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에서 6월 1일로 넘어가는 밤은 유난히 길고 격렬한 밤이었다. 25일 신촌에서부터 시작된 경찰의 강경진압-필자도 이 날 경찰의 포위망에 갇혀 연행될 뻔 하였다-은 서울시청 광장에서의 토끼몰이를 거쳐 기독교의 신이 천지를 창조하고 안식을 취했다는 거룩한 주일에 화룡정점을 찍었다. 신실한 개신교인인 2MB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어기면서까지 너무나 청아한 북악산의 새벽을 더럽힌 이유는 자신이 예배드리기 전에 신에게 봉헌한 성전 서울의 '잡상인' 들을 모두 치우고자 함이었을까. 예수의 성전정화보다는 헤롯왕의 영아학살을 연상케 하는 그 '시민 청소' 의 전말을 필자가 보고 겪은 그대로 말하겠다.
5월 31일 오후 7시, 예정된 대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문화제가 개최되었고 그 곳에는 이미 오후 4시 반부터 마로니에 공원에서 행진해온 여러 단체들과 시민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필자 역시 친구들과 시청 앞에서 만나 자리를 잡고 앉아 곧 시작한 촛불문화제에 참여하였다.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학회나 진보신당 단위로 참석할까도 생각을 하였지만 2MB의 독선적 행각과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에 분노하여 나온, 집회경험이라곤 전무한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기에 계속 친구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팬클럽 경험이 있는 친구들은 10만 명도 넘는 인원이 모였다며 탄성을 질렀고 필자 역시 플라자 호텔과 덕수궁 앞 도로까지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감탄을 하였다. 깃발을 들고 참여한 단위들도 많았지만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시민의 수가 훨씬 많았다.
프락치 논란으로 격앙된 시민들의 관용과 절제를 당부하는 자유 발언 등이 있고나서 얼마 후 가두 행진이 시작되었고, 평소와는 달리 이 행진은 명동이 아닌 충정로 일대로 진행되었다. 사실 충정로 일대로 진행하는 것을 보며 25일의 악몽이 떠올라 흠칫하기도 하였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촛불의 행렬을 보며 시민들을 믿고 필자 역시 친구들과 함께 계속 행진을 하였다. 시민들은 행진 도중 중앙일보 사옥이 나오자 '중앙일보 폐간하라' 를 연호하였고 경찰청 건물이 나오자 '어청수는 사퇴하라' 를 외치는 재치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필자일행은 처음에는 대열의 선두그룹에 속해 있었지만 잠시 편의점에서 요기를 하다 보니 선두 대열과 떨어져 후미에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전경의 포위망이 형성될 수 있으니 뛰자는 소리가 나오는 바람에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일행이 갈라지게 되었다.
전경의 '허리끊기' 를 막기 위해 밀집을 외치며 사직터널을 통과하여 보니-터널을 통과하던 중 구호에 맞추어 경적을 울려주시던 시민분도 계셨다- 전경버스가 사직공원 앞에서 진로를 차단하고 있었고 시위대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뒤떨어져 있던 일행과 다시 합류하여 사후 대책을 논의하던 중, 차단지점 바로 앞의 갈림길에서 금속노조를 비롯한 노동자 분들의 대열이 등장하여 시민들의 환호를 받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전경들이 물러나 시위대는 전경버스 사이로 빠져나와 계속 행진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경복궁역 일대에서 다시 전경들이 등장하여 대열을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나중에 들으니 몸싸움을 통해 저지선을 뚫었다고 한다) 곧 전경들은 빠지고 대열은 효자동으로 밀집하여 경복궁 담을 낀 골목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뒤늦게 학회 후배에게 연락을 해보니 어떤 길로 온지는 모르겠지만, 혹은 경복궁 앞의 대열에서 분리하여 나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삼청동 쪽에서도 동십자각 앞에서 전경과 대치선을 형성하였다는 연락이 왔다. 청와대로 통하는 효자동과 삼청동 양쪽에서 대치가 시작된 것이다. 광화문을 사이에 둔 채 약 500m 의 거리가 있는 양쪽에서 경찰과 대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2MB의 독선과 폭주에 대한 반감을 지닌 시민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곧 11시 반이 넘어 지하철이 끊기고 최루탄이 터졌다는 소문이 돌았지만-실제로 소화기를 뿌리기는 하였다- 여전히 시민들은 거리를 메우고 있었고 모두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필자의 일행 역시 시민들과 함께 효자동 골목에서 '이명박은 물러나라' '비폭력'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리를 지켰다(사실 필자는 지하철이 끊기기 직전에 귀가하려는 생각을 하였지만 오히려 친구들이 잡는 덕분에 이 후기를 쓸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큰 충돌 없이 대치가 길어지는 바람에 필자 일행은 긴장이 풀려 대치지점을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는 골목에 들어와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시간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12시 즈음해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갑자기 물줄기가 시민들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사태라 일행 모두 어안이 벙벙한 채 창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만 있었는데 곧 중년의 남성 한 분이 우산을 들고 물줄기를 막기 시작했고, 물줄기가 그친 후에야 우리는 대치가 이루어지는 골목으로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 일행이 나가자마자 또다시 살수가 시작되었고 효자동 골목 양변을 골고루 쏘아주는 경찰의 세심함에 필자 일행은 시민들과 함께 분노하였다. 또한 물줄기를 정통으로 맞으면서도 결국 살수가 잠시 멈출 때까지 꺾이지 않은 '의혈'(중앙대) 깃발에 모두가 함께 환호하였다.
