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탈북시인 장진성씨입니다. 장진성씨는 북한 노동당 시인으로 활동하다 2004년에 탈북 해 남한에 정착한 탈북시인입니다. 특히 2007년 초 인터넷을 통해 많은 네티즌들의 관심을 모았던, 시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를 비롯해 배고픔과 싸우는 북한 주민들의 생존에 대한 갈망과 자유에 대한 염원을 다룬 시집「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를 출간했습니다.
박인규 : 바쁘실 텐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라는 시집을 저도 죽 한 번 읽어봤습니다. 북한에서 94년 이후 대기근으로 200만이 죽었다 300만이 죽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장진성 시인이 쓴 시들을 읽어보니까 북한의 배고픔이 어느 정도 처절한지 느낄 수 있었는데요. 우선 시집 표지를 보니까 품에 안고 두만강을 건넌 시라고 해서, 남한에서 쓰신 게 아니라 이미 북한에서 써서 갖고 나오셨다고 해요
장진성 : 제가 육필로 쓴 책 두 권을 비닐에 싸서 두만강을 품고 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비단 저 혼자만 글을 쓰는 게 아니고 북한의 많은 작가들이 체제에 대한,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참상에 대해서, 자기만의 글이라고 볼 수 있죠. 발표할 수 없는. 북한에는 원고지가 오직 하납니다. 원고지에는 김정일 찬양, 체제찬양만을 써야 되거든요. 저는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낙서를 하고 싶었고, 그 낙서가 한국에 가져오니까 시가 된 겁니다. 책이 있었기 때문에 탈북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긴 것 같고, 또 믿음이 있어서, 한 마디로 시집이 제 길동무기도 했고
박인규 : 그냥 탈북도 사실 쉬운 게 아닌데 만약 이런 내용을 담은 시 내용, 본인이 낙서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만 그걸 갖고 탈북하다 적발되면 거의 살아남기 어려웠을 텐데, 굉장히 큰 각오를 하셨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 시집은 올 초 4월에 나왔지만 실린 시들은 쓴 시점은 대개 1995년 이후겠네요. 기근이 많았을 때. 무엇보다 책 제목,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우선 충격적인데요, 실제로 이 장면을 보셨다고요
장진성 : 그때가 1999년도였는데요, 그때로 말하면 북한이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고 말하죠. 북한의 기근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제가 동대운구역시장이라고 있습니다. 평양시에. 저는 시장에 잘 안 가요. 왜냐면 북한에서 공개처형이 대개 시장에서 진행되거든요. 북한에서 공개처형은 형벌이 아니고 교양목적입니다. 한 사람을 죽여서 많은 사람을 교양시키는 선전수단이기도 한데, 시장에 잘 안 가는데 뭐가 좀 필요해서 들러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처음에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서 봤을 때 딸을 파는 어머니를 봤을 때 온 몸에 정말 소름이 돋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막 욕질을 하고 어떤 사람은 돌까지 던지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여자는 한 마디 항변도 없이.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 벙어리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한 군인이 쥐어준 돈 100원으로 아이에게 밀가루빵을 사주면서 막 통곡할 때는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다 눈물흘렸고요, 그것이 저한테는 크게 충격이어서 그때부터 메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현실들을 그냥 지나보낼 수 없구나
박인규 :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쓰게 된 첫 번째 계기가 이 장면이었군요
장진성 : 네. 그래서 제가 북한에서 가져온 시 원고에는 '모성애'로 돼 있어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걸 수기로 만들었거든요. 그냥 글을 올렸을 뿐인데 남한에 있는 대학생 한 분이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그것이 각종 포털사이트들에서 1위가 되면서 제목이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걸로 알려졌고
박인규 : 그 어머니가 불치병이었다는 얘기는 맞는 겁니까?
장진성 : 제가 보건대는, 주변에서도 사람들한테 들었을 때는 간복수가 와서 배가 불러있었어요. 처음엔 임산부가 아닌가 이 정도로까지 사람들이 주위에서 말했는데 간복수라고
박인규 : 딸을 팔기보다는 죽기 전에 딸에게 뭔가 먹이고 싶었다 그런 건가요
장진성 : 그렇죠. 딸을 누구한테 보내야 사는 건데. 그런데 마지막 모성을 보여줄 단 돈 백원도 수중에 없었던 거죠.
