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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으로 가는 운하를 파려 하나

['이명박 시대'를 맞으며] 과기부ㆍ교육부 통합의 사상적 문제

향후 5년간 이명박 정부―아직도 이 단어가 익숙하지 않다―의 향방을 결정할 정부 개편안이 발표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타 후보를 지지한 필자로서는 이명박 당선자가 한나라당 경선 레이스에 참여하기 전부터 그를 좋게 보지 않았고 이번 개편안을 보며 이명박에 대한 필자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당선 이후에도 각종 부적절한 발언과 코드 인사로 파문을 일으키고 다니는 그를 보며 전반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할지 대충 짐작은 하였지만 이번 정부 개편안에서 그가 그렇게 이른 시점에, 노골적으로 그의 위험함을 표출할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시장 자율과 실용을 외치던 그는 아니나 다를까, 교육부를 폐지하였고 과학기술부를 분할하였다. 평소 교육부에 대해 강한 불신을 피력해온 이명박 당선자의 개인적 성향을 볼 때 교육부의 폐지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과학기술부의 분할은 황우석 파동에 대한 징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이번 조치는 이명박 당선자 개인의 소신과 그가 앞으로 만들어나갈 사회의 방향이 총체적으로 투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조치, 즉 교육부와 과기부의 기초과학 부처를 통합하고 산업부와 과기부의 연구 부처를 통합한 조치는 위험천만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과학기술부의 기초과학 정책 및 과학인력 양성기능을 결합하여 학교교육 위주의 틀을 벗고 새로운 과제에 도전한다. 전인적·미래지향적 관점의 평생교육,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미래 인재양성에 주력하게 된다" 는 인수위 측의 말을 찬찬히 살펴보자. 교육부와 인권위 및 노동부의 기능은 통합되지 않았다. 오로지 과학기술부의 기능만이 교육부에 통합되는 영광(?)을 누렸을 뿐이다.
  
  게다가 과학적 사고관도 아닌 과학적 '지식' 으로 '무장' 한 '과학인력' 을 양성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면에 깔린 사고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원하는 것은 기술관료이지 비판적, 통합적 이성을 지닌 시민이 아니다.
  
  사회과학에 간단하게나마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사회학과 경제학 등 사회과학의 제(諸) 학문들이 태동하던 시기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실증주의 사회학의 아버지 콩트에서부터 세기의 반항아 마르크스까지 모두가 공유했던 한가지의 이상은 사회과학을 최대한 자연과학과 가깝게 만드는 것이었다.
  
  뉴턴 역학과 다윈의 발견에 힘입어 나날이 세계를 신(神)의 암흑 속에서 이성과 합리성의 양지로 끌어내는 자연과학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있어 계몽의 등불이었음이 분명하다.
  
  '과학적' 이라는 단어는 '진리' 라는 단어와 동일한 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모든 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에 '과학적' 이라는 수사를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과학적 사회주의' 와 '공상적 사회주의' 의 구분을 상기해보자. 마르크스가 추구한 것은 자신의 이론이 혁명을 위한 전술지침서가 되는 것이 아닌,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날' 자본주의 체제 붕괴 및 이행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뉴턴 역학에 의해 예측이 가능한 물체의 운동, 그리고 사회과학 이론에 의해 예측이 가능한 사회의 운동. 그것이 초기 사회과학의 목표였다. 하지만 이 당시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잃지 않았기에 사회과학의 자연과학에의 종속 및 맹목적 공학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며 나타난, 과학을 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도구적 이성의 절대화 및 자연과학 환원론이다. 흔히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비판의 예시로 자주 쓰이곤 하는 하버의 예를 상기해보자. 질소합성법을 발명하여 인류를 기아의 위협에서 구한 독일의 과학자 하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 독일의 승리를 위해 독가스를 최초로 제조하여 전후 수많은 지탄을 받았다.
  
  양자역학의 아버지 하이젠베르크가 나치의 핵개발에 참여한 것 역시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이것은 과학자에게 한정된 사항이 아니다.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수송한 것은 단지 명령에 따른 것뿐이었다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역시 관료제 아래서 목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인간 이성의 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치를 연구하는 인문학을 배제한, 그리고 기술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비판적 세계관을 표방하지 않은, 단순히 기술개발을 위한 과학지식에 대한 추구는 그래서 위험하다.
  
  산업과 기술개발을 한 부처에서 담당하게 됨에 따라 기초 단계부터 시장을 염두에 두고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는 산업부와 연구 부처의 통합 역시 앞에서 지적한 문제와 동일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공학의 연구는 기업의 이윤에 노골적으로 종속되게 되며 세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기초과학 연구는 발붙이기가 힘들게 되는 것이다. 전체적 그림을 결여한, 코끼리의 각 신체부위만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사회는 기술관료들이 관료적 합리성에 의거해 모든 일을 처리하는 창백한 사회이다.
  
  가치를 잃어버렸을 때 맹목적 공학은 모든 과학을 삼키며 리바이어던으로 화(化)한다. 공학은 인류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하는 훌륭한 학문이지만 맹목적인 공학은 인류의 개체수를 줄이는 데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도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방법론은 동일할 수 있겠지만 그 지향점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자연의 법칙이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질(質)이라면, 사회는 인간의 의지로 변화가 가능한 주관적 질(質)이다.
  
  이 점을 무시한 채 과학, 그것도 과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비판적 사고력이 결여된 반쪽의 과학을 사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숭앙하는 것은 결국 사회의 현실을 자연과학적 '법칙' 으로 둔갑시켜 현실에 순응하게 만드는―혁명을 할 수는 있어도 사과가 아래에서 위로 떨어지게 할 수는 없다―실천적 보수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가 그의 저서 <이성의 파괴>에서 신랄하게 지적하였다시피 자연과학 환원론은 과학을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반동적 사상이다.
  
  2차 대전 이후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호르크하이머는 나치즘에 대해 "이성과 자연의 악마적 통합" 이라고 말하였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추지 못한 국가와 국민이 목표를 잘못 설정한 채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일을 추진해 나간다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게다가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한 기괴한 정신주의와 물질주의의 혼합―파시즘의 쌍두마차―은 물질적 욕구에 대한 기술적 추구, 존재론적 욕구에 대한 전체주의적 추구가 뒤엉켜 있기에 이것을 풀지는 못할망정 그 괴리를 부추기는 이번 개편안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윤을 위한 전문지식으로만 가득한 두뇌의 빈곤한 세계관을 국가와 민족으로 채웠을 때 만들어지는 인간형은 이미 제 3제국에서 산화해간 수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충분히 배웠다. 역사를 보았을 때 사회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기반이 무너진 뒤에 오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파시즘이다. 이명박 정부가 데마고그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파시즘 체제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이번 개편안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파시즘으로 향하는 운하를 파게 될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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