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영화장비가 암만 첨단화돼도 영사기사는 반드시 있어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영화장비가 암만 첨단화돼도 영사기사는 반드시 있어야"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6/17] '고희의 현역 영사기사' 박정식 한국영사예술인협회 회장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불이 꺼진 영화관의 좌석 뒤편 영사실에서 혼자 필름을 돌리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감동시키는 사람들. 남들 쉬는 휴일이나 명절이 더 바쁜 영화관의 숨은 일꾼. 바로 영화관의 필름을 책임지는 영사기사입니다. 흔히 영사기사하면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어린 소년 토토에게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준 오래된 극장의 영사기사, 알프레도를 떠올리는 분들 많을 텐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최고령 현역 영사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알프레도, 한국영사예술인협회 박정식 회장을 초대해 필름과 함께한 그의 영화인생 50년을 되돌아보고 지난 세월 달라진 영화관 풍경과 영사기사들의 근무여건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한국영사예술인협회 박정식 회장입니다. 박정식 회장은 1938년 경북 예천 출생으로 56년 예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유랑극장부터 시작해 여러 극장에서 영사기사로 근무했으며, 현재 산본시네마극장에서 영사기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사)한국영사예술인협회 전국대의원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돼 협회장직도 겸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세를 보니까 올해 딱 고희시네요. 지금도 현역 영사기사로 활동하고 계신 거죠? 언제 시작하셨습니까?

박정식 : 그렇습니다. 제가 이쪽에 손을 댄 건 1957년인가 8년 그때 나이 19살 때. 사실 대학교 원서 사러 갔다가 바람이 들어서 이 계통으로 들어서서... 그래서 대학교 가는 걸 포기하고 영사기를 사서 전국을 다니면서 영화를

박인규 : 그런데 어떻게 대학교 입학원서 사러 가셨다가 영사기사로 바뀌셨습니까?

▲ ⓒ프레시안

박정식 :
왜냐면,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 대구까지 내려가면 몇 시간씩 갔거든요. 종일 가다시피 해서, 숙소를 잡았던 데가 반월당에 있는 모, 우리 일가인데... 그 양반들 집에 자게 됐는데 그 양반이 이걸 했어요. 그래서 그 날 저녁에 자갈마당에서 영화를 한다고 한 번 가볼래? 해서 따라나가 구경했는데 가보니까 손님도 많고. 그 날 저녁 얘기하다보니까 손님도 많고 돈도 많이 들어오고 돈도 벌 것 같고. 학교를 가고 배우는 것도 결과적으로 사회 나가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닌가 싶고 일찍이 이런 걸 해도 좋지 않겠나 해서 대학교 원서를 사와서 집에서 있다가 다시 포기하고 영화계통에 들어갔습니다.

박인규 : 자갈마당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극장이 아니고 야외인 모양이죠?

박정식 : 네. 광목을 포장을 쭉 돌리고 영화를 했어요. 그때 손님들 오면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보고 서서 보는 야외극장이었죠. 대구 시내에도 극장이 그땐 한 개인가 두 개 있었을 거예요. 6.25 사변 직후니까

박인규 : 그렇다 하더라도 대학 들어가실 나이인데 영사기를 사셨다면, 그때 상당히 비싼 거 아니었습니까?

박정식 : 그때 내가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9살 때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조금 남겨두고 가셨어요. 재정이 조금은 허락되다 보니, 재산을... 모친 혼자 계시니까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박인규 : 그럼 영사기를 사셔서 그걸 가지고 지방을 다니면서 야외에서 그렇게, 일종의 야외극장 주인이셨네요. 저도 사실 한 60년대 전반기에 저희 초등학교에서 포장치기라고 합니까? 광목 펴놓고 본 기억이 나는데, 박회장님 그 당시 보니까 변사도 따라다녔다고 해요.

박정식 : 네. 변사를 데리고 다닌 이유가, 그때 사실 기계가 좋지 않으니까 필름 자체는 그때만 해도 녹음이 들어가 있었는데 기계 자체가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또 영화가 필름 자체가 옛날에는 셀룰로이드라고 해서 자꾸 떨어지고... 사실 영화나 필름은 양쪽에 있는 콤마를 못 쓰게 되면 필름은 못 쓰게 되는데요. 그래서 자꾸 자르고 자르다 보면 필름이 짧아지고, 녹음으로는 말이 연결이 안 되니까 대화가. 그래서 변사를 데리고 다니면 그때 또 변사들이 상당히 있었어요. 아주 참 잘하는 변사들이 있어서 데리고 다니면 참 그때만 해도 재밌는 일도 많았고. 심지어 국민학생들을 동원해서 영화를 했는데 이 변사가 얼마나 그걸 잘했는지, 학생들이 울어서 중간에 영화구경하다가 그때 영화가 장화홍련전이었는데 교장이 심지어 이래선 안 되겠다 아이들 바깥에 바람 좀 쐬고 와서 다시 합니다. 변사들이 그때 참 잘했었어요

박인규 : 그 당시에는 지방을 다니시면서 그렇게 유성영화지만 필름이 짧다 보니까 변사가 하셨다고 하셨는데 영화관람료는 얼마나 받으셨어요?