살수는 간헐적으로 계속 이루어졌고 이 와중에 전경버스 지붕에 올라가 빼앗은 전경의 방패로 살수차의 물줄기를 막는 시민이 연행되려는 것을 구해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살수가 계속 이어지자 분노한 시민들은 생수병을 전경들에게 던지는 '폭력' 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며 다친 전경을 골목으로 끌어와 치료해서 돌려보내는 '불법' 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더 이상 '고시철폐 협상무효' 라는 구호는 잘 들리지 않았으며 '독재타도' 와 '정권퇴진' 이 시민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격렬한 대치 속에서 학회 후배들이 걱정되어 연락을 해보니 삼청동 쪽에서도 살수를 하였고 모두 흠뻑 젖었다고 하여 바로 삼청동 일대로 달려 나갔는데, 효자동 골목을 나와 보니 광화문 일대에는 '해방구' 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고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인 시민들이 거리에 앉아 기타를 치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격렬한 대치의 와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운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민들을 보며 훈훈한 감정을 느낀 것도 잠시, 삼청동 동십자각 앞으로 급히 뛰어가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학회 후배가 필자를 맞이하였고 평소에도 여린 친구가 의료진에게 쇼크가 올지도 모른다는 주의를 듣고 다 젖은 담요를 두른 채 흠뻑 젖은 채로 앉아있었다. 물줄기를 잘 피해 다닌 필자 자신에 대한 부채의식을 느끼며 친구에게 외투를 벗어준 후 다들 조심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다시 효자동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더 많은 모닥불들이 피워져 있었고 그 길에 만난 진보신당 당원 분들은 대치 당시 최전방에서 버텼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새벽 2시 경에도 대치상황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었고 필자와 친구들 모두 배가 고파 잠시 빠져나와 종로 일대로 나와 요기를 하였는데 종로 1가에서 일단의 전경들이 종각 방면으로 뛰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아마 이들이 나중에 삼청동 진압에 투입되지 않았을까 한다. 간단히 요기를 한 후 새벽 3시 경 다시 삼청동으로 복귀하여 그 곳에 잠시 있다가 다 함께 효자동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인터넷 커뮤니티 DC inside '음식 갤러리' 의 유저들이 모은 성금으로 산 김밥이 배달되었고 그 외에 많은 시민들이 담요와 음식을 들고 현장으로 달려 나왔다. 필자 일행이 세종로를 지나오는 길에 전경버스들이 세종문화회관 앞에 집결하는 것을 보았는데, 정보를 접하고 효자동과 삼청동 양쪽에서 달려 나온 시민들의 저지에 의해 세종로를 전경버스로 막으려는 시도가 무산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아마 이곳이 막혔더라면 삼청동과 효자동 양쪽이 각각 따로 포위되어 쉽게 각개격파 되었을 것이다.
