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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언론자유 5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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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언론자유 5등국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24> 멸망 직전 공산국들과 동점

한국 언론, 파키스탄 이집트 레바논 로디지아보다 뒤져

유신 말기인 1977년 봄,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인권단체로 뉴욕에 위치한 프리덤 하우스가 각국 별 언론자유에 등급을 매겨 발표했다. 프리덤 하우스는 당시 세계 145개국의 언론 상황을 1등국부터 7등국까지로 분류했다. 거기서 박정희 정권 아래 한국의 언론자유는 5등국이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니 확연하게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후진국, 부끄럽기 짝이 없는 국가위상이었다.

당시 자유화되기 전 공산국가이던 헝가리 폴란드 유고와 같은 나라들과 동점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후진국들인 인도네시아 필리핀 케냐 수단 등과 동급이었다. 한국보다 언론자유가 앞선 것으로 평가된 나라들 중에는 파키스탄 이집트 레바논 로디지아도 4등국으로 포함돼 있었다. 한국보다 못한 나라라면 그저 북한 소련 중국 루마니아 캄보디아 베트남 정도의 일당독재 공산국가들뿐이었다.

한편 보수언론이 회원으로 가입한 국제언론인협회(IPI)는 군사독재 아래 신음하는 한국 언론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초 IPI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는 한국에 언론 자유가 없다며 회원 가입신청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1960년 말 가입을 승인했다. 그것은 4.19 혁명 덕택으로 언론자유를 쟁취한 결과였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승만 정권 때보다 훨씬 더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혀 있던 한국의 언론 상황에 IPI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언론자유에 문제없음"이라는 보증이었다. 왜냐하면 군사독재가 끝난 후 거의 완전히 민주화가 이루어진 노무현 정부 당시 이 단체가 발표한 '한국에 관한 결의안'은 많은 문제 제기로 돼 있기 때문이다.

오랜 군사독재 시절 아무 말이 없던 그 IPI는 민주화가 확립된 2003년 9월15일 연례 총회에서 이른바 '한국에 관한 결의안'이란 것을 내놓았다. 결의안에 담긴 주요 내용은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나 공정거래위원회의 신문시장에 대한 독과점 현황 조사가 언론 탄압이라는 비판이었다. 그것은 과거 정부가 방조해 오던 언론의 특권과 일탈행위를 실정법에 따라 바로잡는 정당한 법률행위였다. 그런데도 IPI의 결의안을 보면 구체적 상황 진단은 없고 비난만 드러나 있었다. 이는 IPI의 한국 지부가 낸 보고서를 그대로 전재했다는 증거였다. IPI 한국지부는 주류 보수언론이 주도해 왔다. 2003년 IPI 총회에 참석한 대표단도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 MBC, 연합뉴스의 간부들로 구성됐다. 보수언론들은 IPI의 한국 결의안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언론 탄압과 공작이 횡행하던 박정희 정권 시절 IPI가 침묵했던 것도 또 다른 공작이었고 거기엔 보수언론도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래 보았자 박정희 정권의 공작과 로비가 통하지 않는 국제단체에서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위상은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버드대, 언론인 연구과정 니만 펠로십에 한국 기자 입학 거부
유신 후 87년 6.10까지 "한국 기자는 자유 언론인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언론인 연구과정인 미국 하버드대의 니만 펠로십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한국 기자를 추천받기 거부했다. 박정희가 사망하고도 수년 뒤인 87년 6월시민항쟁 덕으로 한국 기자를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랜 해직생활 끝에 88년 2월 제자리에 돌아가 95~96년 니만펠로십 유학을 마칠 때 쯤 나는 현지에서 그런 사실을 알게됐다. 당시의 책임자에게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림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 때의 한국 기자는 자유 언론인이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선포한 1972년 10월 이후 87년 6.10 시민항쟁이 승리할 때까지 15년간 한국 언론은 그렇게 수모를 겪어야 했다. 유신체제 선포 이전엔 1963년부터 72년 초까지는 매 2년마다 한국의 중견 언론인 중 하버드대 니만 펠로가 선발됐었다.

하버드대 니만펠로십은 1938년 월터 리프만에 의해 설계된 후 세계 58개국에 자유언론인 1000여명을 배출했다. 내가 니만펠로에 선발돼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1987년 6월 시민항쟁이 승리해 언론자유가 인정된 덕택이었다. 동급생 25명 중에 미국 기자가 13명, 나머지 12명이 영국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남아공 체코 폴란드 일본 그리고 한국이었고 중국에서 망명 온 반체제 기자도 자유언론인이었다.

