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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말해야 중도표 얻는다

[김제완의 '좌우간에']<23> 대선 막판 승부처 부동층 공략 방법은

10여 년 전 어느 날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유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프랑스 사회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서로가 더 많이 안다면서 단편적인 지식들을 꺼내들었다. 이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최고참 유학생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프랑스에 와서 선거를 몇 번이나 겪어봤나. 그 질문의 의미가 필자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평소에는 잔잔한 호수 같던 프랑스사회가 선거를 앞두고는 거센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밑바닥에 있는 오물들이 호수의 표면에 부유물로 떠오른다. 이때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그 사회의 실상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선거를 많이 본 사람일수록 프랑스 사회를 더 잘 알게 된다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이런 현상은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어디에나 있는 일이다. 대선을 일주일 앞둔 우리 사회도 맨얼굴이 드러나고 있다. 그동안 신비주의 아우라에 가려있던 안철수 현상의 주인공의 본모습도 보인다.

유망했던 국면이 혼전속으로

한국사회는 진보를 향해 진전하고 있다. 지난 3년여 동안 치러진 선거에서 이 같은 민심의 흐름이 뚜렷이 나타났다. 2009년 경기교육감 선거를 시작으로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등에서 야당이 연전연승했다. 의석에서 뒤졌던 올해 총선에서도 야권정당 득표 총합이 여권정당보다 많았다. 전쟁이후 60년만에 진보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 같은 시대정신이 바뀌고 있다는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대세에 안철수 현상이라는 돌발변수가 생겼다. 밥상을 차려줘도 못 먹는 "못난 민주당"에 실망한 민심이 안철수에게 쏠렸다. 안철수는 지지자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새정치와 정치혁신을 말했다. 지지자들은 환호했고 구태에 젖은 정치권에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안철수의 충격요법이 금도를 벗어났다고 생각된다. 지난달 23일 사퇴 선언과 그 이후 보여준 그의 행보는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그는 새정치와 정치혁신이 정권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문재인이 6일 '정권교체와 새정치를 위한 국민연대'를 통해 그의 의지를 보이자 이날 오후에 나타나 "아름다운 단일화"를 완성했다. 가장 늦은 시간에 하루만 더 늦었어도 파탄날 것 같은 그런 시간에 그가 다시 등장했다.

바둑에서는 같은 수를 두더라도 수순이 틀리면 판을 그르치고 만다. 바둑을 잘 둔다는 그가 왜 이처럼 수순을 지키지 않은 것일까. 납득하기 어려운 안철수의 행보로 인해 대선국면은 요동쳤다. 진보를 향한 민심의 흐름에도 교란현상이 일어났다. 판세가 엎치락뒤치락했다. 결국 여론이 박근혜 쪽으로 기울어진 뒤에야 그가 뛰어나왔지만 전력투구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정치평론가들은 안철수가 자기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권교체 실패라는 암울한 예감이 밀려온다. 지난 여름 유시민 지옥을 거쳤는데 이번 겨울에는 안철수 지옥을 겪게 되는 것일까.

안철수와 문재인이 화학적으로 결합하면 박근혜를 거뜬히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그런 물실호기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있다. 진보진영은 안철수의 심기가 불편할까 눈치나 보고 있다. 엊그제는 문 후보가 당선돼도 다음 정부에서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문재인에 대해 거리를 둔 이 발언이 그의 지지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가 흩뿌려 놓은 중도표를 다시 모으려고 진보진영이 모두 팔을 걷고 나섰는데 그는 왜 이런 초를 치는 말을 하는 것일까. 다분히 위악적으로 보인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의 수사 때문이다. 간을 너무 봐서 "간철수"라는 평을 들으면서도 말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겠다고 한다. 어느새 착한 안철수는 보이지 않고 노회한 정치꾼의 모습이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 필자의 생각과 다른 평가도 있다. 김어준 총수는 안철수가 나타나 판을 흔들어주었고 역전의 모멘텀을 만들어주었으면 그걸로 그의 역할은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뒤에 판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문재인의 몫이다. 대선이 일주일 남은 지금 승부처는 부동층을 누가 잡는가이다. 그래서 안철수에 의존하지 않고 부동층을 잡는 방법을 논구했다.

부동층과 중도층은 어떻게 다른가

안철수의 지지층은 흔히 부동층 무당파 정치혐오층 또는 중도층이라고 불려진다. 이것들을 자세히 구분해보면 그 특성이 각기 다름을 알 수 있다. 부동층은 자기 기준이 없어서 시류에 쉽게 휩쓸리고, 무당파는 지지정당이 없으며, 정치혐오층은 과대한 이상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중도층은 뚜렷한 개념이 있는 사람이다. 중도는 진보 보수와 대등한 자기 위상을 갖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논설실장은 최근 한 종편에 출연해 몰가치와 무정견이 중도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언론은 안철수 지지표에 포함돼 있다가 떨어져 나온 사람들을 "신부동층"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바로 중도층이다.

