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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선포 다음날 야당의원들 고문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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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선포 다음날 야당의원들 고문폭행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20> 국회 해산조치, 사실상 내란

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중대 뉴스가 예고돼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대통령 박정희의 약간 감기 들리고 코 먹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오늘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오늘의 이 역사적 과업을 강력히 뒷받침해주는 일대 민족주체 세력의 형성을 촉성하는 대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약 2개월간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하는 바입니다. …"

방송에서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와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그리고 헌법 개정 등을 선언했다.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 정지라고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아무런 근거조항이 없는 국회 해산조치였다. 대통령의 국회 해산은 초헌법적 헌정파괴로 사실상 내란이었다. 국회를 해산한 뒤 정권 측은 야당 국회의원 중 눈엣가시 같은 인물들을 잡아들였다. 박정희가 이른바 특별선언을 발표한 10월17일은 국회가 한창 국정감사 활동을 벌이던 중이었다.

일제 경찰에게 전수받은 '통닭구이' 고문수법을 야당 의원들에게
중앙정보부 보안사 헌병대 불법연행…구타 물고문 등에 자결 시도도


박정희가 국회 해산을 발표한 1972년 10월17일 당일 밤, 서울 외곽지역에 자리한 아무런 간판도 장식도 없는 삭막한 콘세트 건물.
군 정보기관 소속의 한 소령이 연행돼 온 남자에게 협조해 줄 것을 나름대로 정중하게 당부한다.
"옷을 다 벗으시지요."

그는 겉옷을 모두 벗고 속내의만 남겼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4명의 점퍼 차림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속내의까지 홀랑 다 벗겼다. 점퍼들은 알몸이 된 남자의 팔과 다리를 교차하여 묶더니 그 사이에 큰 막대기를 끼워서는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걸어 놓았다. 이른바 '통닭구이'고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 고등경찰이 우리 독립운동가를 붙잡으면 조직을 캐기 위해 동원했다는 비인간적 고문수법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들이 유신쿠데타 상황에서 야당 인사들에게 그대로 자행했다.

취조 4인조는 '통닭 남자'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는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숨을 못 쉬고 거의 질식 상태인 그에게 또 사정없이 각목 구타가 가해졌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풀어주면 말하겠다고 했다. 점퍼들은 3,4차례나 다짐을 받고는 그를 풀어 땅에 꿇어 앉혔다.

그때 갑자기 그의 입에서 "우드득, 딱"하는 소리가 났다. 자결하려고 혀를 깨물었으나 의치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취조하던 점퍼들은 놀라면서 그를 제지했다.

비슷한 시각, 남산 중앙정보부의 조사실이 있는 안가.

한 50대 민간인이 연행돼 들어왔다. 옷을 벗기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힌다. 이어 의사가 건강상태를 점검했다. 의사는 책임자에게 "혈압이 높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중앙정보부에 끌려왔으니 누구라도 호흡이 가빠지고 혈압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병이 있을 경우 목숨을 잃는 사고가 터지기도 한다.

담당수사관은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곧 나갈 수 있어요"라며 점잖게 취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년전 잡혀왔을 때도 심문하던 수사관으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전되지 않았다.

수사관이 바뀌더니 2인조 고문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고문자들은 기가 빠진 그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고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래도 묻는 말에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자 고문자들은 그를 어떤 작은 방에 집어 넣었다. 진공실 고문이었다. 조금 있으니 얼굴과 가슴이 바깥으로 찢어지는 것 같고 몸뚱이 전체가 공중에 둥둥 뜨는 듯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역시 같은 시각, 서울의 한 군 헌병대 콘세트 막사.

체격이 건장한 40세 안팎의 남자 한 사람이 연행됐다. 남자가 콘세트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2명의 조사요원이 야전 침대용 각목으로 무자비하게 마구 구타했고 그는 실신해 쓰러져 버렸다. 완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남자에게 옷을 다 벗겨서 묶으려면 상당한 실랑이가 벌어질 터였다. 그런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그냥 처음부터 두들겨 패서 기절시켜서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 보니 알몸이 된 채 손과 발이 묶여 주리를 튼 것 같은 상태에서 두 책상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통닭구이였다. 고문자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기술이었다.

