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 경제학자도 이해못한다는 FRB의 구제금융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이번 금융위기에 가장 정통한 경제학자로 꼽히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조차 이날 <뉴욕타임스> 블로그를 통해 "FRB의 조치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다"면서 "뭔가 이상한 정치적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 사실상 미국 정부가 국유화한 모기지업체 패니매. ⓒ로이터=뉴시스 |
크루그먼 교수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서민들에게 주택을 보급하겠다는 공적 업무를 위해 정부 주도로 설립된 패니매와 프레디맥은 이후 민영화됐지만, 이른바 정부후원기업(GSE)으로 분류돼 사실상 파산 위기에 몰리면 정부가 구제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특수법인이다.
실제로 금융위기로 이들 업체들이 휘청거리자 지난 9월 초 미국 정부는 수천억 달러를 투입해서라도 이들 업체의 채권을 보증하겠다고 나섰다. 이런 조치를 두고 시장에서는 미국 정부가 이들 업체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실상 국유화 조치'라면서, 미국 정부가 재무부 국채처럼 보증한다는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자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한사코 "국채처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크루그먼 교수는 "이미 이들 업체의 부채는 정부의 채무가 되었는데, 굳이 국채를 발행해서 이들 업체의 부실자산을 매입하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정부가 그저 이들 업체의 부채를 정부 채무로 전환한다고 선언만 하면 될 것을 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는가"라고 지적했다.
회계장부에도 없는 거대한 블랙홀
부시 행정부의 공적자금이 이상하게 투입되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은 이것뿐이 아니다. '대마불사'의 논리에 따라 미국 정부는 세계 최대의 보험업체 AIG에 대해서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고도, 위기가 해소되지 않자 여러 차례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는데, 불과 한 두달 사이에 대부분이 용처로 모르게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세계 최대의 금융기업 씨티그룹이 위기에 처하자, 미국 정부는 도저히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기업이라며 유례없이 신속하게 사실상 3600억 달러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크루그먼 교수를 비롯해 많은 전문가들은 씨티그룹도 AIG처럼 계속 손을 벌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만일 장부에 기록돼 있는 자산들이 점점 부실이 커지기 때문이라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구제금융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면, AIG나 씨티그룹에 뭔가 감춰진 거대한 부실이 따로 있는 것이며, 이럴 경우 도대체 그 규모가 얼마인지도 가늠할 수 없다.
이때문에 그 커다란 '블랙홀'은 분식회계이거나 사실상 분식회계에 가까운 회계기법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씨티그룹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장부 외 자산(off-balance sheet asset)'이 바로 대표적이다. 씨티그룹은 장부에 나타난 총자산 2조500억 달러 중 부채가 1조9000억 달러가 넘는다. 그뿐이 아니다. 장부 외 자산은 1조2300억 달러에 달한다.
금융업계에 따르면, 씨티그룹의 장부 외 자산은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투자는 SIV(구조화투자전문회사)라는 일종의 자회사가 주로 담당한다. 문제는 SIV 등의 거래는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다가 주택가격 거품이 붕괴되면서 부실화되는 자산이 있으면, SIV로 떠넘겼다. 일종의 하수구 역할을 맡은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이것은 사실상 분식회계나 다름이 없다. 이런 편법적인 회계처리가 가능한 것은 바로 금융규제당국이 완전히 무력화됐기 때문이다.
뒤늦게 회계규정 강화 움직임
이때문에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면서 비판이 거세지자 뒤늦게 전세계 금융감독당국은 부외거래 자산을 장부 상에 기재하는 방향으로 회계규정을 개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월가 은행들은 부채담보부증권(CDO) 등 위험자산을 SIV 등을 통해 부외로 거래함으로써 감독당국의 규제를 피해왔다. 그러나 위험자산의 부외 거래가 신용위기의 피해를 확산시키고 정확한 피해 규모의 산출을 어렵게 하는 원인으로 지적되면서 회계 규정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금융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회계규정이 바뀌면 미국 은행들은 최대 5조 달러에 달하는 부외거래를 장부상에 기입해야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부외거래에 동원된 자금은 대부분 부채이고 부실화 가능성이 높은 자산들이기 때문에 장부에 반영된다면, 자기자본비율이 급격히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은행들의 대출여력이나 투자등급에도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높다.
월가의 투자은행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을 때도 이들 업체들이 금융당국의 규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논란이 됐다.
월가의 상업은행도 사실상 규제 사각지대
하지만 일반인들의 예금을 받기 때문에 금융당국의 철저한 규제를 받는다는 씨티그룹을 비롯한 월가의 대형 상업은행들도 동반 부실화된 배경에도 바로 SIV가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상업은행들도 규제의 사각지대인 SIV를 통해 수익창출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 시장은 거래되는 자산의 가치가 확실하며, 대차대조표가 정확하고, 대출의 위험도 제한적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월가의 금융업체들이 이런 식으로 불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는데, 투자자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SIV를 청산하겠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7년 말 미국 재무부와 씨티그룹은 전세계 금융권으로부터 1000억달러의 자금을 조성해 SIV 자산을 매입해 청산하려는 이른바 '슈퍼 펀드' 계획을 제시했다.하지만 이 계획은 미국 금융권이 저지른 문제에 전세계를 끌어들인다는 비난 속에 좌초됏다.
장부 외 자산은 장부에 반영된 자산보다 부실 가능성이 훨씬 크다. 최근 씨티그룹이 800억달러 규모의 SIV 자산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실제 가격을 200억달러로 산정했다.
이처럼 장부 외 자산은 언젠가는 씨티그룹의 손실로 반영해야 하는 '부실 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위기로 주목받는 자산지준제도
씨티그룹 사태는 이미 몰락한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의 대안으로 주목받은 유니버셜뱅크 모델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유니버설 뱅크는 상업은행 안에 투자은행 업무를 포함시킨 것이다.
유니버설 뱅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자산지준제도(Asset-Based Reserve Requirements: ABRR)'라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 제도는 은행의 예금부채에만 지준을 부과하는 현행 예금지준제도와 달리 모든 금융기관의 대출자산에 대해 준비금을 쌓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현재 자산지준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교훈으로 도입할 대안으로 이와 유사한 '스페인 모델'은 크루그먼 교수 등 권위있는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전하고 있다.
1980년대말에 극심한 금융위기를 겪은 스페인은 은행이 SIV과 같이 장부 외 거래를 할 경우에도 이와 맞먹는 규모의 자금을 확보하게 하고, 대출이 급증할 경우 준비금 비율이 자동적으로 높아지는 다이내믹 준비금(dynamic provisions) 제도 등을 도입하고 있다.
스페인은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 자체 금융권 부실이 거의 발생하지 않은 드문 사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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