무당파 정치혐오층을 포함하는 부동층 그리고 중도층은 선거에 임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지난 4월 총선 투표율은 54.2%였다. 이번 대선에는 약 15%가 늘어난 70% 안팎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도층은 이때의 15%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부동층은 어디에 숨어있을까. 투표율이 70%라면 무투표율이 30%이다. 다시 말해 국민 열명 중 세명은 투표를 하지 않는다. 부동층은 주로 여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가운데 표를 얻기 위해서는 부동표가 아니라 중도표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안철수 지지표인 이 중도표를 챙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안철수가 도와준다면 좋겠지만 그에게만 의지해서 될 일이 아니다. 중도층 확보 방안을 찾아보면 두 가지의 상반된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충돌에는 흥미로운 진실이 담겨있어 연구자의 의욕을 돋운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살펴보자.

중도표 확보방안 두고 상반된 두 가지 이론이 충돌해

첫 번째는 중도표 공략을 위해 가운데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요즘 종편에서 주로 서식하고 있는 정치평론가들이 별다른 이론없이 수용하고 있다. 진보 보수가 각각 총집결해서 대회전을 벌이고 있는 이번 대선에서 양진영이 고정표는 이미 확보했다. 그러므로 중원으로 나가서 중도표 낚시를 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평론가들은 새누리당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이회창을 영입하고 자유선진당을 흡수하는 것이 중도표를 얻는데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고 말한다. 경제진보의 아이콘 김종인을 토사구팽시킨 것도 중도표 확보에는 악재라고 본다. 중도표를 잡으려면 자기들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말고 가운데를 향해 좌클릭 또는 우클릭하라고 조언한다. 상식적으로 보면 타당해 보인다.

두 번째는 이와 정반대의 의견이다. 한국사회에 잘 알려진 버클리대 교수 조지 레이코프의 이론인데 때마침 지난 10월29일 EBS 다큐프라임 킹메이커 2부에서 상세하게 소개됐다. 그는 중도표를 잡기 위해 가운데로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프로의 제목도 "중도파는 중도에 있지 않다"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박근혜 '중도 전략', 레이코프 눈에는… 참조)

안철수는 이미 중도층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었다. 경제는 진보이고 안보는 보수이거나, 교육문제는 진보이고 가족문제는 보수인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진보적 판단과 보수적 판단의 숫자가 엇비슷하다. 이렇게 진보 보수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때 팽팽하게 균형을 이룬 양팔저울 접시의 어느 한쪽에 작은 물건이라도 하나 더 얹으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중도표를 진보나 보수 쪽로 데려올 수 있다. 이것이 레이코프의 이론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나온 언어로 설득하고 자신의 매력을 한껏 뿜어내야 한다는 것이 레이코프의 조언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새누리당이 이회창을 영입하고 자유선진당과 합당한 것이나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을 토사구팽시킨 것도 옳은 선택이 된다. 보수는 보수의 자원을 하나라도 더 많이 끌어모아야 한다. 그래야 중도표를 얻을 수 있다. 전적으로 이같은 영향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회창을 영입하고 김종인을 팽시킨 즈음부터 박근혜의 지지율이 올라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상반된 관점을 내놓고 있는 이 두가지 의견 중에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레이코프의 책들은 여러해 전부터 국회의원 보좌관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론이 맞는지 틀리는지 한국 정치판에서 검증을 해볼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 이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뒷받침돼야 하지만 일단 현실적인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봤다. 정치평론가들의 방법은 부동층을 끌어오는 데에, 그리고 레이코프의 방법은 중도층을 끌어오는데 유효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이코프의 방법이다.

문재인이 중도표 얻으려면 진보를 내세워야

필자는 레이코프의 이론이 과학적인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문재인은 중도표를 의식해서 자신의 정체성인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기를 주저하면 안 된다. 그것은 패망으로 가는 길이다. 중도파인 안철수에게 목을 매는 것도 레이코프 이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가 움켜쥐고 있던 표는 어차피 진보 보수로 나뉘어질 표들이다. 중도유권자들에게 진보의 장점을 설득할 매력적인 언어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북한이 오늘 장거리 로켓을 쏘았다. 이에 따라 한반도와 주변국가들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으며 대선에도 다소간 영향을 줄 것 같다. 이 국면을 이용해보자.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진보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국민에게 설득하라. 종북세력과 반북세력이라는 지뢰밭 사이에 작은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평화시대 뿐 아니라 "북한특수"가 열린다. 북한의 우수한 저임금 노동력과 풍부한 자연자원에 남한의 높은 기술력을 결합시키면 경제도약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을 "제2의 중동특수"라는 언어로 말하자. 경제를 중시하는 중도층 유권자들에게 확실하게 먹힌다.

이런 일은 북한의 기피대상인 보수세력보다는 진보세력이 잘 해낼 수 있다. 진보세력만이 잘 해낼 수 있는 일들을 열 가지 이상 찾아내 국민에게 제시하자. 그러면 이쪽저쪽을 재는 중도층의 표심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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