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나라 세계은행 지부의 대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이들이 이처럼 '항명'을 하고 나선 일차적인 이유는 여자친구에게 승진과 연봉인상의 특혜를 베푼 울포위츠 총재가 자리지키기에 집착하면서 남미 내에서 세계은행의 영향력과 명예가 실추됐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들의 우려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세계은행이 혼란을 겪고 있는 틈을 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남미 좌파벨트의 '탈미(脫美)' 움직임이 가속화 되고 있는 기류에 대한 강한 경계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미 재계 '정통 주류'들의 이유 있는 항명
편지를 보낸 5명은 콜롬비아의 로드리고 보테고, 아르헨티나의 도밍고 까바요, 브라질의 루벤스 리쿠베루, 멕시코의 페드로 아스페, 칠레의 에두아르도 아니나트 등이다.
이들은 1990년대 남미를 풍미했던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따라 각 나라에서 시장 개혁을 주도했던 인사들이다. 이 중 리쿠베르 전 장관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사무총장을, 아니나트 전 장관은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이들은 편지에서 "울포위츠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저버렸을 뿐 아니라 세계은행이 공사에 관한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조할 명분을 훼손시켰다"고 주장했다.
직접 울포위츠와 관련된 논란의 내용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스캔들과 관련된 책임을 지고 자리를 내놓으라는 압박으로 여겨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들의 톤과 메시지에 대해 워싱턴 전문가들이 "울포위츠의 행태 때문에 좌파의 미국 비판을 막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고 전했다.
보테로 전 장관은 개별 인터뷰에서 좀 더 솔직한 자신들의 입장을 털어놨다. "세계은행이 내부 문제로 망가짐으로써 세계화에서 이탈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수혜를 입게 됐다"는 얘기였다.
이들의 우려는 결국 세계은행의 위기가 차베스 대통령의 역내 영향력을 키워줄 것이란 전망으로 집중됐다.
울포위츠의 악재, 차베스에겐 '꿈의 기회'
아닌 게 아니라 차베스 대통령은 울포위츠 총재의 '악재'를 자신의 '호재'로 활용하기 위한 전 방위 노력을 펼치고 있다.
당장 지난 달 30일 베네수엘라는 세계은행과 IMF 탈퇴를 선언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심지어 그들(세계은행)이 급료도 줄 수 없게 됐다는 뉴스를 읽었다"며 "혼란에 빠진 그들이 우리에게 강도짓을 하러 다가오기 전에 우리가 물러서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한껏 비꼬았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서 탈퇴키로 했고, 라파엘 코레아 에콰르도 대통령도 지난 주 세계은행 지부 대표를 추방함으로써 '차베스의 깃발'을 따랐다.
이미 지난해 9월 차베스 대통령은 베네수엘라가 보유하고 있는 석유를 '돈줄'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기구를 대체할 '남미은행' 설립 의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워싱턴이 남미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판단에서다.
지금까지 세계은행과 IMF는 개도국에 대한 금융지원을 하면서 해당국가의 재정적자 해소, 금융개방 등의 구조조정을 요구해 왔다. 겉으로는 경제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해당국가에서 서방 자본의 활동과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남미의 좌파정권들은 자립적 국민경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세계은행 등의 간섭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를 위해 오는 9월 중 베네수엘라는 아르헨티나와 공동으로 20억 달러 규모의 '남미채권'을 발행키로 합의를 봐둔 상태다. 중남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실행되는 공동 채권 발행은 남미은행 설립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막대한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아르헨티나 국채를 집중 매입해 오기도 했다.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하고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만 봐 오던 차베스 정권과 다른 반미 좌파 정권에 울포위츠의 스캔들은 좋은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이에 중도우파 성향인 투토 키로가 볼리비아 전 대통령은 "최악의 타이밍에 세계은행 스캔들이 불거졌다"며 "이 논란은 실제적인 대안을 준비해 두고 있던 차베스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에게 세계은행을 마음대로 조롱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키로가 전 대통령은 "울포위츠의 스캔들이 세계은행이 다른 은행에 비해 상대우위를 지켰던 유일한 업무인 정부개혁이나 제도개혁에 대한 세계은행의 수행능력을 상쇄시켰다"며, "지금 내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처럼 세계은행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나섰다가는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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