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현지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빠따고니아의 의미는'발이 큰 인디오'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지역을 1만3000여 년간 지배했던 떼우엘체 부족들은 발만 큰 게 아니라 키가 180cm가 넘는 용사들이었다.
필자는 최근 아르헨 남부 빠따고니아 지방 여행을 통한 현장답사와 현지의 역사 자료, 학계의 의견을 통해 떼우엘체 부족과 아르헨 정부군 사이에 존재한 악연의 사연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르헨 군부가 가진 반페론 정서 깊은 곳에는 후안 도밍고 페론 전 아르헨 대통령의 생모가 떼우엘체 부족의 후손이었다는 사실도 깔려 있었던 것이다. (113년 만에 햇빛 본 페론의 출생비밀 참조)
떼우엘체 용사들에게 백전백패한 아르헨 군부, 앙심을 품다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 대륙이 유럽에 소개된 건 1500년대 초부터였다. 그러나 잉카제국의 금과 은 등 자원약탈에 혈안이 돼있던 스페인 정복군들은 아르헨티나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후 19세기 초 유럽 각국의 기근으로 인해 불어 닥친 식량부족 현상은 기름지고 광활한 라빰빠스 평원의 개발을 서두르게 되지만 남부의 빠따고니아 지역은 여전히 아르헨 정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토착 원주민들도 가끔씩 찾아오는 지리학자들과 개척자들의 길안내나 국경 표기공사 등에 협조를 하기도 하면서 정부군들과 평화공존시대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1880년 아르헨티나 전역의 지방 영주세력들을 제압하고 연방정부를 건설한 군부는 영토확장에 나서게 되고 토착원주민들의 거주지를 야금야금 잠식해나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원주민들은 드넓은 땅을 백인들에게 조금 양보하는 것이 별 대수냐는 식으로 문제를 삼지 않았다. 다만 영토를 양보해준 조건으로 백인들이 타고 다니는 말과 취사도구 등 생활용품을 나누어달라고 요구하는 게 전부였다.
아르헨 군부도 이들의 요구에 응해 인디오 용사들에게 말과 신식 생활용품들을 나누어 주고 대신 원주민 부족들이 사냥해 온 야생 과나꼬(사슴과의 동물) 가죽과 여우 털 등 추위를 이길 수 있는 방한복 재료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토착원주민들과 정부군 간에 평화공존이 깨지게 된 동기는 종교갈등이었다. 아르헨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에게 유럽의 종교(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개종을 강요했고 원주민 족장들은 자신들만의 전통 종교의식을 지킬 것을 고집했다. 결국 종교적인 갈등이 정부군과 인디오 부족들 간의 전쟁을 부추기는 표면적인 이유가 된 것이다.
자신들의 전통과 종교를 탄압하는 정부군에 대항하기 시작한 떼우엘체 부족들은 빠따고니아 전역의 전사들을 한데 모아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대포와 총 등 당시로서는 각종 신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은 활과 창, 볼레아도라(세 개의 둥그런 돌덩이를 가죽 끈에 묶은 사냥용 무기)로 무장한 떼우엘체 용사들을 얕잡아 봤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야생짐승몰이 식의 게릴라 전술을 펼친 떼우엘체 용사들에게 아르헨 군대는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또한 야간에 벌어지는 백병전에서도 거대한 체구를 지닌 떼우엘체 용사들에 비해 왜소한 체구의 정부군들은 힘으로도 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르헨 군부가 지금까지도 떼우엘체 부족을 주적으로 삼고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 이유다.
토착원주민 전사들을 얕잡아보고 시작한 전쟁에 연패해 자존심이 꺾일 대로 꺾인 아르헨 군 수뇌부가 내놓은 고육책은 흑인노예들을 무장시켜 원주민토벌작전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유는 물론 거주지와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해 주겠다는 조건을 붙여서였다.
이렇게 해서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땅과 자신들만의 문화와 전통, 종교를 지키려는 원주민들과 자유를 찾기 위해 전쟁에 동원된 흑인노예들 간의 생명을 건 지루한 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결과는 두 종족이 동시에 거의 멸종되는 비참한 결과였다.
정부군들로서는 영토확장을 위한 원주민 말살과 골치 아픈 흑인노예 처리라는 두 가지 효과를 전리품으로 챙긴 셈이다.