박인규 : 단 돈 백원을 벌어서 딸에게 빵을 사먹이더라.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북한에서 100원은 우리나라로 치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겁니까?
장진성 : 그때 99년 당시 100원이라면 쌀을 1킬로 반 정도
박인규 : 이 시가 북한에도 전해졌다는 얘기가 있던데 맞습니까?
장진성 : 네. 얼마 전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서 전달됐고. 그리고 지금 중국에 나와 있는 목사분들이 탈북자분들 만났을 때, 혹은 북한에서 들어온 출장자들을 만났을 때 이 시집을 보여줬답니다. 그 분들이 아마 저희들의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박인규 : 북한 사람들의 절절한 삶을 대변했다고 해서 많이 읽히는 모양이죠? 제가 시집을 보니까 거의 굶주림에 관한 거의 밥에 관한 시가 많던데. 제가 기억나는 게, 제철소에서 노동자들이 굶으니까 제철소 간부들이 강제를 팔았다고 해서 총살을 시켰다. 노동자들이 그래서 항의를 하니까 지도부에서 탱크로 밀어버렸다는 내용의 시가 있던데,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까?
장진성 : 한때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북한에는 감찰기구라고 하면 국가보위부, 인민보안성,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있거든요. 무력부가 절대권력을 누리게 된 계기가 황해제철소 사건이었습니다. 아카데미아 사건... 북한 군장성들을 처형한 사건이거든요. 그 이후에 인민무력부 고위사령부가 처음으로 민간을 처형한 겁니다. 원래 군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민간인들을 다칠 수가 없어요. 그런 감찰권이 제기되면 국가보위부에 넘겨져야 됩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하면서 무력부 보위사령부에 민간인들까지 처형할 수 있는 특권을 준 겁니다. 이 사람들이 그 특권을 쥐자 마자 제일 먼저 단행한 사업이 황해제철소 농성진압사건입니다.
박인규 : 저희는 굉장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만 들었지 그렇게 저항이 있었고 저항에 대한 그런 무자비한 탄압이 있었는지는 몰랐는데요. 장진성씨는 2004년도에 국경을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일반적으로 알기는, 북한에서도 평양에 사는 주민들은 좀 사정이 편하고 김정일 측근이랄까요 그런 분들은 그래도 살기가 편해서 견딜 만하다. 장진성 시인도 북한에서 상당히 잘 나가는 시인이었다고 들었는데요. 왜 탈북을 결심하게 되셨습니까?
장진성 : 북한에서 제가 김정일을 두 번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났을 땐 정말 감격이었습니다. 저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저희 목표가 김정일을 접견하는 거였어요. 북한에는 사람의 순서가 정해져 있어요. 김일성이 첫째기 때문에 그 첫째와 가까운 권력층의 순서대로 사람의 순서가 정해져요. 그래서 저는 곁에 다가선 것만으로도 감격이었고. 그런데 제가 그 이후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고난행군을 체험한 뒤였고 그 실상을 보고 난 뒤였기 때문에 정말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어떤 감정이었냐면 그런 감격은 전혀 없었고요. 바로 저 한 사람만 없다면 북한 2천만이 꿈도 2천만 자유도 2천만일 텐데 저 한 사람 때문에... 이런 생각이 자꾸 들더라구요. 저에게는 김정일을 이렇게 만나보고 이렇게 해보니까 두 명의 김정일이 보인 겁니다. 인민 앞에선 굉장히 신격화된 김정일, 다른 하나는 폭정의 김정일. 정말 시집에도 썼지만 가장 가난한 나라에 가장 부유한 왕이 있다는 것이 더 가슴아팠고요. 그것이 더 탈북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박인규 : 실제로 만나게 된 계기는 어떤 겁니까? 만나서 어떤 말씀을 나누셨고 혹시 김정이란 사람의 성격이랄까,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장진성 : 에피소드 하나 말씀드리면 김정일을 만나는 사람은 아무리 최측근이라고 해도 김정일을 사람에게는 신변보호원칙이 있어요. 어디로 가는지 알아서도 안 되고 김정일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김정일에게 가는 것도 모릅니다. 신분대조를 철저히 해서 여러 과정을 걸쳐서 가게 되는데, 처음에 이렇게 도착했을 때 봉투 하나씩을 줍니다. 작은 봉투. 보니까 일본상품이었어요. 뜯어보니 알콜면이었습니다
박인규 : 술을 살수 있는 쿠폰 같은 겁니까?