박정식 : 관람료가 그때 30원 20원이었습니다.

박인규 : 그게 요즘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요?

박정식 : 요즘으로 치면 아마 4, 5천원 정도 안 됐을까 싶은데요. 그때 커피 한 잔에 15원씩이었으니까.

박인규 : 요즘 커피 비싼 데는 4천원 5천원 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한 팔구천원돈 될 수도 있겠네요.

박정식 : 하여튼 구경하러 오려면 시골서는 쌀 됫박이나 바쳐야 했는데

박인규 : 예전에 쌀 갖고 오고 그런 거 받으셨습니까?

박정식 : 우린 그러진 않았어요. 현금만 받았는데

박인규 : 돈 좀 버셨습니까 그렇게 해서?

박정식 : 돈 좀 벌었죠. 주위에서 있다가 지방 다니지 말고 차라리 예천에 극장 하나 만들어서 고정적으로 해라, 이런 얘기도 있었는데. 사실 그때 젊은 나이에는 지방 돌아다니는 게 재미가 있더라고요. 여러 가지, 그런 재미도 있고. 그래서 어찌 하다 보니 다녔는데 다니다 보니 50년도 말 때 되니까 점점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하니까, 극장이 생기고 이러니까 포장치기극장들이 사양길에 들어서더라고. 그래서, 그때 또 마침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가고. 그래서 포장치기, 이를테면 그때는

박인규 : 유랑극장이네요 말하자면

박정식 : 우리 다닐 때 보면 지방을 다녀보면 그때만 해도 가극단들이 각 지방에 많이 다녔어요. 어떤 때는 가보면 우리는 사실 인원이 몇 명 안 되니까 비용이 별로 안 드는데 악극단들은 인원이 꽤 많거든요. 손님이 안 들어 파산을 해서 단원들은 잡혀놓고 단장은 내빼 버리고 오도가도 못하는 것도 목격했는데

박인규 : 회장님이 정식 극장에서 영사기사로 활동하신 건 언제부터세요?

박정식 : 제가 군대 갔다 와서 64년도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박인규 : 60년대는 영화계의 전성기때 아니었습니까

박정식 : 전성기였죠. 심지어는 면부까지 극장이 생길 정도로 호황을 누렸어요. 내가 제일 처음 근무한 곳이 예천 용궁면에서 했습니다.

박인규 : 극장이 있으면 영화필름 돌리는 영사기사는 대개 한 분이 하십니까?

박정식 : 아니오. 그때는 혼자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장비들이 좋지만 그때는 카본이라는 탄소막대기를 태워서 그 광채로 영화를 비추기 때문에 두 사람이 기계를 한 대씩 맡아서 하고. 또 그것도 사실 그때만 해도

박인규 : 그런 탄소막대는 타는 시간이 짧아서 그런 겁니까?

박정식 : 그렇죠. 시간이 제일 긴 게 20분 정도밖에 안 타요. 그러다 보니 필름이 한 권이 보통 천 자 정도

박인규 : 한 300미터

박정식 : 그걸 가지고 하고 이쪽 기계로... 왜냐면 탄소막대기는 비싸서 이런 동가리라도 쓰려고. 그때는 한 롤에 한 10분 정도 돌아갔습니다.

박인규 : 그럼 영화 한 편 하려면 굉장히 여러 번 바꿔줘야겠네요?

박정식 : 네. 여러 번, 그때는 12번씩 바뀌었어요. 영화 긴 건 한 20번씩 바뀌고 그랬어요. 지금 그때 사실 영화 긴 건 한 세 시간짜리도 있었고 보통 두 시간 정도 되면 열 번 정도

박인규 : 시네마천국인가요? 그 영화 보면 여름에 불 나는 장면이 있는데 여름에 굉장히 더웠습니까?

박정식 : 덥죠. 그 안에 탄소막대기불이 계속 타고. 여름에는 진짜 더워서 아무도 없으니까 빤스만 입고 다 벗어제끼고 일했습니다.

