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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문제는 바로 정치다"

[독자 기고] 다시 일어서는 '시민', '정당'의 역할은?

한나라당의 표현에 따르면 잃어버린 10년에서 벗어난 오늘날, 시민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삶과는 별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이라는 국가주의의 제전에 기꺼이 동참하며 전국을 붉은 혼란 속에 빠뜨렸던 시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 반대 시위에 대해서는 '교통에 혼잡을 주고 시끄럽다' 고 투덜대던 시민들이 다시 한 번 거리로 나섰다. 이번에는 자신의 삶과 유리(遊離)된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생존권, 더 나아가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10년 만에 일어선 것이다. 96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투쟁에 나섰던 400만 명의 인원들이 1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청계천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민들의 움직임에 기존의 모든 세력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신들을 외면한 국민에 대한 배신감에 휩싸여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던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뛰어넘은 움직임 앞에서 당황하고 있으며, 이 흐름에 편승하여 한몫 챙겨보고자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나서는 봉건적 반동 세력들과 얼이 빠진 채 '이것은 문화제가 아니다' 만 뇌까리는 세련된 신자유주의자들의 모습은 차라리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세력들도 집권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들의 직접적 저항을 받고 있는 청와대의 졸렬함에 비하면 현재의 상황에 나름대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와대에서 나라의 기둥을 갉아먹는 서생원과 그를 호위하는 반동적 언론들은 이 모든 것을 광기에서 나온 한낱 악몽으로 치부하며 그 악몽을 연출하는 '배후세력' 을 상정하여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다. 눈이 뒤집힌 채 허공에 총질을 해대는 이들의 모습은 악귀 김정일 장군을 내쫓기 위해 박정희 장군신을 접신(接神)하고 작두 위에서 칼춤을 추는 장군보살에 다름 아니다. 노력은 갸륵하지만 병은 악귀 때문이 아니라 세균 혹은 바이러스, 그것도 아니면 변형 프리온 때문에 일어나는 법이다. 망상 속의 배후세력을 찾는 것보다는(아마 배후를 거슬러 올라가면 프리메이슨까지 나올 게다) 국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핵심 기제들을 찾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사태의 진정을 위해서라도 훨씬 효과적인 일이 될 것이다.
  
  상기하자. 현재 '광우병 괴담' 이라고 불리는 내용들의 상당수는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 FTA 반대운동 당시에 제기되었던 것들이며 그 당시에는 범국본과 민노당이라는 거대한 '배후세력' 까지 뚜렷하게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그 당시 시민들은 어떠했던가. 지금 운송노조의 소고기 운송 반대에 열광하는 시민들은 당시 민노총의 FTA 반대를 위한 '정치파업' 을 비난했던 시민들이며, 지금 강기갑 의원의 호통에 열광하는 시민들은 당시 민노당을 간첩당이라 비난했던 시민들이다. 이들이 갑자기 상부의 지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거리로 나오는 마리오네트라도 된 것일까. 반동세력이 지목하는 배후세력은 언제나 존재하는 상수였으며 도출되는 값이 변한다면 상수 대신 변수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마 그 변수는 반동적 신성동맹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청와대 자신일 것이다.
  
  물론 청와대와 반동적 언론들의 주장대로 사실을 왜곡한 선동이 다수 존재하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자료들 중 상당수는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정론인양 호도하는 것과 사실 자체의 왜곡은 지양되어야 마땅하며 이러한 선동에 대해서는 진보진영에서도 과감하게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점은 반복되는 실험과 토론을 통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주동자를 찾아 형사처벌 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아마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사상의 경쟁을 회피(그 경쟁 좋아하시는 분들이 이런 문제에서는 철저한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전도사가 되곤 한다)하려던 악습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모양인데, 최소한 내 기억으로는 선동의 원조는 한나라당이다. 세금폭탄이라는 레토릭과 747공약은 허위, 과장, 왜곡이라는 선동의 삼위일체가 훌륭히 갖추어진 작품이 아니었던가.
  
  반동세력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긴 수면에서 깨어나 다시금 정치의 주체로 부상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두려워서이다. 민란(民亂)이 우려된다는, 친박연대의 봉건적 세계관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발언은 비록 그 의도가 이명박을 압박하기 위해 나왔음에도 오히려 이명박과 그 '배후세력' 들의 속내를 대신 표현해준 셈이다. 배후세력설과 형사처벌을 들먹이며 시민을 윽박지르는 이들의 속내에는 한국 시민들의 이성적 판단능력과 저항정신을 하찮게 보는 극도의 오만이 잠재되어 있다. 집회에 끼어 한몫 보려는 세력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시민들, 죽음의 공포에서 연유한 패닉상태 대신 건강권을 팔아먹은 대통령에 대한 건강한 분노를 보여주는 시민들, 경찰의 협박에 재치 있는 말로 응수하는 예비시민들이 배후세력의 조잡한 선동에 놀아나고, 졸렬하다 못해 야비한 엄포에 주눅들 것 같은가?
  
