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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 강탈 스토리, '더러운 전쟁'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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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수장학회 강탈 스토리, '더러운 전쟁' 능가했다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21> 박근혜 후보, 무지인가 거짓말인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아버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쿠데타집단이 부일장학회를 강탈해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가 됐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박 후보는 "법원에서 강압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해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걸로 안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의 이 주장은 법원의 판결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지난 2월 내린 판결문은 아래와 같다.

"…정부의 강압에 의해 주식을 증여한 사실은 인정되나 당시 의사 결정의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식 증여를 했다고 인정하기엔 부족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 후보가 정말 법원의 판결 내용을 챙겨보지 않아서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서도 모르는 채 거짓말을 했는지 따져보아야 할 새로운 검증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제도권 언론들은 모두가 박 후보의 '무지'라고 보도했다. 그의 측근들이 제대로 챙겨서 알려주지 못한 탓으로 비판한다. 공보단장인 이정현 의원이 그 자리에서 판결문을 보여주니까 박 후보가 들여다보고 나서 "잘못해서 실언을 했다"고 번복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이런 보도는 옳지 않다.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중요한 내용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히겠다고 예고한 뒤 며칠의 여유까지 있었는데 법원의 판결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박근혜 후보의 기자회견은 모든 언론이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이것은 언론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법원의 판결 때보다도 훨씬 더 크게 박 후보의 발언이 보도된 것이다. 여기서 박 후보의 회견 내용이 법원 판결을 거꾸로 뒤집어서 거짓말을 해도 그것이 판결보다 더 크게 국민에게 알려졌다.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말 사진을 보여주며 보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 후보가 무지를 가장해서 법원 판결을 뒤집는 대중조작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인혁당 피해자에 대해서 대법원의 재심 판결이 무죄로 나왔는데도 "똑 같은 대법원인데 서로 다른 두 개의 판결이 나왔다"고 했던 것과 같은 사례다. 사법체계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가장하면서 일반 국민의 인식을 오도하는 대중조작이 아니냐는 것이다.

박 후보는 또 정수장학회가 김지태의 부일장학회와 정체성이 다른 단체라고 말했다. 그는 "정수장학회에 대해 고 김지태 씨의 부일장학회가 이름만 바꾼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면서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변했다. 5.16 쿠데타집단이 부일장학회를 강탈했다가 거기에 기업인 등의 기부와 헌금을 받아 확대 발전시켰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떤 기부와 헌금이 있었겠는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부일장학회를 빼앗은 재산으로 만든 5.16 장학회,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킨 정수장학회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어느 정도 위세를 가졌는지는 여러 말이 필요 없을 터다. 독재권력에 잘 보이려는 기업인과 정치인이 기부해서 키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모태는 부일장학회였고 그것에 떳떳하지 못한 돈이 보태져서 정수장학회로 커진 것인데 그래서 실체가 서로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부산일보와 KBS, MBC, YTN 등 언론 노조의 파업사태는 언론탄압의 박정희 DNA를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인 강제해직이라는 탄압은 박정희의 유신 통치기인 1975년 3월 처음 선을 보였다. 동아일보 기자 134명과 조선일보 기자 수 십 명을 중앙정보부가 광고탄압 등의 공작적 수법으로 강제 해직시켰다. 그 후 전두환 정권도 1980년 5.18 광주시민항쟁 유혈진압 때 자유언론 운동을 벌인 기자들과 비판적 논설을 게재한 언론사 간부들을 강제 해직시켰다. 이런 언론탄압의 시조가 박정희였다.
▲ 박근혜 후보가 정수장학회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 의원의 겸직이사장 연봉이 2억5천여만원이었다니…
박정희의 재산강탈과 별개로 박근혜 본인의 사회윤리가 문제

부산일보 노조는 "정수재단은 독재시절의 장물이기 때문에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노조가 정수재단을 '장물'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5.16쿠데타 세력이 남의 재산을 강탈해 그 재단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1962년 3월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부일장학회의 재산을 강제 기부받았다"고 이미 밝혔다. 진실위는 "부일장학회가 공적으로 운영돼야 하나 5.16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이어져 왔으며 그 과정에서 사유재산처럼 관리돼 왔다"고 지적하고 "합당한 시정조치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박근혜 후보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그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냈다. 박 후보가 이사장을 지내면서 받은 연봉을 보면 대기업의 CEO와 맞먹는다. 장학회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공익재단이다. 그 재단의 이사장은 봉사하는 명예직이어야 한다.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이사장을 맡을 경우 자기 사재라도 기부하거나 외부에서 기부금을 끌어와야 할 자리다. 그런데 박 후보는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1995년부터 98년까지는 비상근직으로 연간 1억3천5백만원을, 99년부터 2005년까지는 상근직으로 연간 2억5천350만원을 받았다.

