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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둥이를 붙잡을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전태일통신 59] 고등학교, 작은 저항의 기억들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 개근상과 졸업장을 네모반듯하게 고이 접어서 찢어버린 지 이제 딱 1년이 지났다. 무단결석과 병결을 몇 번 했는데도 줬던 기만적인 개근상과 졸업장을 찢어버릴 정도로 부정하고 싶은 학교였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의 일탈적 기억, 동아리 활동 등등 추억거리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빛나던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당연히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고 할 것이다.

내신등급제 반대 촛불집회와 두발자유 집회, 토론회로 청소년인권운동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내 삶이 달라진 2005년 고3 시절.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수험생으로서 살던 고3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또 상처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고등학교 마지막 1년으로서 저지르거나 닥쳐오는 사건들 속에 충만했던 나날들…. 분노, 무력감, 서러움, 배신감, 비난 ― 그러면서도 '사랑과 우정', '동지애'에 위안을 얻고, 모든 순간순간 삶의 보람을 구했던 그 중층적인 기억으로, 나는 계속 청소년인권운동을 한다. 그런 점에서 난 언제까지나 청소년인권운동의 당사자다.

이제 나름대로 나도 청소년인권운동에서 약간의 '경험'이 있는 활동가가 되었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려는 다른 사람들과 상담을 하는 그런 조금은 부담스러운 입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잠시 목을 가다듬고 긴장하며 상담 자리에 임하게 된다.

듣고 말하는 것 자체가 조금씩 짐이 되어간다. 수없이 많이 접수되는 두발규제/용의복장 규제, 체벌, 폭언, 소지품 검사, 성적이나 장애 등을 이유로 한 온갖 차별…. "가위로 머리가 잘렸다"거나 "자습 희망원을 O표를 모두 치게 했다." "하키채로 맞았다." "싸대기를 맞았다." "발로 가슴팍을 차였다" 같은 건 예삿일이다. 성적이나, 복장 불량을 이유로 한 폭언은 말도 못하게 많다. 시력이 안 좋아서 시험지를 크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숙제도 안 해오면서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정말 각양각색이다.

90여 개의 학생인권 침해 사례를 정리하는 일을 맡아서 할 때는 얼마나 마음이 조각나던지. 다행히도 그런 것들에 지치면서도 내게는 이런저런 희망적인 대처를 제안해 볼 여유가 남아 있다. 많은 부분 내 고등학교 시절, 작은 저항의 기억들에 의존해서.
▲ ⓒ프레시안

내 모든 상담과 조언은 80% 이상이 고등학교 때 경험에 의존하고 있고, 나머지 20%는 졸업 이후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면서 보아 온 사례들에 의존하고 있다.

수학 선생님이 산만하다는 이유로 집단 체벌을 하려고 할 때, 체벌이 이루어지던 도중에 나가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몽둥이를 붙잡고 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그때 언쟁 끝에 선생님이 알았다고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사랑하니까 때리는 거야."

수학 선생님의 말에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으면서도 몽둥이를 붙잡고 "선생님, 사디스트세요?"라고 되물었다. 이런 설전을 벌이던 오기랄까 각오랄까 그 기분은 계속 내 안에 남아 있고 계속 재생되고 있다. 물론 내가 대체 그때 어떻게 그랬는지 불가사의한 마음도 있긴 하다.

회상해보면 내 고3 시절이란 그런 작은 저항들과 작은 타협들의 연속이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졌다고 나무라는 담임 선생님에게 "내 인생에서 중요한 건 내가 알아서 정해요"라고 말하기도 했고 등교시간, 야자, 공휴일 등교 문제 등으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점심시간 '강제자습'을 도입하고 2학년 학생들에게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강제'하는 것에 반발하여 점심시간에 교정 한 가운데에 2절지를 펼쳐놓고 대자보를 썼다가 집에 징계할 수도 있다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신문부에서 내는 자치신문에 낸 내 글이 잘린 것에 반발하여 새로 '지하신문'을 하나 만들기도 했다. 두발단속 발표가 난 무렵에 함께하던 친구들과 두발자유를 주장하는 전단지를 몰래, 소심한 마음에 지문이 안 남게 장갑까지 끼고 돌렸었다. "제가 왜요?"라고 두발단속 걸린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을 가중 체벌하겠다는 선생님과 그 자리에서 언쟁을 벌였다가 나중에 형식적인 화해를 하기도 했다. 등교시간을 학생회와 재조정한다는 이야기가 돌던 와중에도 계속되는 등교시간 강행과 교문 지도에 화가 치밀어서 그 자리에서 연습장에 글씨를 써 피켓을 만들어 서 있다가 거기 서 있을 거면 다른 지각생들이랑 같이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라는 요구에 나름 '정치적 계산'으로 앉았다 일어났다만 큰 소리로 횟수를 헤아리며 200여 번을 하기도 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강당에서 일어서지 않는 나에게 일어서라고 말하는 교감 선생님을 아예 무시하기도 했었고….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이런 행동들은 무용담 이상이 되기 어렵다. 아무리 혼자 개겨봐도 학교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잠자코 주변 청소년들과 소통하고 조직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효율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만들었던 청소년인권모임을 잘 운영할 방법, 혹은 무너지지 않게 할 방법을 연구하는 편이, 나 자신을 그렇게 노출시키는 것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굳이 그렇게(대학에 와서야 배운 용어지만) '선도투'를 뛰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는지 영웅심리는 아니었는지 많은 비판 지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작은 저항들과 그 저항의 기억들을 사랑한다. 오히려, 2학년 때 단지 방학 하니까 공부 열심히 하자는 의미에서 다 같이 한 대씩 맞자고 엎드리라고 했던 영어 선생님에게 그 자리에서 불복종하지 못한 걸 아쉬워할지언정 저항하고 불복종했던 기억들 자체를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뭐,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그때 만든 청소년인권모임도 어찌어찌 살아남아서 돌아가고 있고….
▲ ⓒ프레시안

열악하기 그지없는 청소년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출발점은, 그런 작은 저항들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매를 붙잡는다고 해서 그 선생님이 체벌을 영영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한 반에 3~5명꼴로 체벌이 있을 때마다 그 매를 붙잡고 버틸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청소년들이 있다면 체벌은 거의 자취를 감출 것이다.

안동의 한 전교조 선생님께서 한 학생이 교사의 체벌을 신고해서 그 학생은 전학을 가게 됐지만, 그래도 그 교사는 그 이후로 체벌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이 직접 현장에서 그런 것을 거부/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연대할 수 있다면 청소년인권 상황은 확,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많이 개선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많은 청소년들이 단속을 피하고, 교사에게 항의하고,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 몇몇 선생님들도 보충수업을 강제로 하지 않고, 학생회를 격려하고 체벌을 하지 않으면서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입시경쟁, 성적, 자격증, 취업, 졸업장, 벌점과 징계, 용의복장규제, 국가주의, 신체적·언어적·시간적·공간적 폭력들로 꽉 짜인 이 억압적인 교육체제 속에서, 사람들 하나하나의 저항에서 희망을 보는 것이, 그렇게까지 허황된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 '하나하나'가 '여럿'이 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테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저항과 불복종을 믿어본다. 많은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매를 붙잡고 버틸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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