효자동으로 돌아와 보니 그 새 방수포까지 준비한 시민들이 살수차를 무력화 시키고 있었고 모닥불 앞에서 몸을 말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시민들은 사뭇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필자의 일행 역시 그 동안 계속 걷고 뛰었던 피로가 몰려와 효자동 옆 골목으로 들어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불안한 평온도 얼마 가지 못하고 새벽 4시 반 경, 잔인한 새벽은 시작되었다. 효자동 골목에서 대치중이던 시민들이 갑자기 썰물같이 빠지는 것을 보자마자 필자는 본능적으로 졸던 친구들을 깨우며 '뛰어!' 를 외쳤고 친구들과 함께 정부종합청사 편 인도로 진입하였다. 인도에 도착하니 삼청동쪽에서도 충돌이 일어나 진중권 교수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다행히 삼청동쪽은 완전히 밀리지 않았다는 소식 역시 함께 들었다. 후에 들으니 전경 최정예 기동대인 소위 단셋(1001, 1002, 1003 기동대)이 투입되어 효자동이 그렇게 순식간에 밀린 것이라 하는데, 비무장한 시민을 상대로 최정예 기동대를 모두 투입하는 것은 시민들에 대한 이 정부의 시각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후, 시위에 처음 나와 보는데다가 처음 나온 시위에서부터 살수차에 전경 진압 등 거의 모든 진압방식을 봤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는 친구들을 안심 시키며 앞쪽으로 나가 도로를 보았다. 경복궁역 쪽에서 밀려오는 수많은 전경들이 살수차를 앞세우고 시민들의 대열을 밀어내며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정신없이 맞은편 인도로 뛰어온 후 효자동을 완전히 전경이 장악하기까지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인도와 거리의 시민들이 분리되었고 대부분 대학생들만이 남은 거리의 대열은 살수차의 물줄기를 맞으며 전경들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총련(필자의 기억으로는 남총련과 전남대도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필두로 한 학생회 조직들이-비권을 표방하는 연세대와 고려대 학생회가 광화문과 삼청동 쪽에서 각각 선두에서 싸우고 있었다-잘 버텨준 덕택에 광화문에서 대치지점이 새로 형성되었다.
필자 일행 역시 밀리는 대열을 따라 광화문으로 이동하였고, 그 곳에서 선두에서 대치하느라 지친 학회 후배들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보았다. 살수 포대 4개가 동시에 물줄기를 발사하며 시민들을 밀어내는 모습을. 하늘에는 계단구름이 떠있는 너무나 맑은 일요일 새벽 6시경이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두개의 탑> 의 하이라이트인 '헬름협곡 전투' 에서는 동이 틀 때 대군을 이끌고 온 마법사 간달프가 나타났지만 현실에서는 동이 틀 때 수많은 전경과 살수차가 시민들을 맞이하였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북악산과 경복궁, 그리고 새벽의 하늘을 가르는 물줄기와 색색의 깃발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현실은 충분히 초현실적이었다. 필자의 친구들과 학회 후배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그 광경을 보며 분노와 슬픔을 공유하였다. 피곤과 물에 젖은 몸을 이끌고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임과 동시에 마음속에 확실한 각인을 새겨주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온수' 를 외치는 시민들의 해학은 웃음이 가장 큰 무기라는 격언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인도에 있는 시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살수차의 물줄기에 광화문 앞에서 대치하던 대열은 어쩔 수 없이 삼청동 동십자각까지 후퇴하여 삼청동에서 대치하던 대열과 합류하였고, 곧이어 투입된 수많은 전경들로 인해 합류한 대열은 인사동 입구까지 후퇴하였다. 친구들을 챙기며 함께 후퇴하느라 자세한 것은 보지 못했지만 이때도 전경의 폭력적 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전경의 진압 속도와 수, 그리고 대열을 보자면 충분히 많은 폭력이 발생했음은 가슴 아프지만 당연지사이긴 하다. 군사 행동에서 느껴지는 일시적인 일종의 집단적 응집성은 개인주의를 말살한다. 그 구성원 개개인은 악하지 않을지라도 폭력의 독점체인 국가가 수행하는 폭력의 도구로서 도구화된 전의경 집단은 거대한 폭력 유기체를 이루게 된다. 폭력 공동체에서 폭력의 실천은 사람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속시킨다.
결국 인사동 입구와 조계사 골목이 만나는 삼거리에서 시민들과 경찰은 다시 대치를 하기 시작하였고 경찰은 살수하겠다는 위협을 반복하다가 갑자기 종로 경찰서장이 나와 시민대표와 협상을 하자는 수작을 부렸다. 단일 대오가 아닌 자발적 결사체에 특정 '대표' 를 내보내라는 것은 여전히 배후설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것이라며 실소를 하고 있던 중, 종각 일대에서 조계사 거리를 통해 전경부대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시민들은 교통 표지판 등을 이용하여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전경부대의 추가투입을 저지하였다. 바리케이드를 보니 문뜩 시가전이 생각나며 파리코뮌과 80년 광주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절도사건 하나 없었던 80년 5월의 광주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다친 전경을 치료해주던 2008년 서울의 시민들이 겹쳐지며 애틋한 감정을 자아내었다.