국회의원으로 재임해 억대의 세비를 받으면서, 더구나 매일 출근해 일할 수도 없는 겸직인데도 상근직으로 전환해 거액의 연봉을 수령했다. 본업인 국회의원 세비보다도 많은 돈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는 정치자금을 만드는 자리로 이용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법적으로 죄가 되는지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우선 유력한 대통령후보까지 된 정치인으로서 기본적인 양식과 사회윤리가 의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사회봉사를 위해 설립한 장학재단의 이사장이 대기업의 CEO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을 받아 온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일장학회 김지태는 이승만 사사오입 개헌 반대 등 소신파 의원
해외 쇼핑을 밀수로 트집잡아 중앙정보부가 부인 구금해 인질 삼아


5.16 쿠데타 집단의 부일장학회 강탈은 권력남용 외에 공문서 위조와 같은 불법 공작도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채 일 년도 안 된 1962년 4월 초 어느날 새벽 5시경.
서울 청운동에 있는 부산 기업인 김지태의 자택, 건장한 남자 둘이서 이른 새벽 시간인데도 거침없이 대문의 벨을 눌렀다. 김지태의 부인 송혜영 씨는 남편이 돌아온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새벽부터 누군가 알아보라고 일하는 아이에게 이른다.

두 남자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송혜영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했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부산으로 같이 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 시간에 갑자기 부산까지 가자니 무슨 일입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송혜영은 아무 잘못한 일도 없다는 생각에 당당하게 따라 나섰다. 그들은 송혜영을 지프차에 태우고는 여의도 비행장에 가서 부산으로 연행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의 수사관들은 송혜영에게 2년 전 남편과 함께 유럽에 여행 갔을 때 산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한 대가 세금을 내지 않고 들여왔기 때문에 밀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당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 몸에 걸치는 장신구 하나씩은 관세 없이 휴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혜영을 첫날 7시간에 걸쳐 주로 해외 쇼핑에 대해 조사한 뒤 교도소로 보내 수감했다. 남편 김지태는 사업차 독일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서 간경화 증세 때문에 입원해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니 급히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도에 병원에서 퇴원하고 급거 귀국했다.

김지태는 조선견직을 창업하고 당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실크 생산업체 '한국생사'로 키워 낸 부산 출신의 대표적 기업인이었다. 기계와 방직으로 큰 돈을 번 그는 부일장학회를 설립해 부산지역의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투자했다. 부일장학회는 김지태의 투자 확대에 따라 차츰 자산을 늘려갔다. 부산MBC에 이어 한국MBC를 설립해 국영 KBS 이후 첫 민간방송을 문 열었다. 부산일보도 인수해 장학회에 기부했다.

김지태는 또 2대와 3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더구나 3대 국회 때인 1954년 11월 이승만의 중임제한 철폐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때 반대하다 자유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건실한 기업인이며 소신 강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의 비위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재산 강탈 대상자로 김지태를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정희가 1950년대 말 부산에서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내면서 모종의 악연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모의하면서 김지태에게 자금지원을 부탁했다. 당시 부산일보 주필이던 황용주가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이어서 그가 추천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김지태는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것으로 그는 쿠데타 세력의 괘씸죄를 샀다.

구금상태서 날인한 기부 날짜를 석방 후로 위조
쿠데타자금 지원요청 거절한 김지태에 정치보복성 구속


아니나 다를까 5.16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들은 김지태를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한다. 속이 보이는 정치보복이었다. 김지태는 당시 거액인 5억4천5백여 만환을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내고 겨우 석방됐다. 그리고는 웬만하면 사업과 신병 치료를 이유로 해외에 많이 체류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런 김지태를 잡아들이기 위해 별 죄도 없는 부인을 인질로 구금한 것이다. 그들이 부인 송혜영을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밀수 혐의로 구금했지만 나중에 물건을 돌려 준 것만 보아도 부인은 김지태의 인질인 셈이었다.