2000년대 들어 프리덤 하우스는 세계 각국의 언론상황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한국을 2등급으로 분류했다. 이를 두고 보수언론들은 우리의 언론자유가 1등급이 아님을 강조했다. 당시의 김대중 정부가 언론자유를 옥죄었다는 논조가 깔려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언론사에 대해 한 일이라면 탈세행위를 법에 따라 처벌한 것뿐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오랫동안 부동산 관리와 세금 문제에 대해 정권 측이 특혜를 주거나 묵인해 왔기 때문에 탈세 처벌도 언론 탄압인 것처럼 왜곡했다. 특혜와 반칙의 교정을 반민주적 언론탄압으로 비판했다. 언론은 이미 사회적 공기(公器)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사적(私的) 도구였던 셈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의한 군사권위주의 정권이 끝나고 하위권이던 언론자유가 상위권으로 올라선 상황에서 언론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보수신문사의 사주와 편집인들은 과거 어두웠던 시절엔 무엇을 했는가. 언론자유를 위해 과연 기여한 일이 있었던가. 유신독재나 5.18 내란 상황에서 정의로운 기자와 논설위원들이 언론자유 운동을 벌였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는지 조사해 보아야 할 일이다.

당시 자유언론을 실천하려던 기자들을 강제로 해직시킨 사주는 지금 사주의 선대로 같은 족벌이 아니던가. 탈세 처벌을 모면하고 비호하기 위해 언론자유를 들먹이는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다를 게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김대중 이름도 못쓰고 '재야인사'로만 표기한 코미디 언론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가장 반민주적인 통치행위는 언론의 비판에 재갈을 물린 공작이었다. 유신독재 아래서는 수시로 긴급조치를 선포해 특정 이슈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금지했다. 예컨대 1979년 10월 부산마산 시민항쟁도 계엄포고령으로 언론 보도를 금지해 사실 자체의 기록으로 사초(史草)라 할 수 있는 기사가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돼 온 김대중 씨는 그 후 국내 언론이 이름을 쓰지 못한 채 '재야인사'로만 표기했다. 언론의 암흑기였고 우민화 통치의 극치였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언론 공작 중 가장 비열한 것은 비판적 언론인의 강제해직과 광고탄압이었다. 특정 언론사가 눈밖에 나면 그 광고주들을 겁박해서 수입원을 틀어막았다. 국가안보를 위해 설치한 중앙정보부 같은 국가정보기관이 광고주인 기업인을 겁박하는 야만적 공작을 담당했다.
▲1975년 3월17일 새벽,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편집국에서 자유언론 투쟁을 벌이던 기자들이 회사 측이 동원한 용역 조직원들에 의해 거리로 축출되고 있다. 이때 쫓겨난 130여명의 기자들은 동아투위를 결성해 일관되게 자유언론 운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사회의 각계 각 분야에서 개혁적 지식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 자유언론 선언을 발표하자 중앙정보부는 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해 온 기업들을 압박했다. 동아일보는 곧바로 광고 해약사태에 직면했다. 신문은 광고면을 백지로 둔 채 인쇄됐다. 정권 측의 광고탄압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성원광고들이 답지했다. 그러나 독자들의 성원광고는 지속적으로 장기화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신문사의 광고 수입을 대체하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사의 총수입은 대체로 구독료와 광고료가 반반 정도여서 지금에 비하면 광고 수입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영상 광고료 수입은 매우 중요했다. 광고 수입의 숨통을 조이는 공작으로 신문사 사주 측은 결국 비판적 기자들을 해직시키면서 중앙정보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130여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다.

박정희 체제폭력의 산물 '동아투위' 각 영역에 큰 족적
언론자유의 재확립과 국민화합 위해서도 명예종결 기다려


당시 동아일보에서 거리로 쫓겨난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언론 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사회문화, 학계 및 교육 분야에서 실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77~78년 엄혹하던 유신독재 말기에도 이들은 '동아투위소식'이라는 제3의 언론을 만들어 배포했다.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반독재 시위와 인권탄압 사건들을 게재했다. 정권 측이 가만 둘리 없었고 동아투위는 위원장과 총무 상임위원 전원이 불법 연행, 구속, 기소당했다. 안종필 위원장, 장윤환 이병주 위원장 대리, 안성열 임채정 이부영 김종철 정연주 박종만 이기중 양한수 홍종만 기자들이 그들이다. 유신체제 아래서 언론자유의 말살이었다.

동아투위는 그 후에도 일관되게 민주언론시민연대(민언연) 활동을 통해 제도권 언론에 대한 감시역을 했으며 90년대 전후 성역 없는 자유언론의 기수 노릇을 한 한겨레와 월간 말지 창간을 주도했다. 한겨레의 창간 초기 편집위원장과 논설주간을 맡은 장윤환(후에 대한매일 논설고문) 성유보(후에 방송통신위 부위원장)와 논설주간을 맡은 정연주(후에 KBS 사장)가 동아투위 출신 언론인이다.