박인규 : 그럼 필름이라든가.... 예전에는 탄소막대를 태워서 광원으로 이용했고, 요즘은 디지털까지 나온다고 하던데요?

박정식 : 지금은 쿠세논이라는 게 생겨서 자동적으로 불이 붙어서, 타지도 않고 계속 불이 붙어 있으니 손댈 것도 없죠. 지금은 영화 한 편을 하는데 처음 들어오는 날 편집을 해놓으면 끝나는 날까지 손볼 일이 없어요. 필름 좋고 기계 좋지, 그러니까 지금 참 기사들이 옛날 생각하면 많이 편하죠.

박인규 : 예전에는 이른바 영화에서 비가 내린다고 하고, 시골 극장 가면 툭툭 끊어지기도 하고, 그건 필름 자체가 지금과는 달랐나보죠?

박정식 : 재질도 지금보다 훨씬 나빴고 셀룰로이드로 돼서 불도 잘 붙고... 지금은 필름재질이 원체 좋아서 당겨도 안 떨어져요. 또 지금은 영화가 전국적으로 극장에 동시개봉되는데 옛날에는 필름에 판권이 있어요. 서울판권, 영남판권, 경북판권, 경남판권 8개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그 판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 권리가 있어서 다른 필름을 가져와서 그 지방에서 하지 못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몇 작품 들어오면, 필름 몇 개 들어오면 개봉관에서 하고 한 달 정도 하고 손님 다 떨어지면 2번관에 가고, 2번관에서 어느 정도 하면 손님 다 떨어지려고 하면 시골 극장. 시골 극장에서 하는 필름은 말씀하셨다시피 비가 오고 끊어지고 했죠. 그러면 또 손님들이 휘파람을 불고 소리지르고 난리를 치기도. 그때만 해도 필름 끊어져서 난리를 쳐도 그때뿐이지 다시 돌아가면 또 조용해지는데, 지금은 그런 일 있으면 난리 나죠.

박인규 : 그때는 시작할 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중간에 들어가서 보기도 했으니까요. 지금까지 영사기사로 활동하시면서 본인이 상영하신 영화가 몇 편이나 되는지 계산해 보셨습니까?

박정식 : 대충 근간에 한 영화를 다 내가 일기를 쓰기 때문에 적어놓은 게 있긴 있는데 아마 우리나라에 개봉된 영화를 친다면 한 5분의 1은 내 손으로 돌렸지 싶은데

▲ ⓒ프레시안

박인규 :
그게 편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요?

박정식 : 많죠. 한 천여 편 안 되겠어요?

박인규 : 예전 같으면, 12번씩 필름을 갈아준다고 하면 영화 볼 시간도 별로 없었겠네요.

박정식 : 못 보죠. 작업할 때는 영화를 못 보고, 단, 영사기 옆에 꼭 붙어앉아서 카본이 떨어지면 불이 꺼지니까 꼭 그 간격을 맞춰줘야 되니까 붙들고 암만 더워도 떠날 수 없어요. 그래서 화면 잘 나가나, 불꽃 잘 붙나 보고 있지 조용히 앉아서 영화를 볼 수도 없고. 꼭 영화를 보고 싶으면 조수들한테, 그때만 해도 조수가 많았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밥만 먹여주면 와서 애들이 일하고 영화 구경하는 재미로 와서도 일하고. 그때 극장에 보통 조수들이 한 서넛 와서 있고. 저도 시골 극장에서 책임자로 있을 때 기사들을 둘셋씩 데리고 있었으니까, 두세 사람 있어야 그걸 하니까

박인규 : 영화를 차분하게 보실 시간은 많지 않으셨겠네요. 그래도 처음에 편집하고 그러실 때 보고 그러진 않으셨습니까?

박정식 : 편집할 때도 못 보죠. 필름을 가지고 편집하니까, 그건 화면을 볼 수도 없고 개봉하는 날 보는데... 우리가 보는 건 내용보다도 영화가 잘 돌아가고 있나, 화면과 음향이 재대로 나오나. 이런 에피소드도 있어요. 영화 같은 건 잘못 와서 전 극장에서 깡통에 필름을 1,2,3,4,5번 제대로 못 넣어 놓으면 바뀌는 수가 있어요. 필름을 봐서는 모르고 영화를 해봐야 하는데 권수가 제대로 안 들어가면 그런 경우가 있어서 개봉날 혹시 그런 경우 있으면 난리 나죠.

박인규 : 저희는 영사기사를 하시면 영화를 다 차분하게 보실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국내 개봉된 영화의 5분의 1을 직접 손으로 만지셨으니까

박정식 : 네. 영화 좋다는 건 사실 한 번씩 다 봤죠.