이어 얼굴에 수건을 씌워놓고 주전자로 물을 부으니 그는 다시 실신했다. 정신이 들어 보니 의사가 혈압을 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는 것이다. 고문은 밤을 새우며 여러 차례 반복됐다.

일제 치하도, 아르헨티나도 아닌 '박정희판 더러운 전쟁'

이 야만적인 고문장면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것일까. 흔히 우리는 일제 식민통치기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항일 독립운동가에게 가하는 악행을 연상한다. 아니면 1970년대 중반 남미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가했다는 고문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3개 고문장면은 일제 치하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아래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도 지금부터 불과 40년 전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판 더러운 전쟁'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체제폭력이었다. 고문의 공포 속에 치를 떨었던 야당 인사들은 1975년 2월28일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경험담을 공개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선포하자 중앙정보부, 보안사, 헌병대가 설치기 시작했다. 국가기관이 조직폭력배나 다름없는 불법 폭력을 구사했다. 그것은 가히 히틀러나 일제 치하에서 자행되던 체제폭력이었다. 명색이 국민의 대표로서 국정감사 중이던 국회를 해산하고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붙잡아다 악행을 가했다. 가진 고문기술을 동원해 비인간적으로 문초했다.

첫 번째 장면은 당시 신민당의 유일한 군 장성 출신 국회의원인 이세규가 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5.16쿠데타 후 군 장성 출신 중에서도 자기 집 한 채 없이 사는 청렴결백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안보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군 장성 출신인 그가 군 내부 사정에 밝은 것은 당연했고 그것이 야당에 매우 긴요하고 드문 역할이었다. 군 내부에서 익명의 제보도 많았다.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박정희는 자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서인지 특별히 군 내부의 동향 파악에 신경을 썼다. 자신이 과거 남로당의 군내 프락치였다가 그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아서인지 내부 밀고자와 정보망을 특히 미워했다. 군 장성 출신으로 야당에 간 이세규 의원이야말로 그런 점에서 박정희와 그 주구들이 눈독을 들일만한 표적이었다.

군 출신 야당의원 혀 깨물고 자결 시도, 의치 부러져 피투성이
"적군의 포로가 돼도 장군에게는 이렇게 안한다"

군 정보수사기관에서 인간이하의 고문에 시달린 이세규는 혀를 깨물고 의치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된 입을 겨우 벌려 이렇게 소리쳤다.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군에게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 "
"왜 이러십니까 … "

이세규는 양쪽 팔을 잡는 놈들에게 입속의 핏물을 내뱉으며 울부짖었다.
"너희 놈들은 군인도, 인간도 아니다!"

이세규는 5일간이나 더 그렇게 고문에 시달렸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세규의 군부 내 인맥과 제보자 명단이었고 10.17 유신쿠데타에 지지성명을 내 달라는 것. 이세규는 끝까지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더 이상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평생 허리 통증에 시달리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두 번째 장면은 조연하 전 국회부의장, 세 번째는 최형우 전 정무장관이 역시 10.17 유신쿠데타 직후 잡혀가 고초를 당한 증언이다. 최형우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내란 때도 보안사에 끌려가 똑같은 악행을 당한다. 그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 선 후 집권당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실세가 됐다. 그렇게 못된 악행을 당하고도 가해자들과 손잡고 3당 합당을 한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김영삼 정부 아래서 내란과 부정축재로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그들의 체제가 저지른 고문악행을 되갚아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군부정권이 끝나고 명색이 문민정부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도 3당 합당의 대가일까.