경찰의 시간 끌기에 지쳐있던 중, 새벽의 효자동과 같은 일이 또 발생하였다. 아니, 이번에는 그 이상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김남주 시인의 시 <학살 2> 가 바로 연상되었다. 아침 8시 우리는 보았다. 전경이 경찰특공대로 교체되는 것을. 아침 8시 우리는 보았다. 곤봉과 방패로 무장한 경찰특공대를. 아침 8시 우리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경찰특공대의 진압을. 아침 8시 우리는 보았다. 인도로 들어오는 시민들이 끌려가는 것을. 아침 8시, 거리는 워커발에 짓밟힌 피의 강이었다. 바람은 워커발에 수없이 밟힌 여대생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아침은 살수차에 직격당한 여고생의 눈동자를 파먹고 경찰특공대는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민들을 끌고가고 있었다. 북악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후에 고려대 총학생회 관계자에게 들은 바로는, 경찰 측에서 여러 명의 시민 대표들과 협상을 하는 시늉을 하며 시간을 끌다가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했다고 한다. 아 얼마나 계획적인 아침 8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폭력의 아침 8시였던가. 말 그대로 '시민 청소' 였다. 이때 일어났던 일들은 인터넷에서 직접 보는 편이 훨씬 더 생생할 것이다. 필자와 친구들은 안전한 곳에 있었기에 전반적인 흐름만 볼 수 있었을 뿐 최전방에서 일어나는 원초적 폭력들을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대열이 밀리는 속도로 미루어보아 무지막지한 진압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사동에서부터 낙원상가까지 밀리는 시간이 채 5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낙원상가를 지나 종로 3가로 나온 후 대열은 완전히 해산되었고 필자의 친구들은 귀가를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대열은 시청 앞에서 재집결 하였지만 그 수는 500명 남짓-필자가 9시에 귀가한 후 1000명 남짓의 시민들이 모였다 한다-이었고 다들 너무나 지쳐 잔디에 앉아 숨을 추스르고 있었다. 2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왔으니 모두 지쳤을 법하다. 이것이 내가 직접 겪은 사태의 전부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 잠시 눈을 붙인 후 인터넷을 확인하니 이미 수많은 네티즌들이 6월 1일 새벽에 있었던 시간여행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공분하고 있었다. 필자의 친구들 역시 처음부터 격렬한 시위 현장을 보았음에도 다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분노하며 필자보다 먼저 6월 1일 저녁에 시청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하였다. 다른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비무장 시민을 상대로 한 대대적인 살수차의 동원과 대테러 부대인 경찰특공대를 투입한 폭력적 진압은 누가 보더라도 정당화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6월 1일 새벽부터 아침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은 그 동안 가두행진에 대한 폭력적 진압을 '상식적 수준' 으로 만들 정도로 벌거벗은 국가폭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위를 축제와 같은 분위기로 즐기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시민들에 비해 초조함을 보이며 발톱을 드러낸 국가권력은 이미 그 밑천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대립물은 비폭력이 아닌 권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권력은 그 자신의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지만 폭력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인데, 이를 급진적으로 해석하자면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더 이상 자체로서의 정당성을 잃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스스로의 정당성과 주체적 모델을 찾지 못한 채 과거의 망령 박정희를 흉내 내고 싶었던 2MB는 70년대의 '산업역군' 대신 2000년도의 '뿔난 국민' 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이미 스스로의 연극에 도취된 그는 김재규 대신 차지철-어청수 경찰청장으로 재현되는-을 선택하는, 멸망의 순간마저 모방하는 코미디를 선보였다. 박정희는 '임자, 나는 괜찮아' 를 말하며 죽어갔지만 2MB는 최후의 순간에 무슨 말을 하게 될까.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였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벼락을 맞고 죽는-게다가 2MB의 측근들은 벼락을 맞을 확률은 광우병에 걸릴 확률보다 높다고 한다-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살아남아 6월 1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2MB의 화려한 주말은 쇠고기 재협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전두환의 삼저 호황이 그의 원죄를 가려주지 못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2MB가 탄핵되는 날, 어청수 경찰청장은 2MB 보다 훨씬 큰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 노골적이면서도 끔찍한 밤이 시민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 이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시민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전경들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화염병을 들지 않는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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