김지태는 4월 중순 귀국하자마자 역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구금된다. 그들이 말하는 죄목은 국내재산 해외도피. 구금과 공포분위기 속 신문 조사는 두 달 이상이나 지속됐다. 그들은 정수장학회의 재산 포기각서를 요구했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육영사업을 하기 위해서 만든 공익법인 아닌가? 운영권을 내놓으면 혁명주체들이 맡아서 잘 할 거요."

김지태는 우선 살고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으로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 집단에 의해 구금당한 상황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해 보았자 언제 풀려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 그때만 해도 박정희 정권이 그렇게 오래 가리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김지태의 눈에 그들은 불법적 조폭이나 다름없는 무법자들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유재산을 기부해 설립한 공익법인을 되찾을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는 부일장학회의 운영권 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20일 장남인 김영구에게 인감도장을 가져 오도록 했다. 김영구가 아버지를 만나러 간 곳은 경찰서도 검찰도 아닌 부산군수기지사령부의 법무관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계엄령 아래도 아니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인데 그들은 김지태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가두었다가 아들을 만날 때는 군수기지사령부로 옮긴 것이다. 부일장학회 기부동의서에 서명하고 닷새 뒤 김지태는 석방된다.

기부동의서에 원래 서명하고 도장을 찍은 날짜는 분명 그가 구금돼 있던 1962년 6월20일이었다. 그런데 국정원 진실화해위가 조사차 자료를 보니 6월30일로 돼 있었다. 진실위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문서 감정을 의뢰했다. 한자로 타이핑된 六월二十일의 二에 한 획을 더 그어서 六월三十일로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6월20일이면 김지태가 구금 상태여서 자유의사에 의한 기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석방된 이후에 서명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같은 쿠데타 집단의 문서 위조로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부도덕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독재정권의 '더러운 전쟁'에서 보기 어려운 사유재산 강탈 자행
신문과 방송은 5.16장학회로 귀속, 토지는 국방부 국유재산으로


박정희 권력의 횡포는 모두가 민주주의의 기본규범을 파괴한 것이 핵심 문제다. 야당 인사와 학생운동 간부 등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자행한 고문악행과 테러가 1977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더러운 전쟁'보다 훨씬 앞섰다. 체제폭력에서 세계적 원조였다. 군국주의 일본도 식민지 저항세력에게나 악독하게 했지 자기네 나라 국민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일본에서 배워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는지 야당 인사와 학생운동 간부들에게 꼭 이민족 저항세력 다루듯 했다.

박정희 권력의 전횡 중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사유재산 강탈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자연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대 시민혁명 이후 확립된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의 수호야말로 국가권력을 포함해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3대 기본권이다. 이 중에서 반민주적 독재권력이 침해하는 것은 대부분 자유권과 생명권이다. 재산권에 대해서는 웬만한 독재권력도 대부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의 사유재산을 강탈했다. 몰수해서 국가 헌납을 해도 안 될 일인데 강탈해서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고 그것을 후대가 상속재산처럼 운영했다. 박정희에 의한 '더러운 전쟁'의 전리품을 딸인 박근혜 의원이 손에 넣은 모양새가 됐다.

모든 장학재단은 이미 사유재산이 아니며 공익재산으로서 설립자가 운영권을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소유권 행사를 가름한다. 그런 재단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것은 그 운영을 특정 가족이 아니라 공공성을 갖게끔 구성된 이사진에 넘기라는 뜻이다. 박근혜 후보가 재단 이사장을 물러난 뒤 후임을 맡아 온 최필립 씨는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부터 박 후보 담당 비서였다. 박 의원은 정수재단의 사회 환원이나 이번 부산일보 사태에 대해 기자들이 물으면 "나는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다."고 답변하곤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박 후보가 물러났지만 자신의 최측근에게 이사장을 맡겨 운영권은 결코 내놓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감행한 사유재산 강탈의 특징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언론사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산의 기업인이며 2선 국회의원인 김지태의 부일장학회 자산을 빼앗을 때 이 장학회는 한국MBC, 부산MBC, 부산일보와 토지 10여만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중에서 3개 언론사를 강압적으로 기부받아 5.16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장학회가 나중에 정수장학회로, 다시 정수재단으로 바뀌었다. '정수'라는 이름은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을 붙여서 만들었다.

그런데 부일장학회가 소유했던 3개 언론사 외에 땅 10여만 평은 국방부에 넘겨 국유재산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유재산 강탈은 언론사 장악이 주목적이었다. 정치권력 확립과 강화에 언론이 중요하며 비판적 언론인이 얼마나 장애인지를 정치군인들이 잘 알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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