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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전사의 후예였던 페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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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원주민 전사의 후예였던 페론 장군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164> 페론 주치의의 충격고백 (3)

아이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 교육문제에 골머리를 앓던 마리오 페론은 원주민 혼혈아라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아르헨 최남단 코모도르 리바다비아라는 도시에서 몇 년을 보내면서 아이들의 과거를 세탁한다. 그리고 두 아이의 교육을 당시 수도(San Martin 400)에 거주하던 자신의 어머니 도밍가 두떼이 여사에게 부탁하기에 이른다.

졸지에 생모와 헤어져 할머니 품에서 생활하며 교육을 받게 된 후안시또 소사는 세례를 받고 떼우엘체 원주민 부족의 피를 받은 혼혈아가 아닌 후안 도밍고 페론이라는 명망가문의 순수한 혈통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뒤늦은 출생신고와 이름과 성까지 변경한 것 때문에 페론의 할머니는 상당한 벌금을 물게 됐고 이 부분이 훗날 군 엘리트들의 의혹을 사 지난 1945년 페론은 모든 공직을 박탈 당하고 수감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페론의 할아버지였던 또마스 리베라또 페론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페론의 할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의사였고 정·재계와 군 수뇌부 등 아르헨 상류사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또한 아르헨 곳곳에 대규모 농장을 소유할 만큼 소문난 부자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사회 유력인사들이었던 할아버지의 친구들이 앞을 다투어 페론의 신분을 보증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류층 명문가의 자녀로 변모된 원주민 혼혈소년 페론은 도시에서 익히는 새로운 문화를 신기해하면서도 밤이 되면 생모의 품이 그리워 소리 없이 흐느끼는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로움을 많이 타던 페론은 그러나 일단 밖으로 나가면 모든 면에서 주위 분위기를 압도하곤 했다.
▲ 처음 도시로 나온 페론 형제가 할머니였던 도밍가 두떼이 여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두떼이 여사는 미망인이 된 딸의 세 자녀들과 페론 형제를 함께 교육시켰다. 오른쪽 중앙에 소년 페론이 앉아 있다. ⓒ김영길

이는 페론의 생모가 "항상 상대를 이기는 법을 배워라. 너는 어느 종족보다 더 우수한 재능을 가진 용맹스런 떼우엘체 부족 전사의 피를 가진 자랑스런 나의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귀가 따갑도록 주입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론이 육사시절 학업이나 스포츠, 예능 분야에서 월등한 기량을 나타내며 장학생이 됐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생모가 심어준 이런 자부심과 전사 기질을 타고난 모계 혈통 때문이었다는 게 바레이로 박사의 주장이다.
▲ 13세 때 올리보스 중학 시절의 페론. 머리 색이 유난히 검어 '인디오'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김영길

13살이 되던 1906년 당시 상류층 자녀들의 학교로 유명했던 올리보스 국제중학(Colegio Internacional de Olivos) 2학년에 편입한 페론은 한 마리의 야생마 같았던 광야에서의 원주민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학업과 함께 상류사회 적응수업을 쌓기 시작했다.

올리보스 국제중학(6년 과정)을 졸업한 페론은 1910년 11월5일 아르헨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15년 보병 제12연대 전속부관으로 부임, 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 페론은 육사 시절 자신의 과거가 들통나 학교에서 쫓겨날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페론은 말년에 바레이로 박사에게 "나는 항상 생도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학교에서 쫓겨나는 악몽을 꾸었다"면서 "교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한 생도가 일어나 '여러분 여기 이 자리에 우리의 원수인 인디오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인디오와 함께 식사하는 수치를 견디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밖으로 나갈까요'라고 자신을 가리키며 비웃는 꿈을 수없이 꾸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런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페론은 각종 운동에 전력하면서 독서에 매달렸다. 또한 틈틈이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치는 등 의도적으로 바쁜 일정을 만들어 잡념을 없애는 데 주력했다. 이때 익힌 외국어 실력과 지식들은 페론이 군 수뇌부 참모로서 탁월한 역량을 과시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후 페론은 1919년 중위로 진급해 군 병영을 누비다 1924년 대위로 진급하면서 지휘관보다는 군 수뇌부의 참모로 발탁돼 군인으로서 정부 요직을 두루 경험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한다.