  운동의 초기에는 선동도 있었으며 비이성적인 군중심리에 휩쓸린 측면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정태적인 존재가 아니며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구조의 질곡 속에 있는 것도 인간이지만 구조를 바꾸는 것 역시 인간이다. 선동적인 자료에 의해 광우병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 시민은 곧 스스로가 여러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을 내리며 중심이 없이 모인 대중은 스스로가 집회의 양식을 만들어간다. '시민' 은 고정된 속성을 지닌 존재가 아닌 만큼 이들의 움직임을 볼 때에도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난 5월 2일, 탄핵이라는 빈곤한 어휘만이 존재하던 집회는 후반부에 이르러 '조중동은 쓰레기' 라는 매우 강한 정치성을 지닌 구호까지 등장하였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방어라는, 지극히 본능적인 속성에서 출발한 시민들의 사고가 이제는 자신들의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결국 정치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다. 광우병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분노는 공공사업 민영화에 대한 우려까지 이르고 있으며 이를 싸잡아 '괴담' 으로 취급하며 진화(鎭火)하기 위한 반동 언론들의 몸부림은 안쓰러울 지경이다. 동맹휴학을 호소하는 자기성취적 예언에 대해 '허위' 라는 규정를 내리는, 이성이 마비된 행태를 보이는 경찰의 행태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움직임에 온갖 푸닥거리를 하며 저주를 퍼붓는 이들의 행태를 보며 그 어떤 지식인도 계몽으로 이루어내지 못했던, 모든 권력집단의 반동성에 대한 각성을 이루고 있다.
  
  지난 10년간 잠을 자고 있던 시민이 깨어날 때는 지금이다. 널리 알려진 말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사회적' 으로도, '정치적' 으로도 번역되어 인용되곤 하는 이 말에서 사회적-정치적에 해당하는 그리스 원어는 '폴리스적' 이라는 뜻이다.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 공동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사회와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결국 대한민국 시민사회라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사는 시민들은 내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체적이면서도 소박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며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단, 경계해야 할 점에 대한 성찰 없이 마냥 위대한 시민의 힘만 찬양할 수는 없는 것도 현실이다. 시민들의 열정은 정치적 언어를 통하여 정제되어야 한다. '독도를 팔아먹은 이명박' 을 외치는 국수주의적 반동성과 '조중동을 불태우자' 를 외치는 급진적 혁명의 맹아가 뒤섞여 태동하고 있는 현재의 움직임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람시가 말한 '현대의 군주' 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시민의 집단의지를 대변하는 동시에 이들을 단순한 경제투쟁이 아닌 헤게모니 투쟁으로 이끌며 사회 전반의 의식 개혁을 이루어내는 존재.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를 넘어서 투자자-국가 제소권이 걸려있는 한미 FTA에 대한 반대,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 신자유주의적 사회재생산 구조 및 욕망 자체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현대의 군주' 는 그람시의 당 개념과는 그 전술과 형태가 다소 다를지는 몰라도 여전히 정당의 형태를 띌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서 나가면 산 자는 따르라는 식의 구태의연한 지도방식이 세련된 시민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은 지난 10년간 지겹도록 입증이 된 만큼, 오늘날의 '현대의 군주'(다소 권위적인 냄새가 풍기는 '현대의 군주' 대신 누구의 표현대로 '현대의 머슴' 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는 앞장서서 시민을 이끌기보다는 시민의 옆에서 소통하며 이들의 의지를 정제하여 대변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맹목적인 포퓰리즘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서로가 믿음이 전제된 건강한 거리를 두어야 함은 당연한 전제이다. 이런 면에서 시민과 정당 역시 서로가 서로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피드백 관계가 완전히 부재한 것이 작금의 사태를 낳았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리라.
  
  현재의 정부에 대한 분노는 자신들의 생명권을 고려하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함에서 기인하였으며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자신들을 속 시원하게 대변해주는 정치세력이 없는, 협애한 이념지형에 갇힌 한국 정당들의 대표성 부재 때문이다. 이들의 열정이 향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해주는 것은 순전히 정치의 의무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시민들을 생각하는 진보세력이 할 일의 목록이 도출된다. 시민들의 의사에 적극적이고 진지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조직화된 세력의 역량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목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것, 그리고 시민들이 스스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이들을 2MB 의 뇌용량을 가진 정부와 경찰로부터 지키고 이들의 사회적-정치적 열정의 불꽃에 풀무질을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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