페론의 부관참시에도 떼우엘체에 대한 반감 작용
현지 역사학자들은 떼우엘체 부족 거주지 동굴의 벽화와 출토된 유적들을 분석해 이들이 빠따고니아 지역에 거주를 시작한 건 약1만3000여 년 전부터라고 발표했다.
이들 학자들은 또 떼우엘체 부족들은 사냥을 전문으로 한 아시아 북부지역 태생으로서 새로운 사냥터를 찾아 베링해협을 건너 남하하던 중 과나꼬와 야생타조(난두)의 집중서식지인 지금의 빠따고니아 지방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르헨 남부를 개척했고 초대 산타꾸르스 주지사를 역임했던 라몬 리스따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떼우엘체 부족은 다른 중남미 인디오들과는 다르게 백인들을 압도하는 거대한 체구에 100까지의 숫자를 쉽게 외우는 것은 물론 시를 지어 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문화적인 민족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또 사계절과 일년을 12개월로 분류해서 각종 절기를 지키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얼음이 녹고 새싹이 나는 그림은 봄을 의미했고 야생타조의 알과 과나꼬 새끼는 여름을, 배가 부르고 뚱뚱한 짐승의 그림은 가을, 옷을 두껍게 입고 눈을 그린 그림은 겨울을 상징했다는 것이다.
떼우엘체 부족은 하늘과 태양의 아들인 '엘라알'을 자신들의 시조로 섬기며 사냥한 짐승들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중요시했다.
이들 부족들 가운데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 속에는 엘라알은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를 연상케 하며 유태민족의 장사 삼손과 닮은 점도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이들은 아르헨 남부의 혹독한 추위와 퓨마의 습격, 콘도르의 위협을 엘라알의 도움으로 이겨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부족단위로 철저하게 집단생활을 했던 떼우엘체 부족은 풍부한 사냥감을 지닌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서로 싸우는 일이 없이 배고픈 사람을 만나면 자신들의 텐트로 불러들여 먹이고 재워주는 등 친절한 성격을 가진 민족이었다.
라몬 리스따는 지난 1800년대 빠따고니아를 여행했던 스페인과 아르헨, 영국 출신 개척자들이 추위와 배고픔에서 구조되고, 각종 질병을 치료하게 됐던 것은 순전히 이들 떼우엘체 부족들의 친절함과 외지인들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여유로움 때문이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들의 존재가 맨 처음 유럽에 알려지게 된 건 1520년 마젤란 탐험대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마젤란 군대는 이들의 거대한 몸집에 겁을 집어먹고 내륙탐험을 포기한 채 양털로 짠 천과 요리기구 등을 선물했고 떼우엘체 부족은 유럽인들에게 타조 털과 짐승가죽을 선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떼우엘체 부족들은 이미 마젤란 탐험대들이 가져온 말을 소유하게 됐다고 한다. 유럽 탐험대들은 탐험을 마치고 돌아가는 입장이었고 가는 동안 말먹이와 늘어난 화물들로 인해 비좁아진 범선에 적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는 말들을 처리해야 할 입장이었을 거라는 해석이다.
남극해 일대를 탐험한 마젤란 부대는 유럽으로 돌아가 자신들보다 몸집이 두 배나 더 큰 거인들이 사는 나라를 발견했다고 허풍을 떨기도 했다. 그만큼 떼우엘체 전사들은 유럽인들이 보기에도 기골이 장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거인용사들의 혈통적인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페론은 육사시절부터 다른 생도들을 압도하는 체격조건과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 등으로 청년장교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론이 떼우엘체 부족전사의 피를 받은 후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르헨 군부는 페론 제거에 나서게 됐고, 심지어는 죽은 페론의 시체를 절단하는 부관참시를 결행하기도 했다. 또한 페론주의의 말살을 위해 페론당원들을 납치, 살해한 이른바 '더러운 전쟁'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지학계는 페론은 떼우엘체 부족의 마지막 용사였으며 페론이즘 속에는 떼우엘체 부족의 혼과 염원도 함께 녹아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떼우엘체 부족의 생존자였던 그의 생모가 페론에게 떼우엘체 용사들의 혼을 불어넣어주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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