하는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부실 자산을 위해 내놓은 해법은 사실상 '분식회계'와 '위장된 공적자금 투입'이라고 비판받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시가평가제 완화는 안이한 기대에 근거"
최근 미국 정부는 은행들이 자산을 시가로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회계기준 완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해 크루그먼 교수는 "한 마디로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라면서 "손실을 한꺼번에 반영해 부실 청산을 위해 무엇이든 해보자는 진보적인 생각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은행들의 부실이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기대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그는 회계 기준 완화 조치에 대해 "어떤 측면에서는 은행권의 부실 처리가 지연됐던 일본과 유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서 "최근의 경제 상황, 특히 대규모 실업 사태 등을 고려할 때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상대적으로 꽤 괜찮았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상황은 그 때보다 더 좋지 않다"고 우려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혈세로 쓰레기를 비싸게 사주는 것"이라고 혹평한 미 재무부의 '민관투자프로그램(PPIP : Public Private Investment Program)'에 대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사실 시가평가제가 유명무실해지면서 PPIP는 부실자산 매매 자체가 이뤄지기 더욱 힘들게 됐다. 민간 투자자들이 부실자산에 대해 지불하려고 하는 가격과 은행들이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가격이 맞아 떨어지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미 월가의 주요 은행들은 부실 자산을 과대평가하면서 시장을 깜짝 놀라게 하는 실적 발표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4대 은행에 속하는 웰스파고는 루비니 교수가 씨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BoA)과 함께 사실상 지급불능 상태로 지목한 부실 은행이다. 하지만 지난 9일 웰스파고 은행은 1분기에 30억달러의 순이익이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도 맞장구를 치고 있다. 경기 악화에 대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느냐는 이른바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한 19개 대형 시중 은행들이 모두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얘기를 은근 슬쩍 <뉴욕타임스>에 흘려주었다.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는 이미 의미 상실"
이에 대해 루비니 교수는 자신의 홈페이지(www.rgemonitor.com)를 통해 "웰스파고는 시가평가제를 무력화켜 부실을 숨기고 손실을 축소시켰다"면서 "정부의 '스트레스 테스트'도 '사기 테스트'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맹비난했다.
실제로 <로이터 통신>이 한 투자분석기관의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현재의 경제상황이 계속될 경우 내년 1분기까지 웰스파고의 총 손실이 무려 1200억 달러에 달하는 등 주요 은행들의 부실이 심각하다.
또한 루비니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경제성장률과 실업률 그리고 주택 가격 하락 등 3대 주요 지표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스트레스 테스트의 기준으로 설정한 2009년 시나리오보다 이미 악화됐으며, 심지어 최악의 시나리오보다도 나쁜 상태라면서 "따라서 이런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는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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