박인규 : 혹시 보신 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으십니까?

박정식 : 저번에도 내가 어디서 얘기했습니다만, 국산영화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 하는 영화. 실화를 영화로 만든 건데 그거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그게 참 기억에 남고. 외화 같은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 나오는 서부영화 같은 걸 즐겨 봤고. 근간에 80년대에는 마농의 샘을 재밌게 봤습니다. 근간에는 영화를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안 보게 되더라고요. 좀 앉아있으면 졸립고

박인규 : 사실 예전에 6,70년대에는 추석때나 설날이 가장 대목 아니었습니까?

박정식 : 그렇죠. 저는 평생을 사실

박인규 : 그럼 추석이나 설날에 제사나 차례도 못 지내셨겠네요.

박정식 : 차례는 아주 일찍이, 제가 맏이라서 안 지낼 수는 없고 일찍이 지내고 바로 극장으로 가야지요. 근무하고. 사실 여태까지, 요즘은 기계가 원체 좋아서 우리 극장에도 기사들이 셋이 같이 근무하는데 나이가 많고 하니까 명절은 나를 쉬어주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명절에 쉬는데 여태까지 사실 명절을 집에서 보내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박인규 : 부인 되시는 분이 굉장히 안 좋아하셨겠어요

박정식 : 우리 집사람이 그래서... 내가 조실부모를 해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나 그래요. 또 외동이라 장가를 퍽 일찍 갔어요. 17살에 갔는데, 그런 데다가 영화한다고 전국을 돌아다녀서 집사람 속을 많이 썩였죠.

박인규 : 회장님도 중간에 영화판을 떠나신 적이 한두 번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박정식 : 네. 70년도 들어서 영화가 사양길로 들어섰어요. 왜 그랬는가 하면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고, 특히 그때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여로를 연속극할 적에 전국적으로 여로에 대한, 아주 굉장했거든요. 심지어 지방에서는 극장이 여로 시간을 빼고 난 다음 영화를 할 정도로. 그래서 여로 때문에 휴게실에 TV를 사다 설치하고 그랬어요.

박인규 : 그럼 TV드라마 여로가 히트를 치면서 영화계에 상당히 불황이 온 겁니까?

박정식 : 네. 그래서 각 지방에 있는 면소재지 이런 데 극장들 대다수가 다 문닫았어요. 읍소재지까지 70년도 중반쯤 들어서서 문을 다 닫고 사양길에 접어들었어요.

박인규 : 그럼 70년대 전반기에 영화판을 떠나셨다가 다시 돌아오신 건 또 어떻게

박정식 : 73년도에 제가 극장에 손님이 원체 안 드니까, 그 옛날에는 대극장 아닙니까, 극장이 작은 게 없고 대한극장은 좌석이 3천석이 넘고 내가 있던 지방의 극장도 천석이 넘었거든요. 그런 극장에 저녁에 10여 명 20명씩 들어오니 유지할 방법이 없죠.

박인규 : 유지도 안 되고 일할 맛도 안 나고

박정식 : 그렇죠. 그래서 떠나서 딴 사업을 좀 하다가 결국 잘 안 되대요. 그래서 다시 이 계통으로

박인규 : 어떻게 보면 50년을, 중간에 약간의 휴식이 있었지만

박정식 : 사실 평생을 제가 이 계통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사실 다른 계통에 있을 때도 이 계통에 늘 접하고 있었고

박인규 : 후회는 없으십니까?

박정식 : 후회는 없습니다. 사실 개인이 하고 있는 극장이 자꾸 문을 닫게 돼요. 지금 내가 근무하는 극장도 멀티플렉스 대기업에 눌려서 극장이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있는 극장도 언제 문닫을지 모르겠어요.

박인규 : 박회장님이 활동을 하느냐 마느냐는 개인적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영화계가 사느냐 죽느냐가 더 중요한 거군요. 참 큰일입니다.
회장님 되신 게 작년이시죠? 그동안의 경력에 비하면 굉장히 늦게 되신 것 같습니다

박정식 : 늦게 됐다기보다도 지금 사실 우리 계통이 조금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니, 지금 아날로그로 있을 때는 우리를 상당히 필요로 하고 우리가 없어서는 안 되고. 디지털로 가도 사람이 없어선 안 되겠지만, 극장을 경영하시는 분들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 생각에는 이제 자격증 소지한 사람이 꼭 필요하냐, 이런 식으로 자꾸 얘기하는데

박인규 : 우선 말이죠. 디지털이라는 게 필름이 없어지는 겁니까? 그럼 어떻게 상영합니까?

