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 테이블에서 한국측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때면 언제나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라크 파병 요청, 미군기지 이전 협상,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치유 협상 등에서 그는 주한미군 철수 '위협'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다.
2003년 4월 28일 열린 1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회의. 그는 이 자리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개념을 처음으로 꺼내들며 "미 국무부와 의회 등 워싱턴에서는 한미동맹의 현황에 대해 매우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며 그 개념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지난해 5월 주미 한국대사관을 방문해 홍석현 당시 대사를 만나면서도 롤리스는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미동맹과 양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만일 동맹을 바꾸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하라.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진행중인 안보정책구상(SPI) 회의에서는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치유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그는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방부의 영리한 언론플레이
롤리스의 그같은 발언은 종종 한국의 언론을 통해 공개된다. 미국의 입장에서 협상이 잘 안될 때나 어떤 결과를 반드시 얻어내야 할 때면 특히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 다음 수순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다. 보수언론들, '참여정부의 어긋난 자주(自主) 의식이 한미동맹을 무너뜨리고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며 대서특필→한나라당과 반공단체들의 분기→정부 입지 축소→미국에 유리한 결과로 매듭.
미 국방부 관리들, 특히 롤리스 부차관보는 이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한국내 보수적인 여론의 '도움'이 필요할 때면 그런 발언을 슬쩍 흘려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손 안 대고' 관철시킨다.
때로는 한국 정부 내의 '대리인'들이 이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는데 "美 작통권 조기이양은 한국정부 '환수' 주장에 반감으로 나온 역공"이라는 제목의 8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그런 경우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정부 고위관계자'는 미국이 전시 작전통제권(작통권)을 조기에 한국군에 넘기려는 이유에 대해 "우리 정부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2012년 환수'를 주장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따른 반감으로 나온 역공(逆攻)"이라고 말했다.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의 경우
작통권 환수에 관한 최근의 '뜬금없는' 논란은 바로 이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전형적인 사례다.
이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조선일보>의 7월 19일자 보도였다. 미국이 지난달 13-14일 열린 9차 SPI 회의에서 작전권 이양 시기를 2010년 이전에 했으면 좋겠다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한미 군사관계 소식통'을 인용했기 때문에 롤리스 자신이 직접 흘린 건지 한국측 '대리인'이 흘린 건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 기사에는 "미측이 서둘러 작통권을 되돌려 주려는 데엔 최근 불편한 한미관계 때문에 한국측에 대한 냉소적인 분위기가 깔려 있다는 분석도 있다"는 구절이 어김없이 들어갔다. 8일 이 문제에 관한 청와대 모임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SPI에서 그런 '통보'를 한 이는 롤리스 부차관보라고 확인했다.
이 기사가 나가자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궐기'했다. 시기상조론과 '주한미군 완전 철수 수순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현 정부의 자주외교가 화를 불렀다고 열변을 토했다. 여기에 미 국방부 고위관계자(롤리스로 추정)는 <워싱턴타임스>에 한국이 제시한 시한보다 3년 앞선 2009년까지 작통권을 넘기려 한다고 넌지시 알려주며 보수언론들의 분투를 도왔다.
미 국방부의 '고위 관계자'는 또 7일 워싱턴에서 한국 언론들을 상대로 한 이례적인 브리핑을 열어 "작통권을 단독으로 행사하는 시점 이후 주한미군의 감축 규모가 한미 양국이 합의한 1만2500명보다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그 말 뒤에 "(남기기로 합의한) 2만5000명 유지라는 큰 틀에는 변화가 없다"고 부연했고, 전체 브리핑 내용이 한미간에 이미 합의가 됐고 어느 정도 알려진 부분을 확인한 것이었지만, 그 관계자는 '추가감축'이란 말을 한마디 덧붙임으로써 한국의 보수언론들이 '제목감'으로 좋아할 만한 말을 남긴 것이다.