장진성 : 그게 아니라 김정일과 악수할 수 있기 때문에 손을 소독하라는 겁니다. 알콜면
박인규 : 아,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니까 손을 깨끗이 해라.
장진성 : 네. 그런데 일본상품이더라구요. 닦고 기다리는데 한 시간 후에, 장군님께서 나오십니다. 다 일어나라고 해서 차렷 하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강아지가 먼저 굴러들어오더라구요. 김정일이 라사압소라는 강아지 종류가 있거든요. 그 강아지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들어오더니 방 안에 뒤에 보면 뒤에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라는 구호가 있어요. 결국 자기 찬양하는 구호인데 그 앞에 가서 한참 보더니 서기실장한테 이거 에나멜이냐 손수예냐 물어봅니다. 손수예다 하니까, 보기 좋은데 이걸로 다 하지 왜 에나멜로 다른 데선 쓰느냐. 그러니까 중국에서 컬러실을 지금 수입해 들어오는데 원가가 비싸고 그래서 그런다 하니까 한 마디로 거기서 다 전국적으로 이걸로 다 바꾸라. 해서 저는 그 때 과연 저걸 다 바꾸면 비용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지금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렇고 정동영 전 대선후보도 김정일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 분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씀이 김정일은 화끈하고 통이 크다고 하세요. 그런데 정말 독재를 포기하는 정도의 화끈함이면 정말 통큰 지도자라고 찬양받을 수 있지만
박인규 : 북한식으로 얘기하면 인민을 위해서 해주는 게 없다.
장진성 : 그것보다도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화끈함이니까
박인규 : 시에도 나와 있지만 김일성 주석 사망했을 때가 94년도죠. 그때부터 대기근이 시작됐는데 시에 보니까 금수산궁전이라고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들였다. 그때 300만이 죽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북한 주민들은 불만이 없는 겁니까? 있지만 말을 못하는 겁니까...
장진성 : 그때 북한주민들이 그거 짓는 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김정일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꼈죠. 먹을 것도 없는데 저걸 저렇게 굳이 해야 되냐. 그러나 그걸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겁니다. 아시겠지만 북한에 극악한 3대멸족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북한은 선군정치를 하고 있는데 그건 곧 계엄통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그걸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박인규 : 분명히 불만은 있지만 여러 가지 정치여건상 표현하기 어렵다. 2004년도에 이 시들을 품고 남한으로 오셨는데, 본인의 표현은 낙서같은 심정으로 마음속에 있는 걸 쓰셨다고 했는데 북한에서도 공식적으로 시작활동을 하셨을 거 아닙니까.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떤 시를 쓰셨습니까?
장진성 : 서정시나 가사, 서사시, 이런 것들을 썼는데 북한은 경제난 때문에 소설작가보다 시인들이 우대를 받습니다.
박인규 : 짧은 거, 종이가 많이 안 쓰이는 것.
장진성 : 학교에 아이들 교과서 종이도 부족해요. 원고지가 굉장히 부족해요. 그래서 소설로 만든다 해도, 그 많은 종이로 소설을 찍어서 배포할 수는 없는 거고. 그리고 북한의 노동문학은 정치문학이기 때문에 그걸 굳이 돈 주고 사 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에서의 선전수단 중 하나가 노동신문입니다. 노동신문은 아무리 북한 종이사정이 어려워도 무조건 자기 부수를 채우거든요. 그래서 김정일의 찬사를 받거나 김정일이 이건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치하한 작품들은 노동신문을 통해서 소개되는데, 거기 소설을 낼 수 없잖아요. 서정시나 짧은 시들은 다른 문학장르보다도 함축적이면서 사람들의 정서를 파고들 수 있기 때문에 시인들이 많이 우대받습니다.
박인규 : 시집에 실린 시 중에 또 '구제미라 부르지 말라'는 시가 있어요. 남한에서 보낸 지원쌀이 대한민국 국기가 있어서 못 들어갔다는 거 아닙니까. 실제로 북한에 계신 분들이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습니까?
