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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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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탄생

[이근 칼럼] '촛불'은 좌우도 보혁도 아니다

6월 10일 저녁 8시 30분 경 촛불문화제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촛불문화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네티즌들에게 청와대의 홈페이지를 동시에 접속해 다운시키자는 제안을 한 후 불과 2~3초 만에 청와대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아니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소통이 순식간에 이루어져 공동의 행동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이 현상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우리가 모두 정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히 연결되어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공동의 '작업'을 순식간에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인 '우리'들 ⓒ프레시안

요즘 인터넷을 들어가 보면 국민들간의 연결의 정도를 소름끼칠 정도로 빠르고 강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다음 아고라의 토론방에 순간순간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몇 초 안에 수백, 수천 개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고리언'이 광화문 집회 현장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인터넷 매체와 연결되어 있고, 또 이들이 지지하는 종이 신문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결 현상은 단지 다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터넷 매체를 통해, 그리고 휴대폰을 통해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상호 엮여있다.

눈에 보이는 물체들을 다 지워버리고 오직 전자 공간상에서 주파수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 사이의 선만을 볼 수 있다면 빽빽한 밀도로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우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와는 상상이 안 될 정도의 밀도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연결시키는가?

그런데 '우리'를 연결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우리'와 연결이 안 된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해서 희생양이 되고, 도박판의 판돈이 되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우리'가 연결되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초국경적인 대기업과 외국 정부인 '저들'과 같이 한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그들' 및 '저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면서 '연결'되고 있다.

상위 10%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들, 상위 10%끼리만의 연결에 대해 '우리'가 정말로 강력한 연결을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권위적으로, 압박을 통해 '우리'를 희생시키려는 '그들'에 대항해 우리는 뭉치고 있다.

'우리'를 연결시키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안에 있다. 즉 우리가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고, 또 촛불을 밝히는 우리가 '매력적'이고 '감동적'이며 '순수하'고 이성적으로도 '옳다'는 것을 느끼고 알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르게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소수가 아닌 다수의 공동체를 함께 살리고자 하며, 밝고 따뜻한 문화를 알며, 폭력을 싫어하며,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실을 캐내며, 이성적으로 합당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민주주의가 없으면 '그들'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전과 '우리'의 이익은 민주주의가 있어야 보호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가 밥 먹여 준다. 또,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을 뺏기는 것은 대단한 박탈감을 가져온다. 당연히 가지고 있었던 민주주의를 '그들'에게 뺏길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들'과 '저들'을 광화문 컨테이너의 저편에 두고 순식간에 연결하고, 공동의 작업을 하는 것이다.

새로운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형성
▲ 인터넷에서, 현장에서 우리는 연결되었다. ⓒ프레시안

이렇게 장황하게 '우리'에 관한 얘기를 한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지금 새로운 민족주의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쓴 대작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라는 책을 보면 근대 민족주의 형성에 관하여 매우 통찰력 있는 분석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근대 민족주의의 형성과 활자매체를 통한 원거리 지역 사람간의 '연결'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 되는 것은 서울에 있는 나와 대구에 있는 아무개가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즉 '우리'라는 것을 느끼고 알아야 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의 민족이라는 우리 의식은 자연발생적으로 그냥 생긴 게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 근대적 발명품인 활자매체, 즉 '신문' 등을 통한 '연결'로 인해 생겨났다는 것이다.

단순화시켜 정리해 보면, 공통의 언어로 된 신문·잡지가 타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호간에 알리고, 그 상호간의 뉴스를 나누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넓은 범위에서의 '우리', 즉 민족주의가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공통의 활자 매체를 통해 '우리'가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고, 그 연결 범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저들'이 된 것이다. (물론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요인은 이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요인이 있고, 민족주의 형성에 관한 학술적 논의는 그야말로 방대하다)

그런데, 지금 미국소가 촉발시킨 촛불시위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에 새로운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민족주의는 한반도의 남쪽만을 대상으로 한 '대한민국 민족주의'이며, 외세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내부에서 공동체를 살리고자 하는 '생활 민족주의'이다.

이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한 국가안보가 목표가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신의 '안전'이 목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는 소위 웹 2.0 세대가 끌고 가고 이들에게 공감하는 세대가 동참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지 않고, 자신의 안전에 관해 계속 거짓말을 하면서 오히려 위협하는 소수의 정치세력과 지도층, 언론에게 이들은 저항한다. 이들의 저항은 외세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의 안전에 무책임하고, 아직도 냉전과 남북대결의 민족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있다.

여기서 이러한 새로운 민족주의가 원하는 정부와 지도층은 매우 분명해 진다. 그들도 '우리'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우리'와 같이 '연결'되고, '우리' 편에서 성심 성의껏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소통'이고, '우리'가 원하는 정치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연결되고 있지 않다. 그들만의 매체인 보수신문하고만 연결하고 있고, 그들만의 리그인 상위 10%하고만 소통하고 있다. 정책도 그들만을 위한 상위 10%의 정책이고, 그들이 전달하는 논리도 아무런 생각 없이 전달하는 그들의 소리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편을 들기보다는 미국의 '저들'의 편을 들고, '저들'이 말하면 무조건 과학적이고, 옳고, '저들'이 압력을 가하면 무조건 불안해하고, '우리'가 얘기하면 비과학적이고, 괴담이고, '우리'의 요구에 대해서는 무식하다고 타이르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새로운 대한민국 민족주의, 생활 민족주의의 혁명적 형성과정 속에서 촛불 시위는 사실 그들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와 같은 민족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세계화 속에서 국제사회의 미아가 될 것인가라는 선택의 메시지이다.

지금 소위 보수세력인 '그들'이 '우리'와 연결되지 않고, 계속 10% 정도 되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그들'과 '저들'만의 이해를 대변하게 되면,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족 공동체에서 서서히 하나의 조그마한 섬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민족 형성 과정이 시작되었다. 보수신문에 대한 절독운동, 보수신문에 광고를 내는 기업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 성조기를 흔들고 미국 소시지를 시식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질감 등은 진보와 보수 간의 정치적 대립이 아니라 새로운 대한민국 민족에 이들을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운동인 것이다.
▲ '우리'가 연결된 것은 '그들'과 그들이 따르는 '저들'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최근 촛불시위에서 북한이 등장하지 않고, 반미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생활문제에 기초한 새로운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슈는 단순히 광우병 쇠고기 수입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들'만을 위한 대운하, 의료보험 민영화, 공기업 민영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 교육 자율화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북한도 없고, 반미도 없으며, 공동체로서 우리의 안전 즉, '인간안보'의 문제가 주를 이룬다.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아니고 진보와 보수의 대립도 아니다. 이를 뛰어 넘는 대단히 엄청난 역사적 과제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대한민국 민족의 형성에 동참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그들은 대한민국 민족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이 보수세력이 처한 위기의 요체다.

이제 촛불을 끄고 정당정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정당은 진정 '우리'를 대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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