이제 한나라당이 움직일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논란이 불거진 후 간헐적으로 작통권 환수에 문제를 제기했던 한나라당은 9일 '한미관계 복원을 모색하기 위한 정책세미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여론'을 수렴한다며 마련된 이날 세미나에는 보수 일색의 토론자들이 나와 "한미동맹이 깨지면서 한반도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며 환수 연기를 촉구했다. 송영선 한나라당 의원은 "전시 작전통제권(작통권)을 환수하는 것을 자주국방이라고 착각하는 이 정권은 미쳤다. 당당하게 친미(親美)를 외쳐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10일에는 반공단체들의 집회가 예정돼 있으니 롤리스가 즐겨 이용하는 한국내 여론 작동 회로는 이제 자동으로 돌아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갈등 부채질한 윤광웅 국방장관
미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에 비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윤광웅 국방부 장관의 '언론 플레이'도 보수여론의 총궐기를 부추기는 데 단단히 한몫 했다.
윤 장관은 지난 2일 역대 국방장관 13명을 포함한 군 원로 15명을 초청해 가진 간담회에서 작통권 환수 추진을 당장 중단하라는 강한 압박을 '원로'들로부터 받았다.
그러면서 "말씀하신 내용을 위로 잘 전달하겠다"고 말한 윤 장관은 다음날 돌연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오래 전에 군생활을 했거나 국방장관을 역임해 현재 우리 군의 발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들의 말을 되받아쳤다.
누가 들어도 화가 났을 이같은 말은 2일 간담회 참석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역대 장관들이 다시 모이기로 하고 또 윤 장관이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모임을 연기시키는 과정을 겪었다.
이를 통해 보수언론과 단체들은 작통권 때리기의 강한 동력을 얻을 수 있었고, 이제는 작통권 환수가 현 정부의 '그릇된 대미관(對美觀)'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됐다.
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했거나, 주미 한국 대사를 했거나, 국방보좌관을 했던 인사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논조에 설득력을 더하는 영리함을 보여주는 언론도 물론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작통권 논란은 이제 우리 사회의 핵심 아젠다가 됐다. 그러나 작통권의 실질적인 환수 방법, 한미간의 합동 방위체제의 형태 등과 같이 진짜 중요한 쟁점에 대한 논의는 간데 없고, '친미냐 자주냐'의 어긋난 쟁점만 활보하는 퇴행적인 논란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부록'부터 챙긴 미국…공대지(空對地) 사격장 문제 이같은 여론 작동 프로그램을 잘 활용했던 미국은 작통권 문제에 앞서 일단 '부록'을 먼저 챙겼다. 정부가 지난해 8월 폐쇄된 매향리 사격장을 대신할 공대지 사격장을 10월까지 확보하는 데에 총력전을 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공대지 사격장 문제 역시 <조선일보>가 최근 강하게 '밀었던' 이슈였다. 이게 확보가 안 돼 주한 미공군이 해외에 나가 훈련을 하고 돌아오고 있고, 이러다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는 사설과 기사를 써 왔다. 여기에도 '사격장이 없어 한미동맹이 위태로워진다'는 미 국방부의 언론 플레이가 어김없이 자리했었다. 7일 미 국방부 고위관계자가 이 문제를 거론하며 "한미동맹에 매우 나쁜 신호(very bad signal)"라고 우려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이 문제가 작통권 문제보다는 한결 '쉬운' 것이라고 보고 자칫 이 문제가 확산돼 한번 더 '얻어맞기' 전에 빨리 사격장을 확보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 보인다. 정부는 현재 미 공군과 한국 공군이 함께 쓰고 있는 전북 군산시 직도 사격장에 자동채점장치(WISS)를 설치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려는 복안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가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에 전투 하듯 '총력전'을 펴 2개월만에 주민들을 설득하면 되는 '쉬운'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또 한번의 커다란 갈등이 예고되어 있다. 제2의 매향리, 제2의 대추리, 제2의 새만금이 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미국이 그런 상황이 되면 '한미동맹에 나쁜 신호'라는 얘기를 또 다시 흘리지 않을지 두고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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