사회운동에서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정동익과 민언연 이사장 이명순 등이 중심에 서 왔다. 정계에서는 국회의장을 지낸 임채정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역임한 이부영이 정치개혁에 크게 공헌했다. 출판계에서도 한길사 대표 김언호와 전예원 대표 김진홍 등이 출판언론이라 할 만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학계와 교육계에서 많은 대학교수가 배출됐고 이들은 모두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을 전파시키는데 앞장섰다.

이들이 독재정권에 의해 박해받은 지식인 그룹으로서 고난에 굴하지 않고 혁혁한 사회적 공헌을 해 왔다는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희생당한 체제폭력에 대해 보상은커녕 아직 아무런 명예회복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공작적 언론탄압으로 거리로 쫓겨난 동아투위 멤버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제자리에 돌아가고 싶은 기자로 변함없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가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의한 공작적 해직 또한 체제폭력이었다. 그들은 독재정권의 역사청산과 새 시대의 국민화합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본령인 언론자유의 재확립을 입증하기 위해 명예로운 종결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제17대 국회에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등원한 나에게 당 지도부는 언론개혁단장을 맡겼다. 2004년 정기국회 내내 나는 신문법과 방송법 개정안을 놓고 한나라당과 줄다리기를 벌여야 했다. 편집권 독립과 신문시장에서 일정한 비율 이상을 점유하는 신문사의 경우 소유지분을 특정 족벌이 독점하지 못하게 분산시키려는 시도는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갈수록 당 지도부와 다른 동료의원들은 내게서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작은 신문사들의 배포망을 지원하는 신문유통원과 지방신문발전위원회, 그리고 언론에 의한 피해를 손쉽게 구제할 수 있도록 언론중재위법을 개정한 것 정도가 실적이었다.
▲2006년 4월24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해방 이후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김재홍 의원(국회 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 회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엔 정일용 기자협회장,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 조양진 동아투위 위원,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회 공동대표, 김광석 변호사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그 후 2006년 나는 독재정권의 언론탄압 피해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해 특별법 제정에 나섰다. '해방 이후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안'을 작성하고 토론회와 청문회를 거쳐 문화관광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법안은 문광위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려 제대로 상정되지도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당 지도부에 매달리고 떼를 써서라도 관철시켰어야 했는데 기가 꺾여 좌절했다. 이 법안이 제정됐어야 동아투위와 80년해직언론인들의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텐데 내가 과연 최선을 다했던가 오랫동안 회한이 남는다. 그러나 해직언론인들의 명예는 민주화로 이미 회복됐다. 오히려 남은 문제는 그런 현실과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해당 언론사들의 정신적 부채일 것이다.

한국의 주류 보수언론은 비판과 타협의 줄타기 경영의 달인들
전두환 내란집단의 80년 언론인해직도 '박정희 수법'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 수법은 1980년 전두환의 5.18광주항쟁을 전후한 내란 과정에서도 비판적 언론인에 대한 강제해직 때 그대로 답습됐다. 하나회 집단은 보안사령부를 내세워 정치군인들의 내란행위에 대해 비판한 기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언론사에 내려보냈다.
▲1980년 5월14일 광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끝낸 뒤 200여 교수들이 앞장서고 그 뒤에 전남대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다. 신군부의 계엄사 검열단은 이런 사진을 보도불가 조치했으며 검열의 정당성과 저의를 의심케 했다.

당시 내가 소속했던 동아일보사에서는 모든 기자들의 일괄 사표를 제출받은 뒤 선별적으로 수리하는 해직조치가 자행됐다. 불과 3년차 기자에 불과했던 나도 선배들과 함께 거리로 쫓겨났다. 기자로서 막내였지만 자유언론 선언문의 초안 작성을 맡았고 광주항쟁을 싣지 않는 신문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에 당시로선 피할 도리가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직접적인 언론 탄압은 비판적 언론인들을 수시로 불법 연행해 문초하고 구타하는 방식이었다. 젊은 기자에서 최종 제작 책임자인 편집국장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았다.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시로 출입하면서 감시하고 신문의 편집 제작에 간섭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10.24 자유언론 선언의 한 원인도 그런 정보기관원의 편집국 출입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재벌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수신문사들이 특혜 성장을 누렸다. 정권에 대해 적당히 비판하고 다른 한편 타협하는 줄타기 경영을 하면서 언론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과 경제적 부를 함께 얻었다. 그러나 이른바 주류 언론들의 그런 줄타기 시절 한국의 언론 자유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바닥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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