장진성 : 남한에서 쌀이 들어오고 유엔이나 미국에서 쌀이 들어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구제미란 표현 자체가 없습니다. 남한쌀, 미국쌀, 유엔쌀입니다. 저도 구제미란 말을 사실 여기 와서 들었거든요. 북한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 이후 변화를 본다면, 지난 10년 동안 대북지원이 정상화 되니까 북한정권이 배급제를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나이 39세 이하 여인들은 직장으로 다 나오라. 이렇게 불러들여서 많이 항의했다는 기사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북한 주민들은 오히려 배급제가 오히려 시끄러운 겁니다. 저희들이 시장화에 어느 정도 적응됐는데 시장을 통해서 2,3일 벌어서 질 좋은 쌀을 사먹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배급 주는 쌀은 질이 안 좋거든요. 북한에선 군량미를 5년 동안 저축합니다. 6년 된 쌀은 교환해서 배급제로... 묵은 쌀을 주는 건데, 그럴 바에는 자유롭게 하는 게 낫다..
박인규 : 그 말씀은 북한에 시장경제가 상당히 퍼졌다는 건데, 배고파서 좋은 일이라는 시도 있어요. 배급할 때는 쌀도 좋지만 시키는 게 많았다. 명령하면 복종하는 기계였다. 이제는 좋다. 자유가 생겼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자유에 대한 갈망이랄까 이런 게 많이 있는 모양이죠?
장진성 : 그렇죠. 북한학계에서 보게 된다면 칠일조치 발표 이후 가장 큰 변화를 시장화에 대해서만 강조합니다. 그런데 시장화보다 더 큰 변화가 있습니다. 그건 북한 주민들의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시장가격을 반영한 임금평가를 해주기 때문에 칠일조치 이전에는 북한 주민들이 자기 몸값을 몰랐어요. 그런데 칠일조치 이후에는 일당평가제를 해줬기 때문에 과거에는 사회동원 나오라고 하면 응당 나가야겠거니 했는데, 칠일조치 이후에는, 나오세요... 하면 내 몸값이 얼마냐 계산하게 된 거죠.
박인규 : 내가 그 시간에 딴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장진성 : 그러니까 결국 가치관에 변화가 오니까 의식변화가 왔고 조직연대감으로부터 개인연대감으로 선회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칠일조치 이후 북한의 가장 큰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인규 : 분명히 변화는 일어나고 있군요. 이 시집의 마지막에 보면 우리나라의 유명한 정호승 시인이 평하셨어요. 이건 시집이 아니라 통곡과 분노, 고통과 절망이자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놓지 않은 희망이다. 지금 이 시집이 꽤 많이 팔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진성 시인께서 이 시집을 낼 때 남한에 있는 시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습니까?
장진성 : 저는 북한 주민들이 그렇게 대량 아사가 있었는데도 제가 북한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여기 와서 보니까 너무도 그 부분이 조용한 거예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그래서 저는 그걸 우선 폭로하고 싶었고, 그리고 그런 대량아사를 빚어낸 정권이 있다는 것도 고발하고 싶었고요.
박인규 : 그럼 장진성 시인의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라는 시집 중에서 한 편을 장진성 시인이 직접 읽어주시겠습니다. 제목은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 건'
장진성 :
석달전에 내 동생은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건
따뜻한 옥수수라 했습니다.
두달전에 내 동생은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건
불에 구운 메뚜기라 했습니다.
한달전에 내 동생은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건
어젯밤 먹었던 꿈이라 했습니다.
지금 내 동생이 살아있다면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건
이 달에는 뭐라고 했을까요...
박인규 :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중에서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 건... 이라는 시였습니다. 혹시 이 동생 얘기가 실제 동생 얘기는 아니시죠? 이런 경우가 있다는 걸 보신 거죠?
장진성 : 네.
박인규 : 어쨌든 그래도 장진성씨는 북한을 탈출해 자유의 땅에 오셨습니다. 시집도 내셨고. 지난 한 4년 동안 남한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장진성 : 만족합니다.
박인규 : 제가 알기로 탈북자가 한 만 명이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자유의 땅이라고 왔지만 여기도 객지고 타향이고, 적응하기 힘들어하시기도 하고 남한이 생각했던 만큼 자유의 땅만은 아니더라. 돈 없으면 힘들다는 말씀도 하시던데, 남한에서 살면서 힘들었던 부분은 없습니까?