유신쿠데타 당시 이와 똑같은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에 당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20여명에 이른다. 위의 세 의원 외에 강근호, 김경인, 김녹영, 김상현, 김한수, 나석호, 박종률, 이종남, 조윤형, 홍영기 등이 모두 국가기관에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유신체제는 헌정중단 시기…10.26 이후도'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

유신헌법은 국민 기본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민주주의 원리인 권력 분립을 파괴했으며, 개헌 절차를 밟았지만 그 절차가 위헌적이어서 '법적으로 무효'였다. 법적으로 무효인 헌법이 통용된 1972년부터 80년까지 '무헌법의 시기'이며 '헌정 중단상황'이었다. 전두환은 유신헌법 중 대통령 임기만 단임제로 고쳐 87년까지 5공 정권을 유지했으니 본질적으로 유신체제 그대로였다. 따라서 박정희의 유신쿠데타로 시작된 무헌법의 시기는 72년부터 80년을 거쳐 87년까지 이어졌다.

87년 6월 시민항쟁의 승리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해서 6공 노태우 정권이 출범했으나 유신체제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임시봉합 헌정이었다. 5공과 6공은 박정희의 친위대에 의한 내란정권과 임시봉합 헌정이 이어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였다. 그 87년 임시봉합 체제가 지금까지 완전 청산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 4년에 2회 연임과 노동3권 보장, 그리고 보편적 복지 등을 규정한 헌법으로 개정해야 민주헌정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과 제도 차원에서 유신체제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간주돼 왔다. 마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오직 결과론적 법리 해석만 내린 검찰 당국의 입장을 보면서 실감했던 불가항력적인 모순구조의 확대판과도 유사하다. 불법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유효하다는 이런 모순성을 법적으로 해소할 방안은 없을지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한 것은 부당했지만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그 나라 정부와 우익진영의 모순된 입장을 바로잡아야 하는 역사의식을 우리 내부 문제에 먼저 적용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한 초헌법적 체제파괴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근거한 개헌이 아니었으며 집권세력이 자의로 작성한 것이어서 사실상 '사문서'나 다름없다. 비상계엄이 해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강행된 국민투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국민투표를 통과했다고 해서 위헌적 절차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유신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과 1948년의 제헌 헌법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이념으로 이어져 온 민주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국민 주권의 기본 속성을 상실한 이단적 통치규범일 뿐이다.

또한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되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 대표기구인 국회의 권능을 대신한 것도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본질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가 아니면 입법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국민 의사를 반영해야 할 입법과정에 행정부가 동원된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대통령이 임명해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가 입안하고 의결한 유신헌법은 집권자가 자기 권력을 자의로 만들어 갖는 절대군주의 행위나 다름없다.

영국의 17세기 민주주의 사상가 존 로크가 가장 타기했던 입법권과 집행권의 결합이 벌어진 것이다. 로크는 그것이 바로 절대권력을 의미하며 권력분립에 의한 견제가 사라진 전체주의 체제의 탄생이 된다고 경계했다. 그런 유신헌법은 민주주의 정치체계에서 법적으로 원천 무효일 수밖에 없다.

군사정권 아래서 자행되는 정치적 비판자와 반대자에 대한 비인간적 고문악행과 암살 등을 '더러운 전쟁'이라고 일컫는다. 더러운 전쟁은 아르헨티나에서 1976년부터 79년까지 군부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저지른 악행으로 세계 시사용어사전에 등재돼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앞서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부터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앞세워 더러운 전쟁을 자행해 왔다. 더러운 전쟁에서 박정희는 아르헨티나의 비델라보다 앞선 선배격으로 부끄러운 세계 최고였다.

집권층 내부에서도 유신헌법 제정에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집권 측의 내부 정보가 야당 인사들에게 전달된 것은 바로 그 불만 때문이었다. 고문 수사관들은 야당 인사들에게 집권측 내부의 정보 소스를 대라고 혹독하게 닦달했다. 유신헌법은 절차적으로 위헌이었으며 자유민주주의에 본질적으로 어긋나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일반 국민에게는 노출되지 않는 정보기관이 민간 정치인들에게 가한 고문행위가 더 큰 문제였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사 진상규명 차원에서 철저히 조사하고 단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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