페론은 그 해 파리에서 개최된 올림픽경기에 펜싱 부문 국가대표로 참가할 만큼 스포츠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페론은 또 포환던지기, 복싱, 높이뛰기, 농구, 축구 등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페론은 이를 바탕으로 3년 가까이 아르헨 육사에서 교관을 지냈다. 훗날 청년장교단을 이끌며 청년장교들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 배경이다.

'원주민들과 노동자들의 고통을 체험한 페론'
▲ 육군 소위 시절의 페론. 독서와 각종 취미생활로 두려움과 고독을 달랬다. ⓒ김영길

한편 남부로 이주한 페론의 아버지와 생모는 그곳에서 목장을 경영하면서 상당한 재력가로 부상하지만 1928년 마리오 페론은 아들의 출세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후아나 소사 여사는 군에서 승승장구하는 아들 페론의 소식을 언론과 지인들을 통해 전해 들으며 남자 이상으로 열심히 목장을 경영했다고 한다.

페론 대위는 그때부터 군 청년장교단을 이끌면서 초급장교들의 대표주자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1929년 아우렐리아 티손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첫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페론은 1930년 아구스틴 후스또 장군을 도와 청년장교단을 이끌고 군사 쿠데타를 주도, 이뽈리또 이리고젠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정부의 핵심멤버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청년장교연합을 이끌며 승승장구하던 페론은 1938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나 다음해인 1939년 부인이었던 아우렐리아가 암으로 사망하는 비운을 맛보게 된다. 평소 아우렐리아를 끔찍이 아꼈던 페론은 충격에 가까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상심에 빠진 페론은 이때부터 시간만 나면 사복 차림으로 자신과 부인이 함께 애지중지했던 펙카드 37년형 컨버터블 자동차를 몰고 생가였던 로케 페레스 목장을 몰래 찾아 가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로케 페레스 시의 터줏대감이자 현재 81세인 호세 벨라디넬리는 자신이 14세 때 농장 주변에서 사색에 빠져 있는 페론을 몇 번이나 목격했으며 자신에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 페론의 첫 부인 아우렐리아 티손. 티손의 죽음이 '페론주의'를 탄생시키는 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영길

페론은 "너 여기에서 사니, 그럼 너 여기에서 태어났겠구나"라고 묻고 "나 역시 이곳에서 태어났단다. 내 이름은 페론이고 나는 군인이다"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 호세 벨라디넬리는 "아주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당시로서는 거금인 용돈을 내 손에 슬그머니 쥐어주기도 한 것을 잊을 수가 없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나중에 벨라디넬리가 자신의 부모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어머니가 "맞아. 여기에서 페론이라는 아버지를 가진 두 아이가 태어나 살다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고 기억하고 "한 아이가 군인이 됐다고 하더니만 그 아이였구나" 라고 놀라워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원주민혼혈아가 군 고급 장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 페론은 틈틈이 자신의 어머니가 경영했던 로케 페레스 목장에 내려와 말을 달리고 벨라디넬리 아버지 목장의 마차수리를 해주는 등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페론은 이 기간 동안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보기 위해 남부지역 목장들을 전전했고 여기에서 원주민노동자들의 짐승보다도 못한 비참한 생활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당시 라빰빠 농장 생활은 목장주가 인부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고 주위에서 독립적으로 유목 생활하던 원주민들도 목장주 눈에 거슬리면 갖은 구실을 다 갖다붙여 즉결 처벌하는 그런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기도 했다.

한번은 백인이 운영하는 농장의 양들이 울타리를 뚫고 도망 갔는데 공교롭게도 이 양들이 원주민 거주지역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이를 발견한 주인이 원주민 부족들을 양도둑으로 몰아 갖은 체형을 내린 후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다른 지역으로 쫓아내는 황당한 일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 원주민들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한 페론(왼쪽 앉아 있는 이). 뒤쪽 원주민이 페론의 군모를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김영길

이에 울분을 느낀 페론은 목장주인을 향해 "이 땅의 주인이자 조상대대로 여기에서 뿌리를 내린 원주민들의 삶이 당신의 양떼보다 더 못한 존재인가"를 따지며 원주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했다.

페론이 실권자로 부상한 후 맨 먼저 추진한 정책이 힘없는 원주민들과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이었던 것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바로 '페론주의'를 탄생시킨 배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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