장진성 : 제가 '우리별'이라는 시에서도 썼지만 정말 이별을 속여야 했지 않습니까
박인규 :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장진성 : 우리는 이별이 제일일 겁니다. 한국에는 어버이날, 스승의날, 어린이날이 많은데 우리에겐 그냥 날인 거죠. 탈북자들이야 말로 정말 누구보다도 가슴아프게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냐. 혈육 없이 혼자
박인규 :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김대중 정부의 6.15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상당히 많이 발전했다 개선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반면에 보수 쪽에선 너무 끌려다녔다, 퍼주기 했다는 평가도 하는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재까지는 남북관계가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선 비핵개방을 얘기하는데 지금 남북관계의 추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장진성 : 저는 정상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보거든요.
박인규 : 그 말씀은 이전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지나치게 온건하고 유화적이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장진성 : 지나치게 끌려갔다. 솔직히 말하면 북한의 시령에 우리 남한이 길들여졌어요. 이때까지는. 북한이 달라면 줘야 되고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대포 쏘면 그 이상 강요해선 안 되는 거고. 저는 이제는 북한이 우리의 시령에 길들여져야 된다. 다시 말해 북한의 이런 고약한 버릇까지 고쳐주는 시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지금 남북대화가 중단된 데 대해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는데요.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가 가장 후련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남북대화를 정치적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라고 한 말이었거든요. 과거 10년 동안은 남북대화를 너무나도 정략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화권은 북한에 있었고 우린 끌려가는 셈이었어요 대화의 갈증은 남한보다 북한에 있어요. 대화해도 살고 안 해도 살지만 북한은 자생시스템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지원을 끌어들여야 생존할 수 있거든요. 그러자면 대화를 해서 사기도 칠 수 있고 협박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겁니다. 대화가 곧 생존전략인데 이때까지 우리가 너무나 성급하게 대화를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끌려가지 않았는가... 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지금 만만디전략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옳다고 보고
박인규 : 당장에 북한에 구호미라든가 비료 같은 게 지원이 안 되고 있는데 당장 북한 주민들은 고통을 받을 거 아닙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좀 더 우리가 우리의 조건이랄까 그걸 내세워야 된다고 보시는 겁니까?
장진성 : 일부에선 그렇게 얘기하는데요, 다시 300만 대량아사가 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과거 300만 대량아사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신격화에 사람들이 세뇌돼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두 번째는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죽은 이후 계엄통치를 하면서 그때는 개인의 삶이란 없었거든요. 누구나 슬픔만을 강요당했으니까. 시장은 곧 자본주의라고 했기 때문에 누구도 나갈 엄두도 못 냈고 정부가 단속을 했어요.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세 번째는 쌀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권이 없어서 굶어죽었거든요. 군량미도 얼마든지 있었고, 그렇게 굶어 죽는 와중에서도 금수산궁전을 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오늘날의 북한은 과거와 다릅니다. 오늘날 북한은 시장이 있습니다. 북한에는 두 개의 인력이 있거든요. 하나는 배급인력이고 하나는 자력갱생인력입니다. 배급인력이라고 할 때 이 사람들은 배급을 정상적으로 받습니다. 자력갱생인력은 시장에서 저희들이 알아서 먹어야 될, 시장에 의거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장에 적응이 돼 있기 때문에 과거 300만 대량아사 같은 건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저는 채찍과 당근 중에서 채찍을 가하라는 것이 아니고, 당근을 주되 당근맛을 알게 해주라는 겁니다.
박인규 : 알게 해주라는 건 무슨 얘기죠?
장진성 : 과거에는 당근만 계속 주니까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박인규 : 필요할 때 줘라. 상호주의를 적용해라, 그런 말씀으로 볼 수 있겠네요.
시집에 보니까 탈북자는 우리의 미래라고 말씀하시던데요. 앞으로 남북화해를 위해서 특히 북한의 사정을 남한 주민에게 많이 알려주는 역할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장진성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최근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시집을 출간한 탈북시인 장진성씨를 초대해 북한의 현실은 어떠하며 또 그가 이번 시집에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뭔지 말씀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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