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차적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세력의 집권, 무력화된 야당과 시민사회의 후퇴
필자는 2008년에 들어와서 보수세력(사실은 과거 권위주의에 향수를 가지고 있는 세력)이 정권과 의회,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를 모두 장악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이들 권위주의 세력과 시민사회와의 싸움 속에서 진화해 나갈 것이라고 예견한 적이 있다.
특히 야당인 민주당이 신자유주의의 이념에 포획되면서 '준(準)여당화' 된 상황에서 앞으로의 정국은 보수(권위주의) 세력과 시민사회와의 갈등 및 견제와 균형 속에서 전개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측은 촛불집회가 확대되고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야당이 헤매는 것을 보면서 맞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공권력이 법치의 이름으로 들어오고, 언론이 이러한 권위주의적 강경책을 옹호하고, 상당수의 집회 참여자가 잡혀 들어가는 상황에서 그 예측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어느 순간에 시민사회는 보이지 않고, 보수(권위주의) 세력이 전방위에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우리의 시야에서는 시민사회도 사라졌고, 야당도 사라졌고, 그래서 민주주의의 기초인 견제와 균형도 사라졌다. 물론 시민사회가 졌다는 건 아니다. 시민사회는 잠시 후퇴해 있을 뿐이다.
여하튼 매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달성된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시민사회가 사라지고 있고 또한 그들이 정당성을 가지고 집권세력을 거의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비민주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너무나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선거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절차가 잘 지켜지면 그를 통해 집권하고 당선된 사람들은 매우 떳떳하고 당당한 정당성을 갖게 된다. '떨어진 놈'만 바보고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통해 특정 세력이 국정 및 대한민국 전반을 장악하게 되면, 이에 대한 도전세력과 저항세력은 제 아무리 국제기구나 인권단체가 도와준다 해도 공권력에 의한 제압의 대상이 되고, 또 공권력이 법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게 된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지금은 우리가 그들을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적법하게 뽑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최악의 조합을 갖게 되었다. '절차적 민주주의 + 권위주의적 집권여당의 전국적인 장악 + 야당의 이념적 포획'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집권 권위주의 세력이 아무리 타당하지 않은 일과 정책을 밀어붙인다 해도 정당성을 가지고 공권력과 법치의 이름으로 국정을 일방적으로 끌고 나갈 수 있다.
시민사회도 당분간은 이들을 견제하기 힘들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20%대에 머물러도, 촛불이 아무리 타 올라도, 일단 몇 년은 가고 싶은 대로 갈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당한 권위주의를 생산해 낸 최악의 조합을 가지게 된 것이다.
2. 최악의 경제적 조합
: 경제위기, 감세와 '건설 뉴딜', 고령화와 청년실업, 조급한 한미 FTA, 북한 리스크 상승
경제위기가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경제위기에 대한 부정과 인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정말 소름이 끼친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다 밝혀지고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 기본 방향은 감세와 정부지출 확대라고 한다. 그리고 은행권과 건설업계 및 부동산 시장을 살리기 위해 막대한 국민세금을 쏟아 붇기로 했다. 정부의 돈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것이 보인다.
지난 1997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가장 많이 나왔던 개념 중의 하나가 사회안전망 (social safety net)이었다.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요즘엔 어디서도 이 단어를 들을 수 없다. 현 정부가 그토록 추종했던 신자유주의자들조차도 사회안전망의 중요성을 피력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얘기 혹은 그걸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피력을 거의 들을 수 없다. 감세와 지출확대로 돈은 없어지는데 정부는 앞으로 무슨 돈으로 사회안전망을 만들 것인가?
문제는 사회안전망이 없는 상태라면 지금의 경제위기에서 가장 피해를 보게 될 사람들이 자영업자, 중소기업, 그리고 청년실업자들이라는데 있다. 고용의 대부분을 소화해 내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가장 먼저 쓰러지기 시작할 것이고, 반면 대기업들은 풍랑을 비교적 잘 헤쳐 나갈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의 고용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따라서 대기업이 하청 중소기업들을 쥐어 짤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결국 신규고용이 늘어나지 않아 청년실업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정부는 이들에게 재활의 시간과 기회를 주는 사회안전망을 만들어도 모자랄 돈으로 오히려 건설업체, 은행권을 도와주면서 이른바 과거의 잘못을 대신 책임져 주는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를 만들고 있다.
더군다나 한국의 고령화 추세는 세계적으로 매우 빠른 속도를 자랑(?)하고 있다. 현재의 추세라면 2020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14%를 넘어서고, 2035년에는 약 47%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위기로 청년실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거기에 고령인구가 늘어나면 이는 매우 불균형적인 부양구조를 만들게 된다. 게다가 정부는 주요 세원을 줄이고 엉뚱한 곳에 지출을 늘리겠다고 하니 앞으로 고령화와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적 비용 및 사회안전망은 어디서 감당하게 될지 막막하다.
감세 정책에 있어서도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법인세 등 주로 상위층에 부과되는 세금을 주로 깎으면서도, 진정으로 소비를 진작해 내수를 일으킬 수 있는 감세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위층이 과연 세금 덜 내는 대신 그 돈으로 내수를 이끌어줄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에 더해 경제위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고 자구책을 찾아야 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사회안전망을 만들 생각도 없이 성급하게 한미 FTA를 추진하자고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한미 FTA로 생겨날 구조조정을 사회안전망 없이 어떻게 감당하려고 할지 매우 우려스럽다. (물론 미국에서 한미 FTA가 순조롭게 비준될지는 다른 문제지만)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최악의 조합을 보게 된다. '경제위기 + 상위층에 대한 감세 + 은행·건설업에 대한 정부 지급보증 + 건설업에 집중될 가능성이 큰 이른바 뉴딜 + 고령화와 청년실업 + 한미 FTA + 빈약한 사회안전망'이 그것이다.
결국 정부는 줄어드는 세입과 늘어나는 지출로 정말로 '작고 찌그러진 정부'가 될 것 같고, 여기서 경제가 빠른 속도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고령화와 청년실업, 그리고 사회안전망에 필요한 재원이 급속도로 고갈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사회안전망 없이 성급하게 한미 FTA를 추진하게 되면 그 정치적·경제적 코스트는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만일 북한이 이쯤에서 매우 불안정해지거나, 갑작스럽게 우리가 북한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우리가 그걸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조합은 결국 국가부도의 조합이 될 수 있다.
3. 최악을 피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 운이 없으면 또 다른 최악의 조합을 맞을 수 있다. 일본과 미국에서 선거를 통해 원칙주의 대북 강경론자가 권력을 잡고 한국이 그 노선을 따라가는 외교적인 측면의 조합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재로서는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진 2개의 조합이 가져올 위력만 해도 가히 가공할 만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미국, 일본 등 다른 국가들에서는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운 좋게 정권교체 가능성이 동시에 발생해 신자유주의나 과거의 정책적 오류들을 수정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알려진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도 당선된 지 얼마 안 됐지만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신(新)브레튼우즈 체제를 주창하는 등 정책과 철학에서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새 정부가 출범한지 아직 1년도 안 됐다. 그리고 이 정부는 정책의 방향전환이 너무나도 고집스럽고 경직되어 있다. 불행히도 한국은 이렇게 몇 년은 더 갈 것 같다. 그 몇 년 동안에 최악의 조합이 줄줄이 들어서게 되면 정말로 한국은 복구하기 어려운 재앙 속에 던져질지 모른다.
현재의 진행상황으로 볼 때 최악의 조합은 정치와 경제 면에서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은 이 조합을 바꿀 수 있을까? 누가 바꿀 수 있을까?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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