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루비니 교수는 금융 위기로 인해 미국 금융기관들이 입을 신용 손실이 3조6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며, 미 금융권이 보유한 현금은 1조4000억 달러 뿐이기 때문에, 이 예측이 맞다면 미국의 금융 시스템 자체가 지급불능 상태가 된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월가와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미국의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묘안'을 짜냈다. 루비니 교수가 추정치를 산정할 때 전제로 한 회계기준 자체를 바꿔 버린 것이다.
▲ 회계기준 변경으로 곤경을 벗어나려는 월스트리트. ⓒ로이터=뉴시스 |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금융회계기준위원회(FASB)는 지난 주말 월가의 은행들에게 자산(특히 채권) 평가 재량권을 대폭 부여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부실자산, 재량껏 평가해도 된다?
지금까지 회계기준은 자산 가치를 시가로 평가하는 것이지만, 채권의 경우 은행이 자체 개발한 평가모델 등으로 '재량껏' 가치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 채권들이 실제 가치보다 지나치게 저평가돼 시장의 신뢰를 훼손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조치가 나온 취지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은 공개석상에서 FASB의 회계 기준 변경을 촉구한 바 있다.
루비니 교수의 손실 추정은 주택저당증권(MBS) 등 금융위기를 부른 파생상품의 가치를 폭락한 시가로 장부에 즉각 반영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완화된 기준대로 자산가치를 계산할 경우 엄격하게 시가에 따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대규모 자산 상각의 부담이 줄게 된다. 전문가들은 FASB의 시가평가 기준 완화로 미 은행들의 1·4분기 수익이 20%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엄청난 부실을 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씨티그룹이 돌연 지난 1, 2월에 순이익을 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회계기준 변경을 예상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FT "FASB의 회계기준 변경, 금융계 로비와 의회 압력 때문"
부실자산을 상각하거나 이에 대응하는 충당금 등을 쌓지 않고 순이익이 났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지만, FT는 "FASB가 금융계의 로비와 의회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갑작스럽게 이 같은 조치를 취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번 조치에 대한 따가운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다. 월가의 엄연한 부실을 부실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회계방식이며, 월가의 투명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독약을 뿌렸다는 것이다.
현재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계 확률상 예측 불가능한 영역을 가리키는 '검은 백조(black swan)' 현상으로 갈파한 나심 탈레브 뉴욕대 교수는 "시가평가 회계기준을 없애는 것은 모래사장에 머리를 묻는 것과 같다"면서 "시가평가 회계기준을 바꾸면 금융시스템의 불투명성은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채권왕'로 불리는 빌 그로스 핌코 대표도 "금융회사 자산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오히려 은행들이 투자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새로운 회계규정, 신뢰 훼손 우려"
8만명 이상의 애널리스트를 대표하는 미국 공인재무분석사(CFA)협회는 "새로운 규정이 규제당국과 미국 회계기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지적했고, 도이치증권도 "위험한 회계규정에 우려를 표명한다"며 밝혔다.
하지만 당분간은 '사실상 파산상태'로 알려진 씨티그룹 등 월가의 대형 상업은행들이 이번 조치의 수혜자로 떠올랐다. 씨티그룹, 웰스파고,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의 주가는 지난 주말 큰 폭으로 올랐다.
MBS 등의 부실이 엄청난 것으로 알려진 씨티그룹은 대형 상업은행들이 이들 채권을 매각하기 전까지는 실제 평가 손실을 장부에 반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번 조치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최근 발표한 민관합동투자프로그램(PPIP)과도 충돌한다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와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에 의해 '쓰레기를 비싸게 사주는' 사실상의 공적자금 투입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다.
"회계기준 변경으로 부실자산 매각 더욱 어려워져"
하지만 시가평가 회계기준이 대폭 완화됨에 따라 부실자산의 '적정가격' 산정은 더욱 어려워지면서 거래 자체가 성립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부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은행들이 정부의 프로그램에 따르는 규제를 받으면서 지원을 받기보다는, 부실자산을 그대로 보유하면서 매각을 지연시키려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시가평가 완화 규정은 PPIP와 상치된다며, 완화된 회계기준에 따른 가격으로 매수자들이 매입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은행들 역시 그들이 원하는 가격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자산을 그대로 보유하려는 경향이 높아질 것으로 판단했다.
회계기준 변경으로 부실을 감출 수 있는 금융시장에는 투기판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뉴욕증시 등 주요 금융시장에서 1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주가가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만, 헤지펀드 등 투기자금의 공세로 인한 '위험한 유동성 장세'라는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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