박정식 : 그렇죠. 필름이 없어지고 이제 하나의 칩에 영화가 들어가서

박인규 : 실제로 칩으로 상영하는 데가 있습니까? 비율이 얼마나 됩니까?

박정식 : 지금 한 30% 정도

박인규 : 디지털이면 칩을 갖다 올려놓으면 되는 거니까 영화 돌리는 영사기사가 필요 없다. 실제로 그런 겁니까?

▲ ⓒ프레시안

박정식 :
필요없는 게 아니고, 암만 좋은 기계라도 사람이 없어선 안 되거든요. 그리고 그 자체도, 그 안에 쿠세논 다마라든가, 그게 폭발하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런 것도 있고 전기도 그 안에... 보통 큰 극장에는 한 5킬로 정도 전류가 흐르고 있고 전기를 사용하는데 이 모든 걸 만지는 것이 숙달된 기술자가 없으면 안 되거든요. 지금 법 자체가 공연법 제 44조에는 영사를 16밀리 이상 극장에서 하는 건 꼭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이 해야 된다고 못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네들은 앞으로 디지털로 가는데 자격증이 있어야만 되느냐, 자꾸 주장하는데, 저희들은 사실, 우리가 여태까지 우리 한국영화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 좋은 화질과 좋은 음향과 좋은 화면을 내보내는 걸 우리가 직업으로 삼는 우리로서, 지금 만약 그런 걸 아무나 와서 한다면 그게 과연 일반 관객들에게 좋은 서비스가 되겠느냐. 그리고 기술이란 게 그래요. 자기네들이 일방적으로 기술을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땐 없어도 되겠다 싶은 거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면 그 내용이 복잡합니다.

박인규 :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디지털로 갈수록 또 제대로 된 기사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박정식 : 그렇죠. 더 필요하고 더 양성시켜서 더 좋은 기술자들이 그걸 해야 됩니다.

박인규 : 현재 영사기사로 활동하시는 분이 전체 몇 분이나 됩니까?

박정식 : 지금 전국적으로 650에서 한 700명 정도 됩니다.

박인규 :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이. 자격증을 가지신 분들은 더 많은가보죠?

박정식 : 자격증 소지한 사람은 약 3천여 명 정도 됩니다. 63년도에 자격증제도가 돼서 이때까지 배출한 것이 한 3천 명 정도

박인규 : 그런데 이게 지금 갈수록 말하자면 보수나 대우도 열악해지고. 또 극장주는 자격증 있는 사람도 필요 없다, 하다 보니 어떻게 보면 영사기사라는 직업이 굉장히 사양직업처럼 돼버렸는데

박정식 :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자꾸 그런 생각을 갖기 때문에 저희들이 상당히 걱정스럽습니다. 왜냐면 영화산업이 발전하려면 관객의 호응을 얻어야 합니다. 그럼 관객의 호응을 얻자면 좋은 서비스와 좋은 화질을 보내주는 건 누가 보내줍니까. 어떤 사림이 해도 해야 되거든요.

박인규 : 영사예술인협회 회장으로서 영사예술인들의 권익향상이 가장 중요한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어렵다고 합니다만 영사기사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부라든가 극장주들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한 말씀 해주시죠.

박정식 : 제 바람은 그래요. 정부에서도 우리에 대해 잘 모르고, 우리가 얼마나 고충이 있다는 걸 잘 모르고. 우리가 사실 영화발전에 얼마나 남모르는 기여를 하고 있는데도 그 사람들은 그걸 잘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게 좀 한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회원들이 참 영화가 존재하는 한.이 영화를 관객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는 기술은 저희들 몫이니까 우리가 책임지고 할 수 있는 여건이 앞으로도 지속되고. 우리 자격에 대한, 정부에서나 주위에 영화를 구경하고 있는 관객들도 역시, 영화가 이렇게 질 좋고 모든 화질이나 음향이라든가 영화가 좋은 건 이런 분들이 있어서 서비스를 해줘서 우리가 잘 보고 있구나 하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사실. 그런데 정부에서 조금 지원을 좀 해주시면 잠 고맙겠는데

박인규 : 좋은 영화를 위하 영사기사들의 역할을 좀 알아주고 무엇보다 디지털환경으로 바뀌니까 거기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교육도 부탁한다. 그런 말씀이시네요.

앞으로 많은 활동을 해주시고요, 영사기사들의 권익향상을 위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박정식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최고령 영사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영사예술인협회 박정식 회장을 초대해 필름과 함께 한 그의 영화인생 50년을 되돌아보고 지난 세월 달라진 영화관 풍경과 